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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발전은 재생가능에너지를 통해 생태적 전환을 추구하는 유한회사다
▲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 시민발전은 재생가능에너지를 통해 생태적 전환을 추구하는 유한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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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유가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유가 급등으로 오늘도 뉴욕 주식시장은 폭락하고 있습니다."

현지 특파원이 전하는 급박한 목소리의 뉴스가 오늘 아침에도 내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한다. 이놈의 기름값은 언제까지나 계속 오르기만 할 것인지…. 배럴당 150달러를 넘어 200달러까지 오를 수도 있다는 뉴스는 막막함을 넘어서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게 한다.

요즘 기름값에 대해 이렇게 민감한 내가 부끄럽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불과 작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기름값이 오른다고 해도 그저 무덤덤했다.  오르기도 했다가 내리기도 하겠지 하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작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기름값이 서서히 오르고, 국제 곡물가가 올라가면서 그 여파가 내 생활에 직접 피부에 와 닿기 시작했다. 사료값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소를 키우는 나로서는 당장에 사료비를 마련하는 데 허덕이게 됐다. 거기에다 각종 운송비가 오르고 또 내 승용차에 넣는 기름값이 계속 올라가니 기름값 상승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런 뉴스가 연일 나오니 날마다 죽을 맛이다.

고유가 시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친구

사실 나는 오늘과 같은 이런 사태를 누구보다도 더 일찍 파악하고 이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할 수 있는 조건에 놓여 있었다. 그 이유는 오래 전부터 이 같은 상황이 도래할 것을 예언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친구와 늘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30년지기인 내 친구 박승옥은 그동안 나를 볼 때마다 "세계는 석유정점에 거의 도달했다. 석유정점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석유문명체제에 완전히 포위된 한국경제는 IMF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의 쓰나미로 그 기초부터 붕괴되고 말 것이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1990년대 초 구소련으로부터 석유공급이 끊기고 난 뒤 북한을 생각하면 이해가 갈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한테는 서구 백인들의 석유문명으로부터 자립과 자치의 경제, 재생가능 에너지와 재생가능 농업으로의 전환 이외의 다른 길이 없다면서 수없이 열변을 토하고는 했다. 굳이 글이나 강연을 통해서가 아니라도 술자리나 함께 여행을 할 때나 늘 만날 때마다 이야기 주제가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말을 듣고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귓등으로 흘려보내기 일쑤였고 기껏 생각한 것이 설마 우리 세대에서 그런 일이야 일어나겠어? 또는 그렇게 인류의 재앙을 불러온다 하더라도 세계적인 과학자나 뜻있는 연구기관에서 잘 알아서 하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이렇게 무감각하고 아둔한 생각을 하는 것을 알고 그는 더욱 더 현실감 있는 비유로 설득하려 들었다. 즉 우리를 지금 침몰하기 직전의 타이타닉호에 비유하기도 하고, 무너지기 5분전의 삼풍백화점에 비유하기도 하면서 자본주의 체제의 우리 안에서 자본주의와 석유문명에 갇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길들여져 있다고 위협(?)했다.

그런데 달콤한 소비에 길들여져 인류 미래나 지구환경 변화에 무신경하면서 늘 편리함과 안락함만을 쫓던 나에게 '불편한 진실'을 말해 주던 그의 말이 이제야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유가가 이렇게 미친 듯이 오르고, 식량위기가 코앞에 닥치고, 지구온난화로 인해 사방에서 사고가 터지는 지금에서야 늘 가까이 있는 친구의 말이 귀에 들어오니 나는 참 아둔하기 짝이 없는 족속인가 보다.

2007년 4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오르는 중 햇볕 집열판에 관심을 갖는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
 2007년 4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오르는 중 햇볕 집열판에 관심을 갖는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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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오르는 중 소수력 발전소를 관심있게 둘러보는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
 2007년 4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오르는 중 소수력 발전소를 관심있게 둘러보는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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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을 내겠다고? 그는 목숨을 걸었다

내가 박승옥 친구를 처음 알게 된 것이 아마 1980년 겨울쯤 일 것이다. 80년대에 청·장년기를 보낸 의식있는 사람들은 그 시대를 떠 올리면 참으로 암울하고, 무엇에 짓눌려 답답하고 춥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바로 그 암울한 색깔의 혹한의 추위 속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던 것 같다.

당시 나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잡혀가 10여 일간 군인들로부터 두들겨 맞아가면서 조사받고 나온 뒤였다. 광주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신군부는 70년대 민주노조를 폭력적으로 해산시키기 위해 노동운동가들을 군·경합동수사본부에 연행해 조사를 하고 이어 민주노조 파괴를 시작했다. 그 첫번째 대상이 당시 내가 간부로 있던 청계피복노조였다.

나는 신군부의 민주노조 파괴 책동에 어떻게라도 저항을 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신동수 선배의 안내로 당시 우리 사무실과 가까운 곳 충신동의 '형성사'라는 출판사를 찾아갔는데, 여기에서 박승옥을 처음 만난 것이다. 박승옥은 나와 같은 1953년생이었다. 거기에다 그 엄혹한 군부독재시절 뜻을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쉽게 친구가 되었고 동지가 되었다.

그 당시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당한 상태에서 형성사 편집부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박승옥의 도움을 받아 청계피복노조 강제해산에 대한 투쟁을 감행하고 난 뒤 곧바로 수배상태가 됐다.

그리고 1981년 8월경이었을 것이다. 당시 학생운동, 청년운동, 재야운동 등으로 전국에 지명수배 된 몇몇 사람들이 인천 구월동에서 아파트를 얻어 모여 살았는데, 그곳에서 다시 박승옥을 다시 만나게 됐다. 그 때 그 집에서 사는 사람 중 유일하게 수배중이 아닌 사람이 박승옥 친구였는데 '돌베개'출판사 편집장이었다.

나와 박승옥이라는 친구가 만날 수밖에 없었던 인연의 끈을 맺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전태일'이었다. 나는 1974년 전태일의 일기를 보고 그의 뜻을 따라 평화시장에 가서 노동운동을 시작했고, 박승옥은 서울대학교에서 학생운동을 시작했을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 현존하지 않는 전태일은 무수한 인연을 맺게 해 주고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 되어질 것이다.

1982년 겨울쯤에 박승옥 친구는 한 가지 큰일을 도모할 결심을 하고 그것을 나한테 이야기 한다. 그 엄청난 일은 바로 <전태일 평전>을 출판하겠다는 것이다. 그때의 사회 분위기는 80년 광주학살의 피도 채 마르지 않은 전두환 군부독재의 철권통치시절 아닌가? 이런 분위기에서 감히 <전태일 평전>을 공식출판 하겠다니….

돌베개출판사 편집장였던 박승옥의 의지는 매우 강했다. 출판사 편집장만 의지가 강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사장인 임승남씨도 전태일 평전을 공식 출판하는 것이야말로 시대적 사명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전태일 평전을 공식 출판을 한다면 자신들이 징역을 가고 또 그로 인해 출판사가 문을 닫는다 해도 그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으니 기꺼이 이 일을 하고야 말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로서는 그들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이 일이 성사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동안 나 혼자 간직하고 있던 비밀, 즉 내가 가지고 있는 저자가 육필로 쓴 전태일 평전 원고의 사본에 대해 말을 하였다. 그리고 저자가 누구인지 묻지도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말라고 다짐을 받고 난 뒤, 그 복사본 원고를 돌베개출판사에 넘겨주었다.

<전태일 평전> 그 후, 한국사회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때 돌베개출판사는 국내에서는 출판이 불가능해 일본에서 먼저 출판된 전태일 평전을 입수해서 그것을 가지고 출판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밖에도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며 마침내 1983년 돌베개출판사에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평전>이 출판됐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전태일 평전>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판매금지 서적이 됐고, 소지하는 것조차 불온시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태일에 관한 글을 비공식적인 인쇄물에 의존해 읽었던 대중에게 공식 출판된 <전태일 평전>은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80년대 이후 학생운동,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물론 개개인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태일평전 초판은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발행되었다.
▲ 전태일평전 전태일평전 초판은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발행되었다.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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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으로 접어들면서 전두환 군부독재도 '유화책'이라는 제스처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국면에 다다르게 됐다. 이러한 국면을 맞이해 수배중인 우리들도 서서히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조직을 새로 만들고 투쟁의 전열을 새로 다듬기 시작했다.

박승옥도 1985년부터 서울노동운동 정책실장을 맡아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1987년에는 전태일기념사업회 부설 구로노동상담소를 열었고, 1990년에는 전태일노동자료실을 열어 노동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전두환군부독재의 유화정책은 오래 가지 못했다. 또다시 1985년 하반기부터 노동운동 조직을 파괴시키고, 노동 운동가들을 연행 구속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와 박승옥 친구가 헤어지게 된 것도 1985년 9월에 내가 구속되면서부터다. 그러다가 1987년 7월에 내가 석방되면서 우리는 조우했다.

도시를 떠나 생태근본주의자가 되어 나타나다

박승옥은 그동안 꾸준하게 노동운동, 출판운동을 하다가 1992년 어느 날 농사를 지으러 간다고 하더니 식솔을 데리고 양평으로 홀연히 떠나 버렸다. 그러더니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서울에서 먼 시골로 가더니 결국 경북 김천까지 가게 됐다.

그리고 거의 10년 만에 서울에 다시 돌아온 그는 생태근본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물론 홀연히 서울을 떠나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자 할 때부터 생태적 삶을 살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더 나아가 생태, 환경, 에너지 문제에 대한 이론적 체계를 갖추고 실천 대안을 세상에 외치고 있었다.

그는 2005년 6월부터 재생가능에너지 시민기업인 '시민발전' 대표를 맡아 농업 및 에너지의 자립·자치와 우리 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학생운동부터 시작해 노동운동 그리고 현재의 생태·에너지전환운동을 해오기까지 그의 사상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것은 사랑과 평화라는 전태일 사상이다. 

박승옥 저 녹색평론
▲ 잔치가 끝나면 무엇을 먹고 살까 박승옥 저 녹색평론
ⓒ 녹색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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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삶이 무엇인지,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지를 전태일의 거울로 바라보고 실천한다. 박승옥은 전태일의 거울로 노동운동의 방향을 가늠하고,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운동을 비판한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고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한 사람들한테는 불편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는 누가 자신을 불편해 하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거울로 세상을 살아가고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그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가난뱅이다. 자신의 소유인 집도, 땅도 없을 뿐 아니라 자동차, 심지어는 핸드폰도 없는 '불편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거침이 없어 자유롭고 당당하다. 오늘도 그는 경제성장 중독증과 미친 소비 행렬의 잔치가 끝나기 전에, 인류 미래를 위해 '혁명'보다 더 어려운 생태적 전환을 모색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뛰고 있다.    


태그:#박승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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