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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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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발표된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의장 성명에서 금강산 피살사건과 10·4 선언이 언급됐다가 25일 갑자기 빠진 경위에 대한 정부 해명이 달라져 논란이 일고 있다.

25일에는 마치 한국 정부가 주도해서 의장 성명에서 2가지 사항을 삭제한 것처럼 설명하더니 "국제 망신만 당했다"는 비난이 쏟아지자 27일에는 "의장 성명에 잘못된 표현이 담긴 것에 대해 이의 제기를 했을 뿐"이라는 식으로 말을 바꿨다.

정부 해명이 오락가락하면서 어느 것이 진실인지도 판단하기도 힘들 뿐 아니라, 설명 내용도 크게 바뀌어 정부 해명에 대한 불신감만 증폭되는 양상이다.

이용준 차관보, 외교부의 억울한 누명?

ARF회담에 유명환 외교장관을 수행해 유일하게 배석했던 이용준 외교부 차관보는 27일 오후 기자들과 만나서 이번 사태의 경위를 설명했다. 그는 이날 밤에는 다시 몇몇 언론인들에게 따로 이메일을 보내 비슷한 취지의 설명을 하면서 "외교부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지기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이 차관보는 "외교부는 ARF에서 금강산 사건과 관련해 대결적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북한을 비난하지 않았다"며 "단지 우리가 북한에게 진상조사단 접수를 촉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회원국들에게 지역정세의 일환으로 설명하고 남북대화를 통해 해결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피력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금강산 문제를 의장 성명에 포함시키고자 북한과 대결적인 로비를 벌이지도 않았다"며 "이 문제는 로 키(낮은 목소리)로 거론하고 의장 성명 포함 여부는 상황을 봐가면서 현지에서 무리없이 추진하기로 했다"고 소개했다.

또한 그는 "처음부터 10·4 성명 조항을 포함시키기 위해 강력한 로비를 펼쳤고 나중에 금강산 조항을 삭제하려 맹공을 펼쳤던 북한과 비교한다면, 우리 대표단은 최대한 상식적인 범주에서 상식적인 활동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싱가포르가 24일 밤 의장 성명을 발표하면서 상황이 급박해졌다는 것이다.

의장 성명에는 금강산 피살 사건과 함께 "장관들은 회담에서 작년 10월 남북정상회담과 그 결과물인 10·4선언을 주목했다, 10·4선언에 기초한 남북대화의 지속적인 발전에 강한 지지를 표명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 차관보는 25일 점심 때 싱가포르 외교차관을 만나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외교부는 10·4 성명과 관련된 조항 전체를 삭제해 달라는 요청은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장관들이 10·4 성명에 기초한 남북대화 발전을 강력히 촉구했다'는 표현은 북한을 포함한 어느 나라도 단 한번도 얘기한 적이 없는 가공적인 표현이었다"며 "이 부분을 의장성명에 포함시킨 것이 부당하므로 이를 사실과 부합되도록 삭제해 줄 것을 정중히 요청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외교부는 이같은 이의 제기가 100% 수용될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싱가포르는 "그럼 남북한과 관련된 두 부분을 모두 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북한도 금강산 피살 사건이 의장 성명에 들어간 것에 강력히 반발하는 등 남북한 양쪽에게 시달린 싱가포르 정부가 2가지 모두를 빼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에 외교부는 ▲이미 금강산 사건은 5~6개 나라가 발언을 했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원하는 충분한 효과를 봤고 ▲'10·4 선언에 기초한 남북대화'란 문구는 앞으로 몇년간 두고두고 북한이 인용할 만하다고 판단해 싱가포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이 차관보는 설명했다.

국제공조로 압박하겠다더니 조용히 다뤄?

그러나 이같은 설명은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우선 ARF에서 금강산 피살 사건을 남북 대결적으로 다루지 않으려고 했다는 부분이다.

김호년 통일부 대변인은 지난 15일 북한이 남한 정부 조사단 방북을 거부하자 대응책 차원에서 "국제공조 문제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17일부터는 언론에 'ARF에서 금강산 피살 사건 거론해 대북 압박' 식의 보도가 쏟아졌고 외교부도 간접적으로 시인하면서 기정 사실이 됐다.

이와 동시에 진보 진영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남북 문제의 국제 쟁점화는 역효과가 크다는 반대 의견이 쏟아지면서 이미 국내에서 뜨거운 논쟁 거리가 됐다. 국내에서 이미 불을 질러놓고 ARF에서 금강산 피살 사건을 조용하게 다루기로 했다는 설명은 이해하기 어렵다.

정부와 여당이 "북한이 10·4 선언을 ARF 의장 성명에 넣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고 이 때문에 사단이 났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도 전형적인 '남 탓' 공세에 불과하다. ARF에서 국제 공조로 북한을 압박하겠다고 공언한 마당에, 평양 당국이 가만히 앉아 있을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강력한 외교전이 예상됐음에도 되레 외교부는 10·4 선언이 의장 성명에 포함될지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들어가자 당황했던 정황이 보인다.

의장 성명이 수정되게 된 경위에 대한 설명도 다르다. 한 마디로 25일 오후에는 마치 한국이 주도해서 의장 성명에서 금강산과 10·4를 삭제한 것처럼 설명하더니, 파문이 커지자 27일에는 일부 잘못된 표현의 정정을 요청했을 뿐이라는 식으로 말을 바꿨다.

지난 25일 오후 늦게 외교부 고위 당국자가 황급하게 기자실로 뛰어들어왔다. 그는 '환한' 얼굴로 ARF 의장 성명에서 금강산 피살 사건과 10·4 선언이 빠졌다고 설명했다. 이용준 차관보가 25일 낮 싱가포르 외교차관을 만나 강력하게 항의를 하는 등 "우리가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당국자의 설명을 그대로 믿는 기자들은 없었다. 기자들은 24일 밤 ARF 성명에 금강산 피살 사건과 10·4 선언이 동시에 들어간 것은 한국이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인 격'으로 보고 있었다. 금강산 피살은 일개 사건일 수 있지만 10·4 선언은 이명박 정부 대북 정책의 원칙 자체를 문제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지적에 당황한 외교부가 무리하게 10·4 선언 삭제를 시도했고, 이 와중에 애초 큰소리 쳤던 금강산 피살 사건이 빠져버려 국제적 망신을 자초했다는 분위기였다.

근본 원인은 냉전시대식 대북 정책

이와 함께 "금강산 피살 사건 삭제를 감수하면서까지 10·4 선언을 빼야 할 만큼의 상황이었나? 이 때문에 남북 관계는 더욱 파탄나게 생겼다"는 비난도 쏟아졌다.

그러자 27일 정부·여당이 나서서 ▲우리가 주도해서 뺀 것은 아니고 일부 표현에 문제가 있어 정정을 요청했다 ▲10·4 선언을 전면 부정하지도 않았고 10·4 선언 조항을 삭제하기 위해 금강산 관련 조항을 희생시킨 일도 없다 ▲북한은 10·4 선언을 의장성명에 넣기 위해 애초부터 총력전을 펼쳤고, 따라서 금강산 피살 사건을 넣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정당했다 ▲만약 10·4 선언 정정을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북한의 로비로 금강산 피살 사건만 빠질 수도 있었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비난이 쏟아지는 방향에 따라 해명 내용과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만약 의장 성명에 금강산 피살 사건만 들어갔다면 한국 외교의 승리라고 자화자찬했을 것이다.

결국 이번 사태의 근본원인은 냉전 시대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에 있다.

남북한 당국간 대화가 끊겨 답답한 면은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최대한 우리끼리 노력해서 풀 생각은 안하고 국제 외교전으로 끌고가 북한과 멱살잡이식 외교를 하려고 했던 데서 이번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태그:#A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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