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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과 2000년 1월 18일은 나에겐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지난 지금 그 때의 글을 읽어보며 삶의 의미를 반추해본다. 역시 자기글의 가장 큰 독자는 바로 자기 자신인 것 같다. 

 

상극의 궁합과 조기 결혼 사연

 

1975년 2월 ROTC 소위로 입대해야 하는 나는 74년 가을 2년 동안 사귄 지금의 아내와 약혼하기로 하였으며 양가에서도 동의하였다. 그러나 약혼식 택일과정에서 불거진 상극의 궁합 때문에 우리의 약혼도 결혼도 파경에 이르렀다. 이 때 나는 큰 시련을 겪어야했다.

 

나는 74년 10월, 부모님과 지금의 장모님께 일방적으로 출가를 통보하고 지금의 아내를 데리고 발길 닿는 곳으로 떠나, 도달한 곳이 금산사이다. 그 날 저녁 스님과 주역에 대해 토론 하였으며, 다음날 오른 산이 모악산이다. 이 과정에서 소중한 딸 진이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진이는 우리의 결혼 전투의 마지막 보루가 되였다.

 

75년 1월 18일 학생 신분인 나는 양가의 지원이 거의 없는 상태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청첩장은 산악회관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우편엽서에 등사한 것 이였고, 결혼식장은 가끔 산악회 모임을 가졌던 시민극장 옆 가톨릭센터를 사용하였다. 내 결혼반지는 ROTC 임관반지로 대신 했고, 아내의 웨딩드레스는 빌린 옷이었다.

 

주례를 산악회 지도교수님께 부탁 드렸으나 당시 40대 초반인 이 교수님은 고 교수님에게 당부하셨다. 신혼 여행지는 금난로에 있었던 미도장여관 2층 이였다. 그래도 난 만족했고 매우 행복하였다.

 

나는 최전방에서 군복무를 시작했고, 6개월이 지난 후부터 나, 나의 아내 그리고 우리 딸 진, 3명의 가족이 부대장님의 특별 배려로 전방에서 살림을 시작하였다.  매일 아침, 부대에 출근 할 때마다 나의 아내는 간곡히 우리의 상극의 궁합(2년 이내에 내가 참변을 당한다는 운명)을 상기시키면서 언행을 조심하도록 심심 당부하였다.

 

매일 아내는 집에서 남편의 무사고를 위한 기도를 올렸으리라. 이러한 주위의 배려와 사랑 때문에 나는 무사히 군복무를 마쳤다. 올해가 결혼 25주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때문에 서울에 살고 있는 딸 진이가 우리의 결혼 25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나와 아내가 살고 있는 대전에 온다.

 

은혼식 기념 모악산 등반

 

18일 아침 6시에 기상하여 30분간 명상 후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모악산 등반을 위해 금산사를 향해 출발하니 7시 30분이다. 유성 인터체인지를 통과하여 호남고속도로에 들어서니 먼동이 트기 시작한다. 맑은 날이다. 결혼25년 기념일 새 아침을 피아노 소나타와 함께 쾌주하는 우리의 적토마(99년식 흑장미색 캐러밴)위에서 맞으니 감격스러워 가슴이 벅차다. 옆 자리의 아내가 새삼스럽게 귀엽고 자랑스럽다.

 

김제 시내에 들어서니, 8시 20분이다. 요즈음 우리는 다이어트 중이라 과일로 점심을 때울 요량으로 바나나를 살려고 했으나 가게에 없다. 대신 단감을 몇 개를 사서 챙기고 금산사로 향한다. 금산사 입구 저수지에 이르자 한가로이 노니는 물오리 때가 정겹다. 금산사 주차장에 이르자 우리 추억 속의 이미지와 아주 다른 모습이다. 25년 전의 추억을 상기할 만한 정표를 찾으려고 했지만 허사다. 세월의 무상함이 절실하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안내판에 의하면 주차장에서 절까지 거리가 상당하다. 매표소에 이르자 겨울인지라 방문객이 적어서 인지 절 안까지 차량 통행을 허락해 주었다. 일주문을 지나 절 앞마당 찻집 앞에 차를 주차하고 등산준비를 했다. 손난로 고장 때문에 한바탕 실랑이를 치르고 나니 들뜬 기분이 가라앉는다.

 

금산사 안으로 접어들자 25년 전 아내와 같이 찍은 사진의 배경이었던 미륵전이 우리를 반긴다. 외부는 3층 목조건물로 되어있으나 내부에는 단층으로 된 건물로 입상의 미륵불을 모신 곳이다. 부처님 앞에서 둘의 결혼을 기원했던 그때의 추억이 새롭다. 부처님께 합장배례를 드리고 아내의 손을 꼬옥 쥐어본다.

 

미륵전 외에는 모두 변해버렸다. 급히 뒤돌아서 등산로로 접어든다. 9시이다. 등산로가 차량도 통행이 가능하도록 매우 넓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모악산 정상에는 001 이동통신의 중개국이 건설되어 심원암 입구까지 시멘트 포장된 차량도로가 났으며 그곳에서 정상까지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물자와 인원들을 운반하고 있었다.

 

광주의 무등산, 대전의 계룡산, 구미의 금오산, 대구의 팔공산 등 우리 강산의 명산중 명산 정상에 시멘트와 철 구조물을 설치하여 민족의 정기를 훼손한 우리의 선배 및 동료들의 무지몽매한 행위 때문에 항상 절통하고 또, 후손들에게도 죄스런 마음을 금치 못하는 나로써, 이런 현장을 또 대하니 땅을 치고 통곡하고 싶어진다. 에라 이! 한치 앞을 못 보는 미물들 …

 

터덕터덕 밉살스런 시멘트 길을 한시간 가량 걷다 보니 케이블카 정류장에서 넓은 길은 끝나고 오솔길이 시작된다. 우울한 기분을 그대로 맡겨두고 길을 재촉하니 계곡의 우측에 모악정이란 간판이 붙은 정자가 나온다. 다시 울분이 새삼스레 복받친다. 심산유곡의 흐르는 물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를 지은 조상님들의 여유로움과 현명함의 발끝이라도 따라가는 식견이 있었다면 …

 

아내의 위로의 말에, 안 넘어가는 간식을 억지로 쭈셔넣고 계곡의 좌측 능선으로 난 길로 접어든다. 산길이 가파르다. 꾸준히 걷다 보니 온몸에 땀이 배어나면서 주위의 경관과 일치되어간다.

 

다 묻어 놓고 오르자!

 

갑자기 끼익끼익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머리위로 케이블카가 지나간다.

 

다 묻어 놓고 오르자!

 

1시간 정도 걷다 보니 모악산 주능선의 안부에 올랐다. 우측으로 중계소가 거대한 괴물처럼 모악산 정상에 앉아있다. 산 정상에 이르자 많은 등산객들이 정상은 중계소 때문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한쪽 구석의 양지에 옹기종기 모여 주위의 조망을 즐긴다.

 

어떤 이는 얏호! 외치고 어떤 산악회원들은 중계소의 시멘트 벽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또, 어떤 이는 주변의 바위 위에서 웃옷을 벗고 가부좌를 튼 체 기수련을 하고 있다. 시장 통에 들어온 기분이다. 우리는 준비한 단감을 두어 개 깎아 먹고 하산을 서두른다.

 

왔던 길은 많은 등산인들의 왕래 때문인지 아니면 정상 구조물 설치 시 자재운반 때문인지 몰라도 너무도 많이 훼손되어 있다. 쓰린 가슴에 더는 보고 싶지 않다. 주능선의 안부를 지나치자 헬기장이 나온다. 전주시 쪽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사람들의 왕래가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 좌측능선으로 들어선다.

 

11시가 지났다. 덜 녹은 눈 사이로 젖은 낙엽을 밟으며 걷는다. 하산길이 호젓하고 좋다. 울분도 많이 갈아 앉았다. 특히, 모악산 정상에서 좌측으로 보이는 장군재, 배재, 617고지로 이어지는 능선의 위용은 그 동안 답답했던 나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 놓는다.

 

오전 등산 시 갈라진 삼거리에 이르자, 산지 아줌마가 팔고 있는 사과가 입맛을 돋운다. 2천 원어치를 주문하자 많이도 준다. 사과를 먹으면서 걷노라니 금산사에 이른다. 애틋하고 오롯한 나의 추억 속에 간직하고 있던 절의 모습이 괴물이 되어 현세로 나와버렸다. 모악산을 뒤돌아보면서 급히 금산사를 떠난다. 2시 이다. 또 오고 싶기도 하고 절대로 와서는 안될 것 같은 묘한 감정에 자꾸 고개를 흔든다.

 

유성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는 딸과 같이 이태리식 라퐁테 식당에서 붉은 포도주 잔을 앞에 두고 둘러앉았다. 딸은 은혼식 기념을 위한 아내와 나의 커플 다이아반지를, 나는 아내와 나의 5일간 중국여행권을, 아내는 군에 간 아들이 보내온 축전과 나에게 선물할 실크 머플러를 손에 쥐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은혼식 추억을 새기며 작성한 글입니다.


태그:#은혼식, #모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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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연구단지에 30년 동안 근무 후 은퇴하여 지리산골로 귀농한 전직 연구원입니다. 귀촌을 위해 은퇴시기를 중심으로 10년 전부터 준비했고, 은퇴하고 귀촌하여 2020년까지 귀촌생활의 정착을 위해 산전수전과 같이 딩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0년 동안은 귀촌생활의 의미를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며 그 느낌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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