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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는 사회학 전공자다. 전투력은 개판이지만 어쨌든 사회학 시간강사다. 개뿔도 모르지만 온갖 사회학적 시각을 세상에 던져보는 무모한 아마추어임을 밝힌다.

사회학개론 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개인을 구속하는 무의식적인 권력(power)을 이해하는 것이다. 암묵적인 담론이 은근히 개인의 행동을 제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학에서 개인은 두번째 문제이다. 무언의 조종력을 발휘하는 사회라는 범주에 속해있는 집단이 첫번째다. 물론 개인에 대해 일차 관심을 가지는 학문이 바로 심리학이다.

분만실의 사회학, 제왕절개 유도하는 전문가들

 한 산부인과 병원 간판
한 산부인과 병원 간판 ⓒ 조호진
'의료사회학'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출산에 관한 담론을 분석했다. 제왕절개가 엄청 유행했을 때는 무슨 논리가 산모들의 마음과 공명했는지를, 또한 자연분만이 서서히 그 위용을 자랑할 때는 어떠한 감성이 여러가지 외부 위협을 차단했는지 등을 설명하는 것이다. 

전자나 후자나 병원이라는 제도, 혹은 의사라는 권력자가 암묵적 동조를 은근히 강조하고 있다는 전제는 동일하다. 쉽게 말해 '병원이 제왕절개를 유도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래야 돈이 되기 때문이다.

사회학적 접근은 이런 것이다.

"전문가들이 은근히 무엇을 말한다. 사람들은 그 '은근히'가 바로 전문가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이를 구체적으로 이해한다. 바로 이 전문가들이 권력이다. 대중들은 그렇게 커다란 폭풍 앞에선 언제나 잠잠하다."

대개 이런 논리다.

난 그렇게 산부인과를 이해했다. 그래서 아내가 10개월간 받았던 '산부인과 진찰'을 지극히 의학적인 확인을 하는 것에만 의미를 두었다. 즉 혹시나 부정적인 분위기로 아내에게 제왕절개 수술을 권유할 수도 있다는 지독한 불신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간단히 상황을 정리했다.

"넌 무조건 자연분만이야. 하지 않는 사람이 멍청한 거야."

"무조건 자연분만" 외치던 사회학자 예비아빠

그리고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병원을 다녔다. 마지막 진찰을 다녀오고 아내가 말했다. "자연분만의 의지가 정말로 있다면 내일 유도분만을 해야 합니다, 예정일까지 기다린다면 머리가 이미 기준 초과(?)이기 때문에 그 때는 수술확률이 90%에 이릅니다"라고 의사가 말했다고.

사실 머리 크기에 대한 진단은 20주차 정도부터 있었다. 머리가 2~3주 정도 더 빨리 자란단다. 하지만 나는 "내가 짱구라서 그렇다"면서 그것의 원인만 분석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거 나중에 제왕절개 빌미를 만들려는 수작이구나'라는 의심도 간혹했다. 학문적 긴장을 계속 한다는 증거로서 말이다.

어쨌든 의사의 최후통첩은 충분히 협상가능한 내용이었다. 자연분만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병원을 갔다. 난생 처음 '분만실 환자'의 보호자가 되었다. 아내의 유도분만은 그렇게 시작했다.

그 때까지 난 그냥 때가 되면 '진통'이 오고 몇번 참다가 아기를 낳는 줄 알았다. 나의 엄마가, 형수가, 여러 친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분명 아내도 그렇게 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자연분만의 고통이 두려워 수술을 택하는 바보는 결코 아니라고 굳게 믿었다.

분만실은 '분만'하는 곳이 있고 그것을 대기하는 장소가 있다. 대기실은 커튼으로 막혀있지만  그 간격이 협소하기 때문에 고통의 소리, 일상의 소리, 간호사의 잡담소리까지 다 들린다.

아내는 유도분만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본격적인 분만 과정에 착수했다. 담당의사가 왔다. "남편 되시죠? 부인이 자연분만을 강력히 원하고 있으니 이렇게 시작은 합니다만…" 약간 말끝을 흐렸다.

분만실에 갔더니, 그 많던 논리는 다 사라지고...

 영화 <산부인과>의 한 장면.
영화 <산부인과>의 한 장면. ⓒ
아내가 내 눈치를 많이 보긴 본 모양이다.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 때까지 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의지가 없었다. 난 만화책을 보기 시작했고 아내는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게임에 집중했다.

우리 왼쪽 침대는 우리보다 12시간 전에 온 사람이다. 양수가 터져서 오게 됐다는데 진통은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산모는 진통의 주기에 맞추어 보호자와 잡담을 하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산모 A)

우리 오른쪽 침대는 우리보다 20분 늦게 온 사람이다. 마침 그 날이 예정일이었다. 실증주의 시각에서 볼때 지극히 정상적인 산모이다. 4~5시간 정도면 분만할 것으로 예측된단다. (산모 B)

그 건너의 산모는 유도분만이다. 우리와 같은 사례다. 그런데 이미 하루 전부터 촉진제 를 투여하고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진통은 시작되었다. (산모 C)

맞은편 산모는 1시간 정도 남은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고함이 대단했다. 간호사는 마지막 의지가 중요하다며 산모를 훈육했고 산모는 그럴수록 더욱 소리를 질렀다. 이 고함소리가 참 대단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걱정'을 했다. 저게 저렇게 아픈 것인가? (산모 D)

2시간이 지났다. 산모 D가 분만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고통의 소리는 흉내낼 수도 없을 지경이다. 다른 산모들 모두 그 소리에 기가 죽어 침묵한다. 그렇게 때가 되었고 분만실에 들어갔다. 대기소와 분만실 거리는 10m가 넘는다.

그런데 산모 D는 분만실 전체를 지배했다. 그때 내가 들은 욕은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물론 상황이 급박한지라 미학적인 욕을 뱉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분명 욕이었다. 남이 들으면 '저러다 큰일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내는 "아, 어떡하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보통 때 같으면 "왜? 저것도 못 참으면서 엄마되려고 했어?"라면서 딴죽을 걸었을 나도 그 때는 아주 숙연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세상의 엄마들이 다들 이러한 고통을 체험하는구나. 그렇게 생애 처음 '산모우호적' 생각을  했다.

순식간에 침대 3개의 주인이 사라졌다!

  한 산부인과 병동의 신생아실
한 산부인과 병동의 신생아실 ⓒ 우먼타임스
그 때쯤 산모 A와 B가 동시에 출격을 했다. 먼저 산모 A. 95%의 진행이다. 즉 대기실에서 체험할 고통의 최상 순간까지 온 것이다. 그 소리가 커튼 양 옆에서 들리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공포의 상황이 2시간째 계속되었다.

산모 A의 담당의사가 왔다. "지금 아기의 머리가 보이는 상태에서 2시간째다. 더 이상은 위험하다, 태변을 아이가 먹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럴 경우 폐가 위험하다"는 소견을 밝혔다.

그 상황에서도 산모 A는 기도를 한다. 그런데 기도가 아니라 주술이다. "자연분만을 해야해, 해야해!" 의사는 보호자에게 다시 경고를 한다. "더 이상 지켜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빨리 결정을 하길 바란다." 그리고 10분 후 산모A는 수술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보호자는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 고생 하지 않고 수술하는 건데…."

산모 B는 이미 실신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리만 듣고 있으니 신음소리가 멈추면 이것은 아마도 실신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고통의 소리는 대단했다. 담당의사가 왔다. "지금 상황은 의학적으로 자연분만을 해서는 안 되는 상황입니다. 더 이상 고집하시면 산모가 위험합니다." 그렇게 산모는 이미 기진맥진해진 몸을 이끌고 수술대에 올랐다.

순식간에 침대 3개의 주인이 사라졌다. 폭풍이 지나간 느낌이다. 아내는 이미 얼었다. 진통의 고통이 생각보다 몇배는 더 심하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알게 되니 아내에게도 드디어 진통이 오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군대에서 '사기가 떨어진 병사'와 마찬가지다. 아내에게 이 고통을 이겨낼 의지'는 이미 상실되었다.

산모 C는 계속 고통스러워 한다. 간호사는 "아마도 내일쯤은 가능하지 않을까요"라는 무서운 소리를 한다. 아직 2~3시간이 남았다고 해도 안쓰러울 지경인데 말이다.

유도분만을 시도한 지 24시간이 지났다. 아내에게 의료진들이 찾는 횟수가 잦아졌다. 그리고 다 한 마디씩 한다. 그런데 그 때부터 그 말들이 내 귀에 속속 꽂히기 시작한다.

"골반이 너무 작아."
"아기 머리가 너무 커."
"아기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아."
"아기 머리 위치가 좋지 않아."
"이거 무통분만을 하지 않고서 가능할까?"

(유도분만의 경우 진통을 고의적으로 확인하면서 환자 스스로 압력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자연분만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서 무통분만을 하지 않는 것이 대세라고 한다. 무통분만은 산모에게 진통의 고통을 덜어주는 간단한 마취제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의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쏙쏙

대개 이런 것이다. 그 전에는 별 관심도 없었는데 몇 시간 전의 전쟁을 직접 체험하고 나니 전문가의 단어 하나 하나가 아주 직접적으로 날 자극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물었다. "너 골반이 작아?" "우리 아기 머리가 커?" 그리고 아내는 아주 짜증스럽게 답한다. "다 이야기했잖아. 그걸 몰랐어? 그래도 자연분만 하라고 했잖아!" 휴! 이거 아주 몹쓸 강요를 내가 한 것 같다.

다시 12시간이 흘렀다. 아내의 진통은 심해졌다. 그런데 진통이 심해지면 모든 분만의 과정도 진행이 되어야 하는데 유도분만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았다. 담당의사가 왔다. 나에게 다시 확인하였다.

"아내의 골반이 평균보다 아주 작습니다. 자연분만의 의지가 있으니 강행은 하겠지만 그만큼 장시간의 고통은 감수하셔야 합니다."

얼른 의사에게 반문했다. 나는 무슨 말을 했을까?

지금까지 공부한 학문에서는 "웃기지 마라! 그렇게 해서 결국은 수술하고자 하는 것 아닌가? 너희 의사들! 환자들이 무식하다고 너희들의 권력을 그렇게 남용해서는 안된다!"라고 대답하는것이 그래도 체면유지는 하는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 나에게 '사회학'은 없었다.

나는 물었다. "선생님…, 그러니까 의학적으로 지금 자연분만 확률이 어느 정도인가요?" 의사는 말했다. "5% 정도됩니다. 부인은 아주 예전에 골반 문제 때문에 수술의 필요성을 말씀드렸는데 무조건 자연분만을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지금 아이의 머리는 크고 골반은 작은 상황입니다. 제 동생이라면 무조건 수술하라고 할 겁니다."

동생, 동생, 동생, 동생, 동생…

과연 이 말은 '상품을 팔기 위한 어휘'일까? 아니면 정말 진솔한 마음의 소리일까? 이러한 고민을 아주 짧게 했다. 하지만 내가 의사를 의심할 냉정함은 이미 사라졌다. 나는 내 불안한 심리를 의지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아내의 진통은 격해졌다. 확인차 다른 간호사의 진료 때 다시 물었다. 간호사는 "제가 볼 때는 확률적으로 너무 희박한 골반입니다"라는 답변만을 반복했다.

아내가 분만실에 온 지가 40시간이 지났고 진통이 온 지가 30시간 가량 되었다. 그리고 온전히 분만실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직 멀었다"라는 답변만이 온다. 우리 부부는 수술을 결정했다. 1시간 후 우리의 첫 딸이 태어났다. 아내는 3시간이나 회복실에 있었고 5박6일간의 의무적 입원이 시작되었다.

무엇이 정답일까?

의사는 수술 후 "정말 수술 잘하셨습니다. 골반이 위험할 정도로 좁았고 아기 머리도 방향이 좋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만족했다. 그런데 이것은 수술결과에 대한 만족이 아니다. 아마도 이것은 수술결정에 대한 만족이었을 것이다. 내가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자꾸 누군가에게 확인받고 싶었다. 적어도 우리 부부 만큼은 단순히 무서워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다. 그리고 그 확인이 '전문가'의 것이면 더 없이 좋겠다.

우리와 같은 조건의 산모 C 역시 수술을 받았다. 내 결정의 정당성을 확인받고 싶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회복실의 아내 걱정보다 "이것 보라고, 우린 분명히 수술받을 이유가 있었기에 받은 거라고!"라는 위안을 개인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냉정(?)을 찾았다. 곰곰히 생각을 해보면 의사+간호사, 즉 병원이라는 곳이 우리 부부에게 접근한 과정이 책에서 본 내용 그대로였다. 서서히 불안을 조장하고 그리고 그 불안이 표출될 때 환자의 의심 체계를 확실하게 전문가의 권위로 해석해 주는 그 시스템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는 완벽하게 속은것 같다. 하지만 난 자연분만이라는 무리수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생생하게 체험했다. 그 상황에서 교과서적 사고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이거 뭐가 정답인가?

그런데 분명한 것은 내가 교과서에만 충실한 나머지 아내의 심리적 감흥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것이다. 아내에게는 내가 '암묵적 권력'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찌 되었든 간접체험자에 불과한 내가 이렇게 무서운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는 것이 매우 부끄러웠다.

자연분만이 좋기야 하지, 그렇지만 정답은 뭘까

자연분만이 좋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안다. 그런데 우리 옆 산모들의 끈질긴 자연분만 욕구를 생각하면 이건 자연분만이라는 모종의 권력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그러니까 자연분만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분만을 하지 못하면 '철없는 엄마'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는 심리적 공황이 그렇게 무모한 인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연분만에 성공한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그러니까 그 때부터 조금만 노력하면 가능하다!"는 말만 한다. 내가 본 상황을 너무나 쉽게 '참을성 부족'이라는 인간의 능력탓으로 정리해 버린다.

난 잘 모르겠다. 인간의 심리를 병원에서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도 같지만 불안한 분만실에서 나의 심리적 패닉을 의탁할 전문가가 있다는 것이 정말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자연분만을 하지 못한 것을 "편한 것을 추구하네", "너희들 돈 많네", "산모가 운동을 안 했네" 등으로 너무나 손쉽게 규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경험한 40시간의 분만실에는 훨씬 '다양한' 변수들이 있었다. 그것이 의학적이든 심리적이든 말이다. 또 이것이 사회학적으로 다 '거짓'이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도 아무도 그런 거 생각 안 한다. 최소한 난 그랬다.

아 하나 더! 어쨌든 세상의 모든 엄마들! 정말 대단하다. 비록 간접적으로 경험한 분만실 40시간이었지만 남자들이 흔히 핏대 세우는 '26개월'(내 경우)의 '군 생활'은 실로 장난이었다.

덧붙이는 글 | http://blog.daum.net/och7896 개인 블로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분만실#자연분만#제왕절개#사회학#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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