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는 6일 의정부 예술의전당에서 뜻 깊은 무대의 막이 오른다. 2002년 이 세상을 훌쩍 떠난 무용가 최현의 제자들이 스승의 6주기를 맞아 그의 예술혼을 기리는 추모공연을 올리는 것이다.

최현이 '비상'을 추는 모습
 최현이 '비상'을 추는 모습
ⓒ 이은주

관련사진보기

무용가 최현? 아마 대부분 독자에겐 낯선 이름일 것이다. 따라서 공연 안내에 앞서 그에 관한 다소 긴 설명이 필요할 듯싶다. 우선 시 한 편.

하염없이 내리는
첫눈
이어지는 이승에
누군가 다녀갔듯이
비스듬히 고개 떨군
개잡초들과 다른
선비 하나 저만치
가던 길 멈추고
자꾸자꾸 되돌아보시는가.

시인이자 스스로 "사시장철 춤 보러 다닌 사람"이라고 밝힌 무용평론가이기도 했던 김영태 시인이 2005년 일흔의 나이에 펴낸 시집 <누군가 다녀갔듯이>의 표제시다. 그는 이 시를 생전에 백아와 종자기처럼 지내다가 먼저 떠난 벗 최현을 그리며 지었다. 그는 시집을 내면서 가진 한 인터뷰에서 "제일 친했던 최현이 73세에 갔으니 나도 그때까지만 살아야지"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2년 뒤 그 역시 벗의 곁으로 떠났다.

한량의 풍류와 선비의 기품을 함께 지닌 춤꾼

김영태 시인이 그토록 절절히 그리워했던 무용가 최현(1929~2002·본명 최윤찬)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일반인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는 한국무용계에선 '한량의 풍류와 선비의 기품을 함께 지닌 춤꾼'으로, 또 가까운 지인들 사이에선 '멋을 아는 이 시대의 마지막 낭만주의자'로 칭송되던 예인(藝人)이었다.

1929년 부산에서 태어난 최현은 17세 때 김해랑을 만나 그의 제자로 춤의 세계에 첫발을 디뎠다. 이후 김천홍 한영숙 이매방 장재동 황무봉 김진옥 같은 예인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궁중무 민속무 승무 살풀이 탈춤 기방무 등 그의 표현에 따르면 "선대들이 남겨준 보물"을 두루 배우고 익혀 자신의 몸짓에 간직했다.

한국춤의 기본을 체득한 그는 1954년 독립해 최현무용연구소를 열고, 1974년 최현무용단을 꾸렸다. 이후 2002년 일흔셋의 나이로 눈을 감기까지 무용극 창극 마당극 뮤지컬 무용소품 등 100여 편의 작품을 안무하며 자신의 춤 나래를 활짝 펼쳐보였다. 1986년 아시안게임 문화축전 식전행사로 '영고'를, 1988년 서울올림픽 폐회식 때 '안녕'을 안무하기도 했다.

작품 창작에서 그는 완벽을 추구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무대에 올리기 직전까지 작품을 손봤으며 음악, 조명, 의상까지 꼼꼼히 챙겼다. 심지어 숙명으로 받아들인 춤의 길을 걸은 지 48년 만인 1994년에야 첫 개인작품전을 가질 정도였다. 평론가 박용구는 그런 그를 보고 "제 살을 뜯어 먹는 완벽주의자"라고 평했다. 최현은 첫 발표회가 늦어진 데 대해 이후 한 인터뷰(<월간 문화예술> 1999년 10월호)에서 이렇게 변명(?)했다.

"공간 속에서 춤춘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찰나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우주적 질서의 운용과 조형미, 영상미를 다룬다는 것은 늘 어렵습니다. 마치 건축과 같다고나 할까요. 발동작 하나, 손동작 하나가 모두 허공에 쌓는 아름다운 건축물을 위한 작은 벽돌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듯 자신의 몸으로 한국무용의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온 그였지만 그는 인간문화재도, 예술원 회원도 아니었다. 90년대 한때 국립무용단장이라는 감투를 쓴 적도 있지만 그조차 투서 한 장에 "자존심 상한다"며 사표를 던졌다. 박용구는 그에 대해 "인간문화재라는 물신화의 명예를 비켜선 창조적인 예술가"라고 했다. 오히려 그가 관심을 둔 것은 후학 양성이었다.

"춤 인재 배출이 나의 삶의 목표"

최현이 '허행초'를 추는 모습
 최현이 '허행초'를 추는 모습
ⓒ 최현 우리춤원

관련사진보기

그는 서울예전 교수직을 수년간(1981-1985) 맡았고 세종대 이화여대 중앙대 한성대 등에도 꾸준히 출강했지만, 특히 서울예고·예원학교와의 인연은 길고 깊다.

"춤 인재 배출이 나의 삶의 목표"라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그는 30여 년간 두 학교를 오가며 한국무용의 꿈나무들을 각별한 애정으로 키웠다. 수업시간에 때론 장구가 날아다닐 정도로 괴팍하고 엄격한 선생이었지만, 판박이 춤을 배제하고 학생들이 자신의 신명과 춤 빛깔을 찾도록 계속 북돋웠다.

그의 아내였던 원필녀 전 울산시립무용단 예술감독을 비롯해 이미미 '최현 우리춤원(院)' 회장과 한양대 백정희 교수, 서울예고 서영님 교장 등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무용계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젊은 시절엔 <시집가는 날> <춘향전> <자유결혼> 등 10여 편의 영화에 주연 또는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고 한다.

음악에서도 득음의 경지에 이르러 1992년 백남준이 '즉흥연주, 비디오 춤과의 만남' <더불어, 그리고…>란 퍼포먼스를 펼칠 때 무대 뒤에서 타악을 연주했다. 또한 2001년 '장터포터클럽'을 만들고 초대회장이 돼 니콘 F5 카메라를 목에 걸고 매월 전국의 장터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가 특히 장터를 찾았던 까닭은 그곳에 인정이 넘치고, 사람 냄새가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타고난 춤꾼이었다. 여성 위주의 한국무용계에서 남성 춤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켜온 독보적인 남성무용가였다. 소설가 이세기는 그의 춤에서 '절제된 몸짓'과 '여백미'를 높이 샀다. 연극평론가 이태주도 그의 춤은 "산수화 같은 달관의 세계"에 닿아 있는 "초월과 허무의 그림"이라고 평했다.

최현의 '종자기' 김영태 시인은 호방하면서도 단아하고, 흐드러진 듯하면서도 꼿꼿함을 잃지 않고, 또 꽉 찬듯하면서도 허허로운 그의 춤을 보고 "비어 있는 것은 아름답다"며 '허행초(虛行抄)'란 시를 지어 선물하기도 했다.

'마음을 비우면 그 마음속에 길이 난다 / 손에 든 부채를 버리면 춤의 길을 걸어온 손이 잠깐 해방될까? / 그것도 잠시 마음이 허한 법 / 마음 다 비운 뒤에 허전함이 다시 부채를 들지 / 평생 그 일념 때문에 지화자 얼씨구 춤으로 빈 마음 채우고 다시 길 떠날 듯.'

최현은 그 시를 춤의 언어로 빚어 화답했다. 극작가 차범석, 화가 이만익, 소설가 이세기, 사진작가 배병우 등 그의 작품과 예술혼을 사랑했던 문화계 인사들이 '허행초 사람들'이란 모임을 만들고, 2000년부터 '허행초상'을 시상해오고 있기도 하다. 2004년 '허행초상' 수상자는 김영태였다.

제자들의 몸짓을 빌려 다시 펼쳐질 최현 춤판

제자들은 하늘의 스승에게 올리는 이번 추모공연의 제목을 '최현의 허행초'로 잡았다. '구름에 달 가듯이' 한평생 춤을 추며 살다간 스승의 춤과 삶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에필로그로 생전에 '허행초'를 추던 최현의 모습을 영상으로 만날 수도 있다.

첫 무대는 '최현 기본무'로 연다. 이미영(국민대 무용전공 교수)·남수정(용인대 무용학과 교수)·마혜일(서울예고 한국무용 전임)·김옥희(상명여대 강사) 등이 맺고 풀고 어르고 채는 우리춤 특유의 호흡과 몸짓으로 산수(山水)와 맞닿아 있는 최현 춤을 다시 그려낸다.

이어 정혜진(예원학교 무용과 부장)이 작품 '고풍(古風)'을 춘다. 산조의 선율 따라 넘치는 신명으로 섬세한 선 파장과 예스러움 속에서 조화로운 여인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최현이 안무한 '시집가는 날'의 한 장면
 최현이 안무한 '시집가는 날'의 한 장면
ⓒ 최현 우리춤원

관련사진보기


최현의 제자들로 구성된 '최현 우리춤원'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한 이미미는 작품 '연정(戀情)'을 무대에 올린다. 남성적 악기인 거문고와 여성의 우아한 춤이 음양의 조화를 이뤄 강인하면서도 소박하고 단아한 춤의 맛을 보여준다.

또한 백정희(한양대 교수)는 한양대 강사 및 학생들과 함께 '미얄할미'를 공연한다. '봉산탈춤'의 일곱 번째 마당의 익살과 해학을 압축해 춤 사위로 뽑아낸 작품이다.

한국무용협회가 지정한 명작명무인 '비상(飛翔)' 무대는 전 국립무용단 주역무용수 윤성주가 맡는다. 최현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독무'로 꼽았던 작품으로, 드높은 창공을 나는 학의 고고함과 자유분방함이 돋보이는 춤이다.

그밖에 최현의 제자의 제자들인 예원학교 무용과 학생들이 '들판에 나앉아'와 '시집가는 날'(제1막 제1장)을 공연한다. '들판에 나앉아'는 1989년 예원 무용발표회 때 초연됐던 작품이고, '시집가는 날'은 오영진의 희곡 <맹진사댁 경사>를 무용극으로 만든 작품이다.

사람을 좋아하고, 예술을 좋아하고, 그렇기에 술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최현은 2002년 7월 8일 간암으로 춤의 날개를 접은 뒤 파주에 묻혔다. 그는 춤추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냐고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춤추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은 거울처럼 투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거울은 춤추는 사람의 인격이요, 자세입니다."

이번 추모공연이 단지 그의 춤사위를 재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춤에 관한 정신도 되새길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공연 문의전화는 031-828-5841~2.

덧붙이는 글 | 최현의 허행초(虛行初), 일시 2008년 7월 6일(일) 오후 5시, 장소 의정부예술의전당 대극장, 주최 의정부예술의전당·최현우리춤원, 관람료 1-5만원, 문의전화 031-828-5841



태그:#최현, #한국무용, #허행초, #우리춤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