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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의 이글거리는 태양이 삼복더위를 재촉하는 것 같습니다. 까까머리 시절 갯벌로 개울로 다니며 멱감던 추억들이 시나브로 떠오릅니다. 밤잠을 설치게 하는 무더위는 신작로 건너 공설운동장에 돗자리를 깔고,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은하수를 바라보다 잠들곤 했던 시절을 그립게 합니다.

 

 

요즘처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는 시원한 피서지 생각이 간절합니다. 깊은 계곡과 바닷가를 꼽을 수 있겠는데요. 아무래도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이 좋겠지요. 어린이들은 대체로 동네 개울이나 바닷가를 좋아하고, 나이가 든 어른들은 조용한 계곡을 찾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주 5일 근무제로 시간에 여유가 생기면서 가족 문화가 더욱 다양화해지고 수준도 한층 높아진 것 같습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할머니 댁이나 외가에 다녀와 고난행군에 참여한다든가 가족별 농촌 체험이나 전통놀이 체험을 떠나는 학생들을 많이 봤거든요.

 

40~50대 이상 되신 분들은 동네 앞 냇가나 농수로에서 멱감고 물장구를 치며 놀던 경험이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저 역시 사춘기를 넘길 때까지 ‘대장’은 알아도 ‘별장’은 모르고 살았고, 온몸에 개흙을 바르고 참외와 수박을 서리하러 다니던 세대입니다. 휴가도 군인들에게나 주어지는 것으로 알았지요.

 

60년대까지만 해도 ‘피서’가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요. 요즘에 인기가 좋은 계곡은 귀신이 나올 것 같아 무서워했고, 해수욕장은 서울에서 잘사는 사람들이나 가는 곳으로 알았습니다. 들녘의 개울과 선창가 갯벌이면 그만이었으니까요.

 

집에서 한 마장 거리에 선창가와 얼음공장이 있었습니다. 갈대숲과 함께 2km 가까이 이어지는 넓은 갯벌은 제2의 운동장이었지요. 수영을 배우던 ‘꺼먹다리’와 수문을 열면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살이 장관이었던 경포교, 장마철이면 물뱀이 떠다니던 공설운동장, 그리고 교회마당도 빼놓을 수 없는 놀이터였습니다.

 

경포교 다리를 건너면 논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농수로는 우리들의 수영 연습장이었습니다. 물이 얕아 수영을 못하는 아이들이 즐겨 찾았지요. 일요일을 ‘굉일’, 토요일을 ‘반굉일’이라고 할 정도로 우리말도 배고프던 시절이라서 수영복은커녕 윗도리조차 입지 못하고 배를 내놓고 다니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검정 고무신 아니면 맨발에 시커멓게 찌든 잠방이차림이었으니 더우면 옷을 입은 채로 물속으로 뛰어들곤 했습니다.

 

농수로에서 배운 수영실력은 갯벌로 놀러 나갈 수 있는 자격증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갯벌에 갈 때는 수영을 할 줄 아는 아이들끼리 갔으니까요. 다들 맨몸에 맨발이었으니 자연히 개흙 마사지가 되었고, 때까치 알을 찾느라 해지는 줄 모르고 갈대숲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강물이 빠져나간 갯벌에서 타는 미끄럼은 스릴 만점이었습니다. 딸과 함께 무주리조트에도 가봤지만 그만한 스릴과 쾌감을 느끼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 타보라고 하면 깨진 유리병 조각이 떠올라 무서워 못할 것 같습니다. 그만큼 자연이 훼손됐고 오염됐다는 증거겠지요.

 

지금은 갯벌을 지구의 허파이자 정화조라며 생태계 보전의 으뜸으로 여기지만 옛날 개구쟁이들에게는 놀이터였을 뿐이었습니다. 놀기에 바쁘다 보니 여름방학을 앞두고 짜놓았던 방학숙제 계획표는 열흘을 넘기지 못했고 일기도 미뤘다가 쓰는 게 다반사였습니다. 숙제보다 오늘은 어디로 놀러 갈 것인가가 더 고민이었으니까요.

 

아이들이 자연에 파묻혀 노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경험이고 살아있는 지식인지 모르는 부모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까운데요. 갯벌에서 뛰어놀다 집에 들어와 먹던 삶은 옥수수와 찐 고구마의 달콤한 맛은 말할 것도 없고, 갯벌 둑 아래 참외밭에서 서리하다 주인에게 들켰던 일들 모두가 산교육이었다고 자신합니다. 사금파리를 다듬어 땅뺏기를 하고, 흙으로 하루에 몇 번씩 집을 짓고 부수고 했던 놀이도 포함되겠네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승철이’의 죽음

 

여름이라고 항상 즐겁고 재미있는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더위와 함께 궂긴 소식도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시내에 사는 아이가 익사했다는 소식은 얼마 가지 않아 잊는데, 가까운 동네 친구의 비보는 두고두고 가슴을 아프게 했거든요.

 

 

욕쟁이 아들이 꺼먹다리에서 놀다 죽었다느니, 개울에서 놀던 두부 집 딸이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소식은 마음을 아프게도 했지만, 무서움에 한동안 물가를 멀리하기도 했는데요. 위로한다며 “죽을 놈은 접시 물에도 코 박고 죽는당게”라며 팔자타령을 하는 아저씨들도 있었습니다.

 

50년 가까이 되어가는 데도, 얼음공장 수조 탱크에서 익사한 승철이(가명)는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승철이 어머니는 시장 입구에서 행상을 했는데 끼니를 거를 정도로 가난했고 형이 저와 같은 또래라서 더욱 잊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무더위가 한풀 꺾이는 어느 날 오후였습니다. 골목 그늘에서 땅뺏기 놀이를 하던 우리는 승철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곧장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승철이 어머니는 소식을 늦게 들었는지 한참 뒤에 달려와 땅을 치며 울부짖었습니다. 

 

“야이 썩을놈아! 그라녀도 폭삭 썩어서 썩을 띠도 없는 가슴인디, 박을 띠가 어디가 있다고 못을 박냐! 이르케 죽을라믄 나한티 와서 배고프다고를 허든가, 아니믄 머라도 먹고 죽었어야 헐 것 아녀 이놈아···.”

 

승철이 어머니가 울부짖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이니 죽으로 연명해오다, 점심을 굶고 죽은 게 한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며칠 지나자 사람들은 혼이라도 건져 저승으로 보내줘야 한다며, 긴 무명베 끝에 닭을 묽어 수조 탱크에 넣고 넋을 건지는 굿을 했습니다. 

 

“승철아! 승철아! 니가 원허는 것 다 들어줄팅게 어서 나오너라. 승철아! 어서 빨리 나와서 좋은 디로 가야지···.”

 

주문을 외는 무당 옆에서 달래듯 사정하듯 애처롭게 절규하던 승철이 어머니의 빼빼 마른 얼굴 모습이 아스라이 떠오르네요.

 

우리는 무서움과 슬픔이 교차하는 표정을 서로 확인하며, 가난에 한 맺힌 어머니가 점심도 먹지 못하고 먼저 떠난 자식을 애처롭게 부르는 광경을 날이 저무는 줄도 모르고 끝까지 지켜봤습니다.

 

바람이 창밖의 은행나무 가로수들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가 ‘귀곡산장’의 효과음처럼 들리는 여름밤에 승철이 넋을 건지던 당시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자기가 용왕의 차사(差使)라도 된 양 반말과 명령조로 주문을 외우던 무당의 형상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네요.

 

승철아! 너와 함께 뛰놀던 추억들이 떠올라 불러보았다. 훗날 만나자···.


태그:#갯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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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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