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주께 열릴 미국산 쇠고기 국정조사 청문회를 앞두고, 여야간 참여정부 책임론을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이른바 '참여정부 설거지론'이다. 노무현 정부 때 이미 미 쇠고기의 30개월령 미만 규정을 풀었고, 현 정부는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홍정욱 의원이 22일 참여정부 시절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관련 관계부처 장관회의 결과'라는 국무총리실 문건을 공개, '설거지론'의 불씨를 살려갔다. 지난해 11월 17일 열린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계부처 장관들의 회의 결과를 요약한 이 문건에는 미국이 국제수역사무국(OIE) 권고를 시행하면 쇠고기를 월령 제한없이 수입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고 <중앙일보>가 보도했다.
그러나 이 문건이 '참여정부 책임론'의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는 지적이다. 참여정부는 미국과의 협상에서 30개월령 이상 쇠고기의 수입을 금지하는 방침을 끝내 고수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본질은 이명박 대통령의 방미에 맞춰 사실상 백기투항에 가까운 시장 개방을 약속한 이유가 무엇인지, 누가 최종적으로 지시했는지에 있다. 이는 곧 국민 건강권과 검역주권을 대행하는 정부의 신뢰에 연결돼 있는 것이다.
따라서 때늦은 미 쇠고기 설거지론을 두고 공방을 펼치기보다는 국민들에게 먹을거리의 불신과 민심 이반을 불러 일으킨 졸속 부실협상에 대한 과정과 책임소재를 분명히 가려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의 '쇠고기 설거지론' 지피기, 왜?
미 쇠고기를 둘러싼 참여정부 설거지론은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의 입에서 처음 나왔다. 이 대변인은 지난 4월 29일 야당의원이 한미 쇠고기협상 즉각 철회와 사과를 요구한 것을 두고, 이른바 '설거지론'을 폈다.
이 대변인은 "한미 쇠고기 협상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OIE 기준에 맞으면 하겠다고 한 것으로 임기 내 해결을 약속한 사안"이라며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에서 끝내지 못한 일을 설거지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4월 24일 이명박 대통령이 국정과제보고회에서 "한미 쇠고기 협상은 이미 1년 전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측과 합의해 개방을 약속한 사안"이라고 말한 것과 맥락이 닿아있다.
이 대통령은 이어 지난달 6일 불교계 지도자, 7일 기독교계 지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잇따라 "그 때(노무현 정부) 처리했으면, 이런 말썽이 안 났지"라며 참여정부 책임론을 거론해왔다.
한나라당 의원들도 거들었다. 권경석 의원은 "참여정부가 지난해 이미 30개월령 이상 쇠고기 수입을 허용하는 쪽으로 미국과 협상 체결 직전까지 갔었고, 이명박 정부는 이 내용을 마무리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김기현 의원도 지난해 12월 17일 당시 한덕수 국무총리가 주재한 관계기관 장관회의에서 나온 2단계 수입안 자료 등을 내세우며, 참여정부 책임론을 제기했다.
여기에 홍정욱 의원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관련 관계부처 장관회의' 문건을 공개하면서 '설거지론'에 가세했다.
민주당 "노 전 대통령, '월령제한 해제' 거부... 현 정부에서 원칙 허물어"
하지만 참여정부 때 장관을 지냈던 민주당 의원 등은 한나라당 주장을 강하게 반박했다. 관련 부처에서 '30개월령 미만' 규정을 푸는 방안을 검토했을지는 몰라도 노 전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거부했으며 미국쪽과의 협상도 결렬됐다는 것이다.
외교통상부장관 출신인 송민순 의원은 "(참여정부 시절인) 지난해 11월 회의 때 미국이 동물성사료금지 강화 조치를 '시행'한 후 단계적으로 월령을 푸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했지만, 현 정부(이명박 정부)가 지난 4월 협상에서 미국이 이같은 강화조치를 '공포'하면 곧바로 30개월 이상을 수입하기로 한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달 후인 12월 24일 청와대에서 총리, 부총리, 외교통상부장관 등이 참석한 회의가 열렸으며, 이 자리에서 노 전 대통령이 30개월 나이 제한을 푸는 문제에 대해 거부 의사를 분명히 나타냈다는 것이다.
김동철 민주당 쇠고기국정조사특위 간사는 22일 "노 전 대통령이 이 자리에서 '정부 내에서 쇠고기 월령 제한을 효율적으로 검토하는 논의를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절대 안된다. 쇠고기는 30개월 미만의 뼈있는 것까지는 허용할 수 있는데 더 이상 양보해서는 안된다'고 단호하게 지시했다"면서 "이렇게 해서 참여정부의 입장은 정리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고인(故人)이 된 박홍수 전 농림부 장관도 "참여정부는 동물성 사료 금지조치에 대해 완전하게 시행하는 시점에 30개월 이상을 논의하자고 했지만, 미국의 주장은 공포하는 시점에서 바로 수입을 해달라는 것이었다"며 "지난 12월 중순경 노 전 대통령은 참여정부 내에서 미국과 쇠고기 협상은 더 이상 없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현 정부가 당시 미국이 주장했던 바를 다 수용한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 같은 입장은 이미 지난 1월 농림부의 대통령직인수위 보고 때 드러나 있다. 농림부는 인수위에 보고한 자료에서 "우리측은 우선 30개월 미만의 뼈까지 수입을 확대하되, 미국이 동물성사료금지조치를 이행하는 시점에서 월령제한을 해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측은 한미FTA 비준 문제와 연계시키면서, 사료금지조치 '이행' 시점이 아닌 '공포' 시점에 OIE 기준의 완전수용을 요구했다.
당시 농림부는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수입위생조건 개정은 한미FTA와 연계시키지 않고 국민의 식품안전 확보 차원에서 검토한다"라고 밝혔지만 4월 이 대통령의 방미기간 중에 쇠고기 협상은 미국의 요구를 전면 받아들인 채 졸속적으로 타결됐다.
쇠고기 백기투항이 정상회담의 선물인지 여부가 핵심
문제는 참여정부 때 미국과 수차례에 걸친 협상에도 결렬됐던 쇠고기 문제가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왜, 누구에 의해 미국 요구가 전면적으로 수용된 채 타결됐느냐 이다.
야당에선 한미 쇠고기 졸속협상을 '한미정상회담에 바친 조공', '캠프 데이비드 숙박료'라고 주장해왔다.
실제 지난 4월 한미 쇠고기 협상 과정만 보더라도 이같은 의심을 받기엔 충분하다. 4월 9일 총선이 끝나자마자 다음날인 10일 협상이 전격적으로 개시됐다. 작년 10월 이후 6개월동안 미뤄왔던 협상이다.
11일부터 과천 농림수산식품부 청사에서 시작된 협상은 타결 직전인 17일 밤까지도 결렬 분위기가 역력했다. 정부 협상팀은 취재기자들에게 "진척이 없다"면서 결렬 가능성을 수차례 내비치기도 했다. 일각에서 미국 방문중인 이명박 대통령과 부시대통령의 회담 전에 타결될 가능성도 제기했지만, 협상팀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식으로 일관했다.
그러다가 캠프 데이비드에서 첫 회담이 열리기 전날인 18일 새벽 한미 양국은 쇠고기 협상 타결을 전격 선언했다. 내용은 그동안 미국쪽이 요구해 온 내용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는 사실상의 백기투항에 다름없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19일 특별기자회견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계속 거부할 경우 한미FTA가 연내 처리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았다"면서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미FTA를 위해 쇠고기 시장을 개방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한미FTA 비준을 반대해 온 미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고, 미 대선과 맞물려 비준안 연내 처리가 불투명한 상황이라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앞장서 미국에 쇠고기 시장을 전면적으로 내준 것은 협상 전략상으로도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미 의회에서 FTA 비준 논의가 시작될 때에 맞춰, 한미 쇠고기 협상을 진행해 국익을 챙겼어야 했다는 말이 오히려 설득력 있다. 이는 국제협상의 ABC에 속한다.
김진표 전 경제부총리(민주당 의원)는 "쇠고기 시장 개방 카드는 우리가 미국을 상대로 FTA 비준 과정에서 중요하게 쓸 수 있던 카드였다"면서 "국제협상 과정에서 충분히 전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의 방미에 맞춰 무리하게 협상을 타결했다"고 지적했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정부는 이 대통령의 정상회담에 맞춰 시간에 쫓기듯 굴욕적으로 쇠고기협상을 해놓고, 뒤늦게 야당과 함께 책임 떠넘기기식으로 일관하고 있다"면서 "국민 건강권을 사실상 팽개친 부실협상 과정을 누가, 어떻게, 최종적으로 지시했는지를 분명히 가려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은 이 같은 문제의 본질은 외면한 채 계속해서 설득력 없는 '참여정부 설거지론'에 매달리고 있다. 국정조사 청문회도 이런 전략으로 임할 생각임이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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