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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피해자 유족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피해자 유족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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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가야 하는디, 몸이 말을 통 안 들어서, 마당 밖으로도 잘 못 나가유."

7월 12일. 올해로 4년째 공주 왕촌 한국전쟁 희생자 추모제가 열리던 날. 공주시 반포면 송곡리에 사시는 이재천(78) 할아버지는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씨 할아버지는 2007년 여름 내내 이뤄진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피해 조사 작업 도중에 만난 보도연맹 희생자 유족이었다. 이씨 할아버지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이재덕·이재만 두 형님을 잃었다. 송곡리에는 두 사람을 포함해 모두 여덟 명의 보도연맹원들이 6·26전쟁 발발 사나흘쯤 지난, 6월 말경에 공암 지서로 끌려갔다고 한다.

경찰은 이들을 공암 지서로 끌고 가 배급소에 가뒀다. 거기에 이틀 정도 갇혀 있었고 이재천 할아버지는 형들에게 꼬박 꼬박 점심을 날라다 줬는데 사흘째 되던 날, 형들은 어디론가 끌려갔다.

"왕촌에서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쥬, 형님들이 거기에 묻혀 있을 것이라 여기고 부모님과 함께 찾아 갔는디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아주 끔찍 했슈. 아마 백 미터쯤 됐을 건디 구덩이 3군데에 시신들이 흙으로 살짝 덮혀 있었쥬,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그 위를 밟으면 발이 툭툭 튀어 나오고 '꾸럭꾸럭' 소리가 날정도 정도로 시신들이 띵띵 불어 있었으니께, 거기서 어떻게 형님들을 찾겠슈, 그냥 돌아왔쥬."

이씨 할아버지는 증언 내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농사만 알고 살아온 촌사람이 단지 좌익편에 서서 집회에 참가 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재판도 없이 학살을 당해야 했던 억울한 사정을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숨죽여 살아온 세월이 분통이 터졌던 것이다. 

"그동안 말도 못하고 살아 왔는디, 그래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어디유, 우리 어머니는 형님들이 죽고 나서 2년 내내 속병을 앓다가 돌아 가셨슈. 땅 한 평 가진 게 없다보니 남 땅 빌려 농사짓고 그걸로 도저히 먹고 살기 힘들어 철도청 노역, 계룡산 벌목, 산에서 나무 묶어 내다 팔아가며 고생고생 생활 했쥬, 형수와 조카들까지 거느리고 살았으니 오죽했겠슈."

이씨 할아버지는 그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장손인 유복자 조카를 고등학교까지 보냈다. 분가한 후에도 살림 밑천으로 평생 모은 8마지기 논을 팔아 조카에게 내주었다. 이씨 할아버지에게도 6남매의 자식이 있었으나 맨 위 딸 둘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장손인 조카를 위해 자식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이다.

이씨 할아버지의 딸은 연좌제에 걸려 일본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잃기도 했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형님들의 사진을 죄다 불태워야 할 정도로 늘 불안 속에서 살아왔다.

"가고는 싶지만 몸이 안 움직여 도저히 못 가겠슈."

이씨 할아버지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결국 할아버지를 모시지 못하고 추모행사장으로 향했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피해자 학살 현장인 공주 왕촌에서 추모제가 열렸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피해자 학살 현장인 공주 왕촌에서 추모제가 열렸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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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제 행사
 추모제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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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민주단체협의회'에서 준비한 추모제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들(600명 이상으로 추정)이 묻혀 있는 왕촌 살구쟁이 앞에서 열렸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와  더불어 공주지역 유족들을 비롯해 서울과 여수 부산 등지에서 찾아온 희생자 유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희생자 유족들 중에는 지난해 조사 작업 현장에서 만난 낯익은 얼굴들도 보였다. 먼저 탄천면에서 온 정씨 할아버지가 반겼다. 증언 채록 당시 정씨 할아버지를 마을 앞에서 만났다. 할아버지는 피해 조사자인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갔고 보도연맹원이었던 두 사촌의 억울한 죽음을 증언했었다.

계룡면 금대리 정씨 집안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아왔다. 금대리에서는 모두 9명의 보도연맹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들 중에 조사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정희철(60)씨다.

정씨의 아버지 정필창씨(당시 26세)는 금대리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경천분소로 끌려가 왕촌에서 학살된 것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정희철씨의 큰아버지, 정필봉(3년 전 작고)씨는 술을 마시면 정희철 부부에게 6·25 때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주었다고 한다.

피해자 정필창씨는 힘이 장사였던 농사꾼이었다. 좌익에 가담 했던 사람들과 함께 하루 일을 마치고 나면 저녁 무렵, 동네 느티나무 밑에서 모임을 갖기고 하고 씨름판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금대리 보도연맹원들은 6·25가 터지고 며칠 후 경천분소에서 2~3일간 구금된 상태로 지냈다가 잠시 풀려 났었다고 한다. 2차로 소집될 무렵, 집안 식구들이 도망가라 했지만 정필창씨는 '죄가 없는데 왜 도망가느냐, 내가 도망가면 식구들에게 피해가 돌아간다, 죄가 없어 낼 모레면 돌아올 것이니 걱정마라'며 도망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날 경천분소에 있던 보도 연맹원들과 함께 일렬로 밧줄에 묶여 어디론가 떠났고 그 뒤로 소식이 없었다. 인민군이 들어오고 얼마 후, 금강 청벽 부근에서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식구들이 찾아갔다. 그곳은 왕촌 살구쟁이였다. 시체가 겹겹이 쌓여 있는 그곳에서 5일 내내 시신을 찾았다. 하지만 시체들이 겹겹이 쌓여 있고 부패돼 누가 누군지 분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정필창씨가 왕촌으로 끌려가 학살당할 무렵 그에게는 부인과 5살 난 딸, 3살배기 아들 정희철이 있었다.

"내가 여덟 살 되던 해, 어머니는 끼니조차 연명하기 힘들어 재가했지요. 새 아버지는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분도 가난해서 그때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남의 집 머슴 노릇을 했고 누이는 학교조차 다니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식모살이를 해야만 했었습니다."

계룡면 구왕리에 사는 양승규씨도 추모제를 찾았다. 90세를 넘긴 그의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작은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원이었고 이곳 왕촌에서 학살당했다. 조사 당시 동생의 죽음에 대해 묻자 구순을 넘긴 할아버지는 멀쩡한 귀를 닫아 버리셨다.

증언을 듣기 위해 세 번째로 찾아갔었다, 할아버지는 닫힌 귀를 잠시 열었다. 내게 왕촌에서 언제 제사를 지내냐며 제사 술 마시러 가고 싶다고 슬그머니 마음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7월에요"
"내가 그때까지 살수 있을까?"

피해자 유족 할머니
 피해자 유족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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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동생의 주검 앞에 60년 가까이 참아왔던 술잔을 부어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귀를 닫아버렸다. 아들이 아버지를 추모제에 모시고 오기 위해 옷소매를 끌었지만 소용없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오늘 제사 지낸다고 말씀드렸더니 들은 척도 안 하시더라구요. 아버지는 그 난리 통에 귀머거리 행세로 살아나셨다니께 오죽하겠습니까? 육이오 때 얘기만 나오면 여전히 귀를 닫아 버리십니다."

전남 여수에서 찾아온 박용운(69)씨의 부친은 여순반란 사건에 가담했던 외삼촌 대신 잡혀 들어가 5년형을 받고 공주감옥소에서 2년을 살다가 6·25가 터지자 왕촌에서 학살당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끌려 갈 무렵에 내가 9살이었으니 아버지 보러 60년 만에 처음 찾아온 것이지요. 아버지가 묻혀 계신 흙을 담아가기 위해 비닐봉지 까지 가지고 왔는데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비닐봉투 그냥 가져갑니다."

지난해 부터 수없이 많은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피해자 유족들을 만났다. 유족들이 들려주는 한 맺힌 세월은 지금도 여전히 끝이 보이질 않았다.

추모행사장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잠시 비가 그치는 것 같더니 다시 비가 내리고 다시 햇볕이 드는가 싶었다. 추모제 행사를 마치고 학살지로 나서기 시작하자 유족들의 처진 어깨 위로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시기 사망한 공주사람, 최대 2000여명
2007년 여름 '한국전쟁 당시 공주지역 민간인 피해 조사팀'은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지원 하에서 공주지역 한국전쟁 피해자 조사사업을 실시했다.

공주 지역 조사팀이 면접한 구술자는 246명(후손 및 동네분들)이었고, 이를 통해 확인한 민간인 피해자는 모두 367명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국군이나 인민군으로 징병되었다가 전장에서 희생된 공주청년들, 여기에 기아와 전염병에 의해 희생된 노약자들까지 포함하면 한국전쟁 시기 사망한 공주사람들의 숫자는 최소 1500명에서 최대 2000여 명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개전 초기인 1950년 7월 9일부터 7월 11일 사이에 계룡면 왕촌 작은살구쟁이, 의당 청룡리 여찬니, 유구 석남리 수촌다리와 농기, 장기 송원리 송계동(욕골) 등지에서 진행된 이른바 '보도연맹원 및 공주교도소 좌익수 학살사건'으로 말미암아 최소 250명(왕촌희생자 200명)에서 최대 400명(왕촌 희생자 300명)에 달하는 공주 출신 보도연맹원, 그리고  최소 200명, 최대 300명에 달하는 타지 출신 좌익수들이 희생되었다. 


태그:#한국전쟁 당시 공주지역 민간인 피해자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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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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