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새벽 4시. 인천시외버스터미널
새벽 4시. 인천시외버스터미널 ⓒ 고두환

6월 25일(수) 새벽 3시 30분.

내 나이보다 오래된 배낭을 둘러메고 인천의 낯선 거리를 헤매고 있다. 아직도 거리엔 술집을 배회하는 사람들과 전봇대를 벗삼아 신세한탄을 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전날, 기꺼이 하룻밤을 허락해준 학보사 선배와 함께 추억을 꺼내보고, 신세한탄도 해보다가 밤을 꼴딱 새버린 탓에 정신이 없다. 그러면서 살짝 걱정이 된다.

"아, 일정도 빡세다는데 괜히 처음부터 비실대는건 아니겠지?"

택시를 타고 도착한 인천터미널. 어느새 4시다. 4시 20분에 인천공항으로 출발하는 버스가 있다고 들었는데, 터미널의 문은 꼭꼭 잠겨있다.

표를 사야한다는 압박감에 터미널 문 앞을 서성거리니 안쪽에서 문을 열고 경비아저씨가 나오신다.

"왜 학상, 무슨 일 있어?"
"네. 제가 인천공항에 가는 버스를 타려고 표를 사려고 하는데요!"
"잉. 난 또 무슨 일있다고. 저기 가면 4시 20분에 버스가 출발햐. 그냥 돈내고 타면 댜!"

그렇다. 새벽부터 표를 팔리는 없었던 것이다.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에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든다. 모두들 나만한 배낭을 하나씩 메고 나타났다. 친구인 듯 보이는 두 사람이 나에게 와서 말을 건다.

"저흰 군대가기 전에 동남아 일주하러 배낭여행 가는데, 어디 가시나봐요?"

"네. 저는 사진찍으러 필리핀에 가요!"
"이야. 그쪽 관련 전문가신가봐요?"
"(정말 부끄러웠다) 그건 정말 심각한 오핸데. 그냥 운이 좋아서 가요"

큰 일이다. 초면인 사람들도 사진 찍으러 간다니 보는 눈이 달라진다. 필리핀 관광청에선 이번 사진 출사 중 동굴사진을 가장 중점에 두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삼각대를 놓고 어두운 곳에 사진을 찍어본 건, 퇴근 후 공산성을 찍어본 이틀 전이 처음이었다.

8000원을 내고 버스에 승차. 드디어 인천공항으로 버스가 출발했다. 잠은 하나도 못잤는데 잠시나마 눈을 붙일 수가 없다. 멍한 상태에서도 조금씩 설레여서 였을까?

우리 팀(코닥 - 야후 - 필리핀 관광청에선 '2008 코닥, 필리핀 사진원정대'를 기획하여 바나우에, 비콜, 수빅, 팔라완을 6월 25일 ~ 30일까지 보냈다. 우리 팀은 바나우에였다)은 총 6명이다.

팀장엔 야후 코리아 이훈 대리님(이하 훈 형). 로코클럽이라는 카메라 전문 사이트를 운영하는 창성 형님. 회사원 지윤 누나. 휴학생 장미와 나. 그리고 현지에서 우리 팀을 이끌어주실 김남휘 큰형님까지.

첫 미팅 때 해외여행 및 출사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던 팀원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던게 생각났다. 출사를 가는 손에도 코닥 Z1012 IS, 니콘 COOLPIX 510S, 친구한테 빌린 삼각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언제나 넘치는 자신감은 나에 가장 큰 무기 중 하나, 묻어간단 생각 둘, 별 걱정은 없다.

 인천공항 내부
인천공항 내부 ⓒ 고두환

5시 20분. 드디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만나기로 했던 G카운터 앞으로 가니 훈 형이 열심히 닌텐도DS를 즐기고 있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나처럼 밤새 친구와 그리고 이슬과 함께 했던 것 같았다.

두 번째 날 맞아주는 인천공항. 4년 전에 첫 방문 때는 '단장'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직함을 걸고 10여명이 되는 사람들과 장비들, 그리고 부담감이 날 짖눌렀는데, 가장 부족한 채 떠나는 이번 여행은 왜 이리도 마음이 편한지. 그나저나 모든 것이 새로운 이 공간이 왠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팀원들을 기다리는 시간. 한 엄마와 아이들 세 명이 옆에 앉아 있다. 엄마는 혀가 많이 꼬부라진 한국말을 쓰고, 아이들은 모두 영어를 쓰고 있었다. 요 몇 년간 볼 수 없었던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니 신기했다. 문제는 그들이 하는 말을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영어에 참으로 무심한 젊은이가 아닐 수 없다.

6시도 안 된 시간. 한산할 것 같은 공항은 이미 많은 이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온화한 미소의 승무원들, 분주하게 공항을 정리하는 직원들, 바쁜듯이 비행기표를 들고 걸어가는 외국인들과 시시 때때로 보이는 공항경찰의 모습까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이 순간에도 세계를 내집삼아 드나드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뒤처지는 것만 같아 조바심을 내본다.

6시. 팀원들은 모두 모였다. 첫 미팅 때완 너무 다르게 평범한(?) 사람들 같다. 사진과 여행에 전문가들처럼 보이던 이들이 새벽부터 초췌한 모습으로 나와서 였을까? 그래서 한결 다가가기가 편하다. 여하튼 우리는 햄버거를 하나 먹고 비행기표를 발권 받은 채 공항의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탑승구
탑승구 ⓒ 고두환


게이트 앞으로 보이는 phillipine airline의 비행기와 맑은 하늘. 그리고 창문으로 비치는 사연들이 담겨있는 여행가방들까지. 군대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해외여행의 푸른 꿈이 이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탑승전 핸드폰을 꺼두는 것으로 모든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나버렸다.

 비행기 내부
비행기 내부 ⓒ 고두환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가 생각난다. 조바심과 두근거림으로 가득했던 그 순간. 맥주를 마시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되리어 붉어진 얼굴과 뜨거워진 몸 탓에 고생했던 그 순간. 양 옆에 탄 미인들 탓에 긴장했던 그 순간. 그리고 화장실 문을 어떻게 여는지 몰라서 당황했던 그 순간까지. 물론 두 번째 타는 비행기라고 별반 다르진 않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한 이 느낌, 아. 촌티난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필리핀
창 밖으로 보이는 필리핀 ⓒ 고두환


 창 밖으로 보이는 필리핀
창 밖으로 보이는 필리핀 ⓒ 고두환


 창 밖으로 보이는 필리핀
창 밖으로 보이는 필리핀 ⓒ 고두환


3시간여 지났을까? 필리핀의 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창 넘어로 본 필리핀의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다. 연신 셔터를 눌러봤지만 그 아름다운 장면을 제대로 담지 못해서 아쉬움 반, 이번 여행이 지나면 언제 다시 이 장면을 볼 수 있을까라는 쓸데없는 걱정 반이 내 머릿속을 짓눌렀다.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즐기기도 부족한 시간에.

 마닐라 공항의 야자수
마닐라 공항의 야자수 ⓒ 고두환


드디어 도착한 마닐라 공항. 아시아를 강타한 조류인플류엔자조차 침범하지 못했다는 필리핀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다. 후텁지근한 날씨, 현지에서 우리팀을 이끌어주기 위해 나온 분들은 "더우세요? 난 긴팔입어도 하나도 안더운데!"라며 넉살좋은 웃음을 지어주신다. 팀원들의 이마엔 어느새 송글송글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어느 새 잊혀진 한국, 그리고 머릿 속의 짓누르던 수많은 단상들과 편두통.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과 동경이 다가오면서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되는 어리숙한 젊은이.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기대치가 한껏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필리핀 관광청'과 '야후'가 함꼐하는 '코닥 사진 원정대'의 후원으로 작성됐으며casto와 푸타파타의 세상바라보기(http://blog.daum.net/casto)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CASTO#필리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