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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비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실력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하지만, 알바비도 두둑히 받았으니 이것을 두고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때는 바야흐로 대학생활에 한참 재미를 붙이던 대학 2학년. 그때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학교 주변에 PC방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주변에 깔려 있던 것이라곤 대부분이 당구장과 호프집, 음식점들뿐이었다. 그리하여 아르바이트를 하려 해도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않았다. 기껏해야 호프집 서빙이나 음식점 잔심부름, 그리고 당구장에서 공을 닦고 게임비 계산하는 잔일을 도와주는 것에 불과했다. 몸이 건장한 사내들은 일명 '막노동'을 하며 단시일에 많은 돈을 모으려고 도전하기도 했다.

 

흔히 하는 말로 '쇠도 소화시킬 젊은 나이'에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그런 시기였지만 힘든 일보다는 덜 힘들면서 보수는 더 많이 주는 일에 사람들이 몰리는 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방학을 맞이하여 특별히 계획한 일이 없던 난 수업료라도 마련하려는 심산으로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당구장 알바에 도전하게 된 사연

 

시험을 마지막으로 2학년의 한 학기가 끝나고 본격적인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동기들은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배우고 싶었던 분야에 대해 공부를 하는 부류, 별 계획은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괜히 바쁜 척하며 급하게 고향집으로 향하는 부류, 또 학비를 마련한다며 아르바이트를 하려는 부류 등 제 각기 다른 목표를 세우고 기나긴 방학에 들어갔다.

 

아르바이트 부류에 속한 난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전에 제일 먼저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정해야만 했다. 난 이미 전에도 학교 근처의 한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어 밤에 일해야 하는 호프집은 제쳐두고 다른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한참 고민을 하고 있던 중에 과 후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형! 당구장에서 일 한번 해볼래?"

"당구장? 괜찮냐?"

"보수는 얼마 안 되는데 시원하고 당구도 배울 수 있으니까 좋잖어."

"하긴 돈 주고도 (당구) 배우는데 일하면서 공짜로 배울 수 있다면야 뭐."

"그래? 그럼 후문쪽에 ○○당구장으로 한 번 가봐. 전화해 놓을게."

 

그 당구장에서 일하던 후배가 다른 일을 한다며 당구장 주인에게 말해 나를 추천해 준 것이다. 전화를 끊고 난 바로 후배가 일하고 있던 당구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왔어 형! 인사드려. 여기 사장님이야."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반가워요. 얘기는 이미 다 들었어요. 내일부터 나오도록 하세요."

 

얘기를 다 들었다며 나를 반겨주는 당구장 사장은 중년의 여자였고, 아들이 같은 학교에 다니는데 나보다 후배라고 귀띔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생애 두 번째 아르바이트가 시작되었다. 사실 후배가 당구장 아르바이트를 권했을 때 두 번의 생각 없이 곧바로 결정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내가 당구를 막 배우던 시기여서 누우면 천장이 당구대로 보이고 그 안에서 당구공이 왔다갔다 하는 게 보일 정도였다. 한마디로 당구에 미쳐있던 시기라 당구를 배우고 싶은 욕구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당구를 배우면서 선후배들에게 뜯긴(?) 돈이 아까워서였다.

 

뜯겼다는 표현이 조금은 이상하긴 하지만 당구를 배우면서 '내기 당구'를 해 게임비는 물론 밥값에 술값까지 손해본 게 한두 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구장 알바 이후 '동네북'에서 '고수'로 변신하다

 

난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당구라는 걸 접해 봤다. 물론 그 전에 TV를 통해서는 많이 봐 왔지만 직접 당구장에 들어가서 큐를 잡고 직접 쳐본 것은 대학 들어와서 처음이었다. 물론 족구, 농구에도 재미를 붙이고 있던 시기였지만 그런 것들보다도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 배운 당구가 스릴도 있었고 재미도 있어 수업을 빼먹고 선후배들과 한참 '내기 당구'에 빠져 있을 시기였다.

 

"당구 배우려면 돈을 들여야 돼. 안 그럼 당구 안 늘어."

 

같이 당구를 치러 간 선배들이 항상 하는 말이다. 난 이 말이 진리인 줄 알았다. 그리하여 선배나 동기들과 함께 당구를 치면서도 게임에 져서 게임비를 내는 건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점심내기, 저녁 술내기 등 내기를 걸어 편을 갈라 일명 '갬뺑이(복식)' 당구 시합도 자주 했다. 스릴 넘치게 마지막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부가 갈리면 이긴 팀은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인데 반해 진 팀은 게임비에 점심값에 저녁술까지 덤탱이를 쓰게 되는데 난 괜히 나 때문에 졌다는 생각에 그 모든 짐(?)을 짊어졌다.

 

'언제까지 이래야 되나? 차라리 당구를 안치는 게 낫겠다.'

 

게임에서 지면 항상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누군가가 당구장에 가자고 하면 하던 일을 멈추고 같이 따라가게 되었다. 이미 결과는 나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한참 동안을 이렇게 게임비와 밥값, 술값을 대주며 남 좋은 일만 시키던 중에 일을 하게 된 당구장 아르바이트는 이후 남은 내 대학생활에서 당구장 게임비나 밥값을 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내 실력을 '동네북'에서 '고수'로 변신시켜 버렸다.

 

시간당 알바비 1800원, 돈보다 소중한 것을 얻다

 

아무리 당구가 좋다고 해도 그래도 아르바이트인데 보수도 따져보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물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 보수가 많지 않아도 불만은 없었다. 게다가 소개시켜 준 후배는 보수가 얼마 안된다고 이미 귀띔을 해 준 터라 이미 각오는 돼 있었다.

 

그런데, 당구장 여사장은 고맙게도 학교 근처에 있는 다른 어떤 아르바이트생보다 많은 시간당 1800원의 알바비를 계산해 주었다. 당시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호프집도 그 정도 보수밖에 주지 않았으니 낮에 일하면서도 꽤 괜찮은 보수를 받은 것이다. 더군다나 집이 조금 멀다는 이유로 차비까지 얹어서 월급을 받으니 60여만 원이나 되었다.

 

'이 자식(후배)은 이 정도 보수가 적다고 말하다니? 학생이 이 정도 받으면 됐지.'

 

이런 생각을 하며 후배를 헐뜯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소개시켜 준 후배가 고마웠다. 월급을 받으면서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일한 한 달을 되돌아 보았다. 술 먹고 와서 당구치다가 음료수를 엎지르는 등 갖은 추태를 보였던 질 안좋은 손님으로부터 내가 심심할까 봐서 일부러 내가 일하고 있는 당구장으로 놀러 온 후배며, 친구들, 그리고 혼자서 당구장에 와서 나와 시합을 하자고 제안하며 당구를 가르쳐 준 당구의 고수들, 이렇게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난 돈보다도 더 소중한 인맥을 얻게 되었다.

 

난 지금 당구 200점을 친다. 지금의 수준이 바로 그 때 당시 당구장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배운 실력 그대로다. 나보다 더 잘 치는 사람들은 '200점이 무슨 고수라고?'하고 생각하겠지만 나와 같이 당구 게임을 즐기던 무리 속에서는 더 이상 이쪽저쪽에서 게임비며, 밥값, 술값을 내던 '동네북'이 아닌 '고수'로 통한다.

 

대학 졸업 이후 지금까지 10여 년간 당구를 치지 않았지만 그 당시의 멤버들은 지금도 나를 만나면 그들은 나를 '고수'라고 부르며 게임에 도전한다. 우연찮게 얻은 일자리인 당구장 아르바이트는 내 실력을 늘게 해주기도 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때 배운 당구실력이 그 이후로도 당구를 통해 사람들을 쉽게 사귈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잘 모르던 사람과도 게임을 통해 친해졌으니 말이다.

 

당구장 아르바이트 이후 내 인생에서 '아르바이트'라는 단어는 없어졌지만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는 충분한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아르바이트, 그 달콤 쌉싸래한 기억 응모'


태그:#당구, #아르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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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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