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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정말 짜증나 죽겠어. 병원으로 보내버렸으면 좋겠어.”

 

마트에 갔다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뒤 자석에 앉은 큰 애가 말을 꺼냈다. 우리 가족이 즐겨보는 kbs 드라마 <엄마는 뿔났다>(김수현 극본, 정을영 연출)에 나오는 한자(김혜자 분)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극중 캐릭터는 한자인데, 환자로 오해하고 있다. 그런데 애들에게는 한자의 캐릭터가 환자처럼 보여서 환자라는 명칭에 조금의 의심도 못하는 것 같다.

 

“맞아, 환자 너무 싫어. 안 나왔으면 좋겠어.”

 

작은 애가 맞장구쳤다. 애들의 대화를 들으며 난 좀 뜻밖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자가 싫다거나 이해할 수 없다거나 거슬린다는 생각을 조금도 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희들 정말 한자 아줌마를 이해 못하는 거니?”

“이상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만날 기운 없고. 만날 기분도 안 좋아 보이고, 환자만 보면 기분이 나빠져.”

 

솔직히 나는 우리집 애들이 이해가 안 됐다. 한자가 처한 상황에서, 그리고 한자의 성격, 오랜 시간 쌓여온 스트레스 등으로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인데 오히려 그걸 이해 못하는 아이들이 나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여겨져 좀 충격이었다. 세대차가 느껴졌다.

 

지금 애들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인물 한자는, <엄마가 뿔났다>라는 드라마에서 세 남매의 엄마이자 팔 순 노인의 며느리, 그리고 퇴직 후 아들이 운영하는 세탁소 일을 거드는 남편을 둔 예순 두 살의 평범한 주부다. 친구처럼 지내는 시누이네 가족도 한 마당을 사용하며 살고 있다.  한마디로 대가족의 중심에 선 인물로 언제나 그녀의 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살아온 우리의 전형적인 어머니이다.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을 때 한자라는 캐릭터는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어머니상으로 보였다. <전원일기>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어머니와 비슷한 인물이다. 가장 전형적인 어머니상으로 보였던 <전원일기>에 나오는 어머니역을 맡았던 김혜자 씨가 또한 이 드라마에서 어머니상의 허울을 벗어던지려는 역할인 한자 역을 맡은 건 꽤 의미 있는 변화라고 생각한다.

      

어머니상의 허울 벗고, 자기 욕망에 충실한 인물로 변신

 

<전원일기>의 어머니는 현재 우리 시대의 바람직한 어머니상으로 여겨지는 모습인데 한자 또한 처음에는 그런 이미지로 비쳐졌다. 대가족에서 가장이 눈에 띄는 일을 하며 한 가장을 꾸려 간다면,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힘든 일을 도맡으며 가정이라는 집단이 굴러가는 데 엔진과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다.

 

이런 어머니의 특징이라면, 받기보다는 주는 데 익숙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모든 것을 가족을 위해 희생하면서도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고 자신이라는 존재는 아예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오직 가족이 원할 때만 존재 의미가 있는 그런 존재로 비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한자는 이 역할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언제나 주는 존재로서의 자신이 처한 상황이 견디기 어려워진 것이다. 가족의 삶에서 자신의 삶으로 관심을 돌렸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런데 한자의 상황이 자신만의 삶을 살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그래서 툭하면 짜증을 내고, 재미없는 표정을 하고 기운 없고 그런 것이다.

 

시집 간 딸들은 평소에는 연락이 없다가 필요할 때만 엄마를 찾는다. 큰 딸은 자신이 맡은 전처의 딸을 봐달라고 갑자기 엄마에게 부탁하고,  아들은 부부가 함께 영화 보러 간다고 모처럼만에 쉬려는 엄마의 기분은 아랑곳 않고 아이를 맡기려 하다가 한자가 싫다고 하자 “무슨 엄마가 이러냐”며 대든다.

 

한자는 이런 상황이 싫다. 존중 받는 느낌은 전혀 없고, 함부로 부려먹어도 되는 사람처럼 여겨지는 자신의 처지가 정말 싫어서 걸핏하면 짜증을 내고, 딸과도 싸우고, 며느리에게도 벌 것 아닌 일에 버럭 화를 내고, 친구처럼 지내는 시누이와도 싸워서 말을 안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남편에게 이혼하자는 말까지 내놓게 된다.

 

그런데 한자의 이런 일종의 반란에 대해서 지금 <엄마가 뿔났다> 게시판은 우리 애들처럼 한자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과 이해한다는 사람들로 갈라져서 의견이 분분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우리 애들과 별로 다르지가 않았다.

 

한자 아줌마 정말 짜증나요

엄마 같은 느낌 전혀 없구요

따뜻한 모성애도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그런데 문제는, 게시판의 대다수가 한자를 이해할 수 없다고 성토하는 데 있다. 자신의 삶을 찾고자 하는 한자의 태도에 짜증난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 같다.

 

 

한자는 전형적인 우리 시대 어머니상이다. 그런데 한자는 그 어머니상이라는 허울을 벗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려는 인물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어머니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변화를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것이다. 언제나 자식을 위해 희생하면서도 희생하는 줄도 모르는, 언제나 헌신만하는 그런 어머니로 영원히 남아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헌신적인 어머니의 삶이란 자기 삶이나 자신의 욕구 같은 건 아예 없고, 오직 자식을 위해서 무조건적으로 헌신해야 하는 그런 어머니이다. 한자는 지금까지 그런 어머니였다. 그래서 한자의 배신이 더욱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모양이다.


태그:#엄마가 뿔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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