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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나라인 왜국은 국왕의 고향이었다. 국왕은 지난 봄에 이어 여름을 맞아 또 한 번 왜국을 방문했다. 지난 번엔 상국의 황제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고향에 들렀지만, 이번엔 황제가 고향까지 오기에 버선발로 달려가야 했던 것이다. 

 

"국왕전하, 백성들의 촛불이 꺼져가고 있사옵니다. 편히 다녀오소서."

 

충직한 대신들의 배웅을 받으며 달려간 고향길이었다. 고향행 비행기 안에서 국왕은 즉위 이후부터 일어난 일들에 대해 되새김질 했다.

 

'모든 권력이 백성들로부터 나온다고? 미친 소리! 국왕의 권력은 백성이 아니라 지존인 나로부터 나온 것임을 왜 모르는 거야!'

 

내심 그런 생각을 하고 국왕 자리에 올랐던 그였기에 현재의 헌법은 눈엣가시였다. 그런 이유로 국왕은 두 달이 넘는 지난 세월 동안 '헌법 제1조를 어떻게 하면 바꿀까'만 생각했다.

 

상국으로부터 들여 올 쇠고기로 인해 가엾은 백성들이 촛불을 밝힐 때만 해도 모른 척 하면 되니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권력이 백성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백성들이 무지하다고 판단했다.

 

'지들이 뭘 안다고 나랏일에 나서. 무식한 것들은 그저 몽둥이가 제격이야!'

 

그래서 선택한 것이 '몽둥이'와 '방패', '물대포' 등이었다. 포도청장은 국왕의 의중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포도청장은 촛불을 들고 저잣거리로 나온 백성들은 개 패듯 했다. 촛불만 들어도 끌고가 치도곤을 쳤다.  

 

그 뿐인가. 백성의 입과 귀를 막는 일도 시중(侍中)이 알아서 잘했다. 그와 함께 의금부까지 나서 주었으니 국왕의 앞 길엔 이제 거칠 없이 없었다.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했다. 국왕이 되어서 몇 개월 만에 다시 밟아 본 고향. 탯줄을 묻은 곳이라 그런지 흙냄새부터가 달랐다.

 

"아, 역시 고향만큼 좋은 곳이 없어."

 

국왕은 체신도 잊고 땅에 넙죽 엎드려서는 흙냄새를 큼큼,하고 맡았다.

 

"전하, 황제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걸음 하시는 게…."

"아, 그렇지. 고향에 오니 모든 게 릴렉스 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가봐."

 

국왕은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달려 황제를 만나러 갔다. 광채가 나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도 확 풀렸다. 그런 이유로 황제를 가까이 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국왕은 황제의 말이 별로 웃기지도 않았지만 큰소리로 웃었다.

 

"하핫, 기분좋습무니다."

 

국왕이 어깨를 흔들며 웃자 황제의 마음도 흡족했다. 황제는 국왕의 어깨를 감싸며 영어로 뭐라고 씨부렸다. 알아 들을 리 없는 국왕이지만 또 큰소리로 웃었다. 웃을 일도 아닌데 국왕이 먼저 웃어 버리자 난감한 것은 역관이었다. 사실대로 통역했다가는 큰일 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전하, 앞으로는 제 통역을 들으시고 웃으시는게…."

 

역관이 국왕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국왕이 "괜찮아, 황제가 나에게 하는 말은 다 좋은 말 밖에 없으니까 미리 웃어도 실례가 안될 거야"라고 말했다. 한 시간 남짓 황제를 알현한 국왕은 주변의 국왕들과도 만났다.

 

"제 고향을 찾아 주시어 감사드립무니다. 앞으로 자주 만났으면 좋겠습무니다. 하핫!"

 

국왕은 신이났다. 국내에서 웃을 일이 없었던 터라 귓전에 바람만 지나가도 '하핫'하고 웃었다. 그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검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머리에 대더니 두어 바퀴 돌렸다.

 

"왕이 드디어 미쳤나비어…."

 

백성들의 말이 맞았다. 짧은 고향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국왕은 노론파 수장을 불러 비밀리에 '헌법 제1조'를 바꾸라고 지시했다.

 

"전하 걱정마십시오. 백성 마당을 우리가 장악했습니다. 당장 바꾸겠습니다."

 

노론파 수장이 돌아가고 밤이 왔다. 국왕은 며칠 만에 뒷산에 올라갔다. 촛불이 있는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촛불이 보이지 않았다. 모처럼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관저로 돌아와 고향에 갔던 일을 신문들이 어떻게 보도했는가 궁금해 인터넷을 켰다. 부팅이 되는가 싶더니 촛불 하나가 화면 가득 들어왔다. 화가 난 국왕이 컴퓨터를 집어 던지며 말했다.

 

"촛불이 관저까지 들어오다니!"

 

밖에서 졸고 있던 도승지가 놀란 가슴을 하고 들어왔다.

 

"전하, 무슨 일입니까?"

"저잣거리에 아직도 촛불이 켜지고 있소?"

"그렇긴 하지만 이젠 아이들 장난 수준이라…."

"그래도 촛불은 아니되오. 당장 잡아 들이시오. 초를 만든 배후는 물론이고 등불을 든 놈들까지 다 잡아 들이시오."

 

도승지가 급히 포도청장에게 그 말을 전했다. 포도청장이 저잣거리로 나간 시간, 도승지는 급히 서빙고에 연통해 얼음을 가지고 오라했다. 얼음 찜질이라도 시켜 주어야 국왕의 화가 풀릴 듯 싶었던 것이다.

 

거리로 나간 포도청장은 촛불 든 백성들을 모조리 잡아 들였다. 등불을 든 백성은 영문도 모른 채 하옥되었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던 포도청장은 전국에 있는 초씨 성을 가진 놈들까지 다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전하, 포도청장이 촛불을 완전히 진압했다고 알려왔습니다. 더불어 초씨 성을 가진 백성들까지 하옥 시켰다는 보고도 들어왔습니다."

 

다음 날 도승지는 국왕에게 그렇게 아뢰었다.

 

"하핫, 역시 포도청장이야. 백성들은 청장을 파면하라고 하지만 저렇게 일을 잘하는데 왜 파면을 해. 안 그렇소?"

 

도승지가 "철없는 백성들이 뭘 알겠습니까. 전하"하며 맞장구를 쳤다. 촛불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한 국왕. 모처럼 한가한 하루를 보냈다. 그날 저녁엔 장안에서 내로라하는 장사치들과 거간꾼들이 주최한 연회에도 참석했다.

 

"내 이제야 살 것 같소. 다 여러분들이 나서준 덕분이오. 공은 잊지 않겠소."

 

국왕이 그렇게 말하면서 "내 노래 한 곡 하리다" 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지조닌 나로부터 나온다

 

그 노래를 들은 장사치와 거간꾼들이 기립 박수를 쳤다. 가사가 좋다며 눈물을 흘리는 이까지 있었다. 흡족한 국왕은 자리를 함께한 이들에게 술 한 잔씩을 하사하고 관저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뭔가 훨훨 타오르는 게 눈에 띄었다. 중전이 흰 소복을 입고 촛불에 불을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국왕이 멈칫하며 "촛불이 여기까지 따라왔다!"라고 소리쳤다.

 

"전하 왜 그러시옵니까? 저는 중전입니다. 오늘이 대상왕전하의 기일인지라 촛불을 밝혔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사옵니까?"

"중전? 나를 속이려 들지 마라. 촛불소녀는 어서 중전의 탈을 벗어라!"

 

꼭지가 돈 국왕이 게거품을 물며 제사상 위에 놓여 있던 촛불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리곤 "여봐라, 저 년을 당장 하옥시켜라!"라고 소리쳤다. 도승지가 달려와 상황을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다.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중전마마이십니다."

"아니다, 중전으로 변복한 촛불소녀가 틀림없느니라. 도승지는 저 년을 당장 하옥 시키지 못하고 뭐하느냐!" 

 

도승지가 하는 수 없이 중전의 팔을 잡아 채 의금부에다 하옥을 했다. 그러는 도중 바닥에 떨어졌던 초가 슬금슬금 불을 키웠고, 그 불은 뒷산에서 타고 내려온 바람으로 인해 순식간에 궁궐 전체로 번졌다.

 

그 모습을 본 백성들이 궁궐로 모여 들었다. 훨훨 타오르는 불을 보며 백성들이 말했다.

 

"백성들이 들었던 촛불 보다 훨씬 큰 걸. 이제보니 촛불의 배후가 바로 저기에 있었구먼."


태그:#촛불, #불법폭력, #강제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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