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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안전부가 건국 60년, 광복 63주년 행사를 널리 알리고 있는 인터넷 홈페이지.
▲ 대한민국 건국60년? 행정안전부가 건국 60년, 광복 63주년 행사를 널리 알리고 있는 인터넷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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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절이라는 국경일이 생긴다는 소식, 들었어?"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휴일 하루가 더 생길지도 모른다며 들떠 있었습니다. 기념일이든, 국경일이든, 심지어 명절까지도 오로지 '쉬는 날'로 여기는 그들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반가운 선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문 기사의 앞뒤를 꼼꼼히 읽어보지 않고 수박 겉만 핥은 것이니 결국 순간의 설렘만 준 허무한 해프닝으로 끝났습니다. 지정해 봐야 방학 중인데다, 그렇잖아도 쉬는 날인 광복절에서 이름만 바꾼다는 것이니 아이들은 하나 같이 '낚였다'는 반응뿐입니다.

"그나저나, 그럼 광복절은 어떻게 되는 거지?"
"……"

사실 '8월 15일'이라고 하면, 음력에 익숙한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은 한가위를 먼저 떠올리지만, 누구 하나 예외 없이 '광복절'이라고 답합니다. 선조들의 피땀 어린 독립운동으로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그날을 우리 현대사 최고의 순간으로 꼽는 집단의 역사적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족적인 3·1운동과 그 결과 탄생한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는 우리나라는 식민지의 굴레를 벗어났다는 것 자체가 국호(國號)와 국체(國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곧 친일 매국노를 제외하면, 광복이야말로 식민지 시절 모든 사람들의 한결 같은 가장 간절한 바람이었습니다.

건국절에 대한 아이들 의견 들어봤더니...

광복은 되었으되 해방 공간에서 미소 냉전과 극심한 좌우 갈등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면서 엄청난 혼란에 빠져들고 맙니다. 해방의 기쁨은 온데 간데 없이 미국과 소련의 지원에 기댄 남과 북의 정치세력은 각각 별도의 정부의 수립하고 참혹한 전쟁을 벌이며 분단을 고착화시키고 맙니다. 정통성을 운운하기 부끄럽게도 광복이 분단으로 이어지고 만 셈입니다.

분단은 남과 북, 모두의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당면 모순이며, 그러하기에 정통성은 남과 북 모두의 '아킬레스건'입니다. 이는 곧 남과 북이 공유하고 있는 '조국 광복' 또는 '민족 해방'이라는 인식을 발판 삼아 통일에 한 걸음씩 다가서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광복절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건국절로 대체하겠다는 것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에 찬물을 끼얹는 일임과 동시에 남과 북이 공유하는 역사인식의 끈을 끊는 일이 될 것입니다. 거칠게 말해서, 통일로 가는 도도한 물길에 정부가 앞장서 둑을 쌓는 꼴입니다.

최근 정부와 교육청으로부터 쏟아지는 공문에 따라, 각종 영상물과 자료들을 활용해서 독도 관련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쓴다지만, 그 어떤 내용에도 아이들은 다짜고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기 십상입니다.

다만 아이들이 구한말 제국주의의 침략과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가 불거졌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됐고, 친일파 등 일제 잔재의 청산이 얼마나 중요한 역사적 당위인가를 느끼게 됐다는 점은 뿌듯한 수확입니다. 이참에 '독도의 날'을 제정해 '제2의 광복절'로 선포하자는 결의에 찬 주장도 나왔습니다.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일본의 억지가 뻔뻔스럽게도 반복되는 것은 기실 우리나라가 제대로 된 '광복'을 맞지 못했다는 걸 보여줍니다. 백발이 성성한 '광복회' 회원들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연일 항의 집회를 주도하고, 코흘리개 아이들마저 영토 주권을 외치며 '제2의 광복절'을 만들자는 마당에, 정작 우리 정부는 '광복'이라는 이름을 애써 지워내려 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22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한민국건국60년기념사업위원회' 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지난 5월 22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한민국건국60년기념사업위원회' 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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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광복 60주년 행사'는 치러졌나 싶을 정도로 기억조차 가물가물한데, '건국 60주년 행사'는 정부의 큰 관심 속에 준비위원회까지 꾸려져 엑스포나 올림픽이라도 열리는 것처럼 대대적으로 치러질 모양입니다. TV와 신문에서 '건국 60주년' 홍보물을 본 아이들은 이미 정부의 '속내'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광우병 쇠고기를 덜컥 수입해놓고는 온 국민더러 쇠고기 감시 암행어사가 되라고 등 떠밀더니, 가슴 아픈 과거는 깨끗이 지워버리고 '선진' 대한민국만 생각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

"대통령이 공부한 역사 교과서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따위는 없고, 오로지 대한민국만 실린 모양이야.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이라며 '하늘이 열린 날'로 제정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대놓고 부정하는 꼴이잖아."

"그러고 보니, 선생님, 개천절을 건국절 삼으면 안 되나요?"

역사인식에까지 계속되고 있는 정부의 '헛발질'

교육, 외교, 경제, 언론 부문에 이어 역사인식에까지 정부의 '헛발질'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니 독도라고 무사하겠느냐'며 이미 철부지 중학생들에게까지 조롱을 당하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래도 건국절인가 뭔가 때문에, 별 관심도 없었던 '광복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공부할 수 있었으니 대통령께 감사의 편지라도 보내야하는 것 아니야?"
"그러게 말이야. 말이 난 김에 단체로 감사의 메일을 보내볼까?"

건국절 소동에 '낚인' 아이들이 던진, 정부를 향한 '찬사'입니다.

신뢰를 잃은 지 이미 오래인 탓에, 아이들은 이젠 정부가 내놓는 정책마다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속내를 파헤치려듭니다. 지금껏 보기 어려웠던 장면으로, 정부와 정책에 대한 불신이 그 어떤 수업보다 '교육적'인 효과를 이끌어내고 있는 셈입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아이들이 지금은 '정부'를 조롱하지만, 자칫 그들이 발 딛고 살아가는 '대한민국'을 업수이 여기게 되면 어쩌나 싶습니다. 정부의 연이은 헛발질이 두려운 까닭입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태그:#건국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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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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