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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료 뿌리는 모습(난 배낭처럼 통을 메고 다니며 비료를 뿌렸다. 사진은 마을 어르신)
 비료 뿌리는 모습(난 배낭처럼 통을 메고 다니며 비료를 뿌렸다. 사진은 마을 어르신)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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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중순경이 되면 논에 비료를 주어야 한다. 비료는 토지를 기름지게 하고 벼 발육을 촉진시키는 영양제다. 장마철이라서 아버지는 비료 주는 날짜를 잡느라 고민이 많았던 눈치다. 비가 심하게 내리면 비료가 뿌리에 채 흡수되기 전에 빗물에 씻겨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얘 아배야 아무래도 월요일 날 비료 뿌려야 겠다. 비와도 그냥 허(하)자! 더 늦으면 농사 망치것다."

얘기인 즉, 비료는 뿌리는 시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7월에 뿌리는 비료는 이삭비료다. 이삭비료는 어린 이삭 길이가 1~1.5mm 정도 자랐을 때(이삭 패기 전 25일경) 뿌려야 벼가 여물어 진다.

올 초 결심한 바에 따라 무조건 "예"하고 대답했다. 올 초, 농사일을 성심 성의껏 거들기로 아버지와 약속했다. 또, 아버지가 부르면 하늘이 두 쪽 나는 일이 있어도 달려가기로 결심한 터다. 대답하고 나니 '대략난감'이다. 하필, 무지 바쁜 날 비료를 준다고 하시는지!

21일 월요일 아침,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혼자 밥해먹고 있는 아버지 밑반찬 만들어 준다며 아내가 부랴부랴 따라 나섰다. 허리 병이 도져서 어머니가 경기도 일산 누님 댁에서 치료를 받고 계신 탓에 아버지는 늘그막에 잠시 홀아비 신세다.

"아빠 빵빵 타고 갈 거야? 할아버지 보러 가는 거야? 염소 밥 줘야지."

네살배기 호연이 녀석은 때 아닌 나들이에 들떠있다. 빵빵 타고 할아버지 댁 간다고 하니 마냥 좋아하는 눈치다. 한참을 재잘 거리다가 차멀미가 나는지 금세 잠이 든다. 차 멀미 하는 것도 내 어릴 적과 똑같다. 

마음이 급했다. 아내와 동행 하느라 약속시간이 이미 많이 지나있었다. 새벽 같이 내려오라는 당부를 받았던 터다. 성격 급한 아버지는 이미 논에서 일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고향집 마당에 있어야할 경운기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논에 끌고 나간 것이다.

비료는 이삭 패기 25일 전에 뿌려야 한다

영문도 모른 채 할아버지댁에 간다면 마냥 좋은 네살 호연이
 영문도 모른 채 할아버지댁에 간다면 마냥 좋은 네살 호연이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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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구루 잘 뿌려야 헌(한)다. 벼 들 된데(벼가 덜 자란 곳)는 많이 뿌리고 더 된데(벼가 많이 자란 곳)는 즉(적)게 뿌리고."
"네 알았어요. 이제 올라가 계세요."

비료 통은 건네 줬지만 아버지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논둑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계신다. 긴장되는 순간이다. 불같은 성격상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분명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그럴 때 보면 팔순 노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빨리 비료 통 메고 나와! 얼른 나와! 그렇게 주면 농사 망쳐."

채 다섯 걸음도 떼기 전에 불호령이 떨어졌다. 비료 뿌리는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당연한 결과다. '무늬만 농촌출신'이 비료 뿌리는 모양새가 팔십년 '농사고수' 눈에 흡족할  리 없었다.

'아버지 처음부터 어떻게 잘 할 수 있어요. 기회를 주세요'라고 마음속으로만 '항변' 한 후 조용히 비료통을 내려놓았다. 아버지 불호령이 떨어질 때는 말대꾸 하지 않고 조용히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사십년 눈칫밥으로 익히 아는 터다.

팔십년 공력 농사꾼 손놀림은 고수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섬세했다. 적지도 많지도 않게 골고루 뿌려진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비료 통이 너무 무거워 보인다는 것이다. 늙은 육신이 짊어지고 논바닥을 누비기에는.

중심이 잡히지 않는지 아버지는 간혹 비틀 거렸다. 그럴 때 마다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싸' 하고 파도가 일렁였다.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비료 통 짊어지고 비틀거리는 팔순 노인 바라보고 있는 것은 고역이었다.

"아버지 이제 비료 통 주세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버지 비료 주는 것 유심히 봐 두었어요."
"너는 못 혀(해) 쉬운 것 같아도  아무렇게나 하는 거 아녀(냐)."

이번에는 고집을 부렸다. 아버지는 마지못한 듯 비료 통을 건네줬다. 아버지 손놀림을 유심히 봐둔 덕인지 다행히 다섯 걸음이 넘어도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섯 걸음도 떼지 못했는데 '불호령' 난 역시 '무늬만 농촌출신'

비료
 비료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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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자. 집에 가서 점심 먹고 좀 쉬었다가 올라가."
"아버지 아직 두 뱀이 더 남았잖아요."
"어제 뿌렸다. 마침 비가 오지 않길래."

이 얘기를 들으니 마음속에서 또 다시 '싸'하고 파도가 친다. 짊어지고 가만히 서 있기도 버거워 보이는 무거운 비료 통을 등에 지고 팔순 노인이 두 뱀이(약 660m². 2000평) 나 비료를 뿌린 것이다.

이날 내가 비료를 뿌린 면적은 겨우 약 330m²(1000평) 정도다. 일도 하지 않고 공연히 호들갑만 떤 꼴이다.

"기정이 한테 비료 주라고 했더니 무릎아파서 못 한다고 하더라. 아마 이 늙은이 저 늙은이 다 부탁 할까봐 못 해주는 개벼(가 보다) 동네에 죄다 늙은이들뿐이니."

늘 바빠 보이는 막내아들 부르기 싫어서 아버지는 '젊은 피' 기정이 형에게 비료 뿌려줄 것을 부탁했었다. 하지만 거절당했던 것. 기정이 형도 사실 '젊은 피'는 아니다. 쉰이 훌쩍 넘은 장년이다. 농촌을 지키고 있는 분들 연세가 워낙 높다 보니 '젊은 피'로 통하는 것이다.

농촌도 물가가 올라 아우성이다. 특히, 비료 값이 올해 가파르게 상승했다. 화학 비료를 받아 농가에 공급하는 농협이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반영해 달라는 업체 요구를 받아 들여 1월과 6월에 각각 24%, 64% 인상됐다. 

아버지는 매년 '올해만'이라는 소리를 되풀이 하신다. 올해만 짓고 내년부터는 짓지 않겠다는 말이다. 혼잣말처럼 한 아버지 푸념이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이제 그만 해야 할까보다.  몸도 아프고 지어봐야 남는 것도 없고, 비료 값이나 나올 런지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안양뉴스 유포터 뉴스



태그:#비료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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