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③] 오역의 의도성 여부지금껏 거론되지 않았으나 최근 고재열 기자의 '독설닷컴'의 '정지민씨에게 보내는 공개질의' 기사로 인해 수면 위로 등장했기에 이번 기회에 짚어보고자 합니다.
<PD수첩>이 인정하고 사과했던 '오역'은 모두 네 군데입니다. 그런데 정지민씨 말대로 공교롭게도 이 오역들은 모두 아레사 빈슨의 사인을 단정적으로 몰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지요. 그 때문에 <PD수첩>은 '의도성'을 의심받고 있습니다. 내레이션이나 다른 인터뷰들은 모두 '-한다면', '의심'. '-일 수도' 였는데, 그 사이사이 '-걸렸던' 등의 오역을 넣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단정적으로 느낄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의도성'이 있었나 없었나를 가리기 위한 과정은 간단합니다. 초벌 번역과 감수 과정, 그리고 방송에 나간 최종 자막을 비교하면 되지요. 그러나 <PD수첩> PD들은 이 과정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바로 '번역자들과의 신뢰' 때문입니다. PD들은 다른 프로그램에까지 영향을 미쳐 제작진과 번역자 사이의 '신의'가 깨지게 될까 우려하고 있는 것이지요.
번역자들은 많지 않은 번역료와 빡빡한 일정, 안정되지 않은 편집실 공간에도 언제나 최선을 다해 번역을 해왔습니다. 그 과정엔 설령 실수로 한두 군데 오역을 했다 해도 제작과정 어딘가에서 걸러질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신의 실수 하나가 프로그램의 진위 여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면, 누가 그 부담을 안고 번역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제작진은 그 '믿음'을 위해 '감수'라는 안전장치를 두고 있습니다. 물론 감수 과정에서 오류가 걸러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수를 잘못했다며 나중에 감수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제작과정에 개입되는 모든 스태프들의 크고 작은 사고와 실수는 모두 PD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PD수첩> PD들은, 공개적으로 한 번도 번역자들의 초벌번역 문제를 거론한 적이 없습니다. 번역 오류는 <PD수첩> 제작진의 의도하지 않았던 실수였다고 해명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 기자가 '의도성' 여부를 가리기 위해선 번역 원본과 감수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정지민씨가 번역·감수자라는 사실을 생각해냈을 것입니다.
그에 따른 사실관계 확인 차원에서 기자의 질문에 PD가 한 답변은 결코 그 책임을 당신을 포함한 번역자들에게 돌리고자 했던 것은 아닙니다. 또한 번역자들의 번역 실력을 '폄하'하고자 했던 것도 아닙니다. 저 역시 진심으로 이 문제가 누군가의 '책임'이 아니라, '사실관계 확인' 차원으로만 다뤄졌으면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번역·감수자였던 정지민씨의 아래와 같은 '답변'의 진위 여부는 중요한 문제가 되겠지요.
"'PD수첩' 방영분의 모든 오역에 대해 하나하나 내가 하지 않았다고 굳이 말할 필요가 뭐가 있었나? 당연지사니까 하나하나 말을 안 한 것이지. 초벌번역이라고 표현하는 파일들을 봐도 그렇게 내가 번역한 부분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번역/감수한 대로 자막내용을 만들었다면 오역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 실제로 내가 잘못 번역한 것은 전혀 없으며, 또한 책임질 것도 없으니까, 내게 책임을 씌울까봐 걱정했던 부분은 전혀 없다."(정지민씨 카페 글)그래서 저는 다른 번역자들의 깊은 양해를 구하며, <PD수첩>이 인정했던 번역 오류 중 한 개의 원본 내용을 공개할까 합니다. 영상자료 테이프 12번에 있는 내용입니다.
"기자/@ 로빈 빈슨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른다. 의사들은 아레사가 변형성 크로이츠펠트-야콥 질병 또는 vCJD에 걸렸다고 한다. 이 병은 뇌 질환으로, 스펀지처럼 될 때까지 구멍을 뚫리게 하는 것이다. 광우병의 인간감염 형태이다. CDC에 따르면 이 병으로 세계전역에서 1996년부터 200명 이상이 죽었다고 한다."(번역 원본)문제의 'suspect' 부분입니다. '걸렸을지도 모른다'가 '걸렸다'로 자막 표기돼 오역논란이 생겼고, PD수첩이 번역오류를 인정했던 부분이지요. 이 자료 테이프 12번을 누가 번역했는지 어쩌면 정지민씨도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정지민씨의 번역 실력을 모릅니다. 다른 번역자들보다 번역료를 더 받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잘 모릅니다. 이 문제에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연 PD들이 초벌, 감수된 자막을 의도적으로 단정적으로 고쳤는지 여부를 가리기 위해 중요한 건 역시 '팩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한 사람의 번역자였던 정지민씨에게도 깊은 양해를 구합니다.
검찰 수사-원본 제출?"방송제작에 대한 이해 따위 없이 내가 본 취재자료 내용만 알아도, 편집이 의도적으로 중요한 사실들을 누락/왜곡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피디수첩은 자료를 제출하지 않고는 왜곡을 해명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갖고 있는 일부 자료 그리고 취재자료에 대한 기억만을 갖고도 아래 주장들을 펼칠 수 있다. 만일 취재자료에 대한 내 기억이 사실과 다르다면, 피디수첩은 필히 방송이 아닌 취재자료로 반증해야 할 것이다. 지금 취재자료를 내놓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는 기억에 의존해서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인데, 내 기억이 사실과 다르다면 취재자료를 제출해서 반증해야 할 것이다."(정지민씨의 카페 글)나는 당신의 이런 주장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아마 다른 신문·방송 종사자들이 봤더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기억'에 의존해 말하는 정지민씨의 발언을 반증하기 위해 왜 <PD수첩>이 검찰에 원본자료를 제출해야 하는 걸까요. 자신의 발언 진위만 밝히면 될 뿐, 한국 언론 전체가 막대한 대가를 치러도 좋다고 말하는 걸까요 혹은 <PD수첩>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동료 언론인들과 동종 언론사들에게 장차 족쇄가 될 것임에 분명한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걸까요?
정지민씨가 검찰에 넘긴 취재 원본이 어느 정도인지 저는 모릅니다. 또한, 다른 어떤 번역자가 당신에게 혹은 검찰에 원본 파일을 넘겼는지도 모릅니다. 검찰은 원본을 90% 이상 '복구'하였다며 조만간 '중간수사 발표'를 한다고 하더군요.
검찰에 원본을 제출한 것은 당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한 일이기에 <PD수첩>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려면 조용히 할 일이지 다른 번역자들까지 거론하며 떠들 일은 아니지 않을까 싶군요.
<PD수첩> '광우병' 편엔 당신 이외에도 많은 번역자분들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영어 번역자만 모두 13분이었지요. 그 분들에게 PD들은 면목없어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다른 번역자 분들의 명예가 훼손되거나 상처 입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지민씨 역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결론] 당신은 '퍼즐의 전체 그림'을 모릅니다나는 이 긴 글을 읽고 정지민씨가 단 한 번이라도 고개를 끄덕일 거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무리 진실을 얘기해도 당신은 수긍하기 힘들겠지요. 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당신의 글에서 짐작합니다.
"개인적으로 미국 쇠고기가 위험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따라서 쇠고기의 위험성 때문에 졸속협상이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한 번에 전면적인 개방을 할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다. 현재 외국에서는 대부분의 시각이 이렇다. 황당한 괴담을 낳고 균형성, 객관성, 진실성을 결여한 프로그램 때문에, 비록 추가협상을 하기는 했지만, 한동안 한국이 비이성적인 이미지를 벗어나기는 힘들리라는 것."(정지민씨 카페 글) 굳이 '외국' 어딘가의 시각을 덧붙이지 않아도 당신이 정부에 추가협상을 요구하는 촛불시위를 어떻게 봤을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합니다. 당신이 왜 그토록 피디수첩에 적의를 갖고 있는지도 알 것 같습니다.
<PD수첩>은 '미국산 쇠고기는 위험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협상 결과에 따른 수입위생조건으로 들어오는 미국산 쇠고기는 100% 안전하지 않다"였습니다. <PD수첩>은 이런 관점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당신과 같은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매우 불편해하겠지요.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당신은 줄곧 '취재 분량의 상당부분'을 봤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영어 번역본 900여 분 중 275분을 나 혼자 번역"한 것으로 당신의 중요한 역할을 강조하신 것도 알고 있습니다. 감수를 위한 몇 시간을 포함해 총 3일간 MBC에 왔지만, 그조차도 당신은 하루 종일이 아니라 '짧은 시간' 안에 했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275분과 '짧은 시간'. 이것이 정지민씨가 이 프로그램에 함께 한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봤다'고 주장하는 미국 취재 원본들이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퍼즐 조각 몇 개로 전체 그림을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요.
'광우병' 편 전체 테이프는 국내외, 영상자료까지 합해 모두 150여 권, 당신이 번역했던 6장의 문서 외에 한글 영어 문서 자료들은 수천 장이 넘습니다. 중요한 건 '분량'이 아니라, 그 퍼즐 조각들이 모여 그리는 '전체 그림'입니다. 한 프로그램에 대한 관점이란 '퍼즐 그림'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미국 촬영본 중 무엇을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무엇을 방송에 쓸 건지를 알려주는 기준은 사전취재를 비롯한 모든 취재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정지민씨는 자신이 번역한 테이프에서 본, 미 언론에 출연한 농무부 관리가 '위험이 미미하다'라고 한 말이 '누락'됐다며 왜곡의 근거로 삼았지요. 농무부가 제대로 하지도 않고 이제 와 안심시키려고만 한다는 앵커나 기자의 말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두 명의 시민 인터뷰 중 '쇠고기가 안전하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이 누락됐다며 문제 삼았습니다. 그 시민의 발언이 질문에 따라 각각 다른 취지의 대답을 한다는 점은 언급하지 않았지요. 어찌하여 당신은 '위험성이 미미하다', '안전하다'는 말만 기억하며 그것을 문제 삼았을까요.
작가인 나는 미 농무부 관리와 미 축산업계 간엔 일종의 커넥션이 있다는 인터뷰를 봤습니다. 2005년 입법 예고된 강화된 사료금지 조치가 아직도 실행되지 않고 있는 이유가 축산업계가 벌이는 로비의 결과라는 의혹도 들었습니다. 협상 타결 후 미 축산업계가 미 정부에 대놓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홈피 게시문을 봤습니다.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오직 '한국 소비자의 관점에서 앞으로 수입하게 될 미국 쇠고기의 안전성'을 따져보고자 했던 <PD수첩>의 시각으로 본다면, 미 농무부 관리의 말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정지민씨 덕분에 미국 취재 원본을 90% 가량 '복구'했다는 검찰이 과연 어떤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할지 개인적으로 나는 매우 궁금합니다. 설사 검찰 아닌 정부가, 여당이, 전체 원본을 100% 다 복구한다면 또 어떨까요. 그들이 그 원본으로 프로그램을 다시 만든다면 <PD수첩>과 다른 어떤 모양이 될지, 상상이 되십니까.
2008년 7월
최근 유독 쇠고기 관련한 소식들이 자주 들리더군요. 특히 일본 총리의 발언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너희도 20개월 풀어라"라는 의미의 부시 대통령의 말에 일본 총리가 거부 의사 표시를 했다고 합니다. "식품의 안전, 안심을 지킨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과학적인 식견에 근거해 판단해가겠다" 라면서 말이지요.
4월 방송 당시 봤던 '취재원본'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인터뷰를 했던 우리 협상 대표는 "우리가 먼저 했을 뿐 일본과 중국도 곧 그렇게 협상 할 겁니다"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반면 일본의 관리는 한국의 협상결과에 대해 "미국에 대한 어떤 자료를 근거로 그렇게 협상했는지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준대로 협상할 것이다." 이 내용은 당시 방송에서 '누락'됐습니다.
<PD수첩>은 미국에서 축산업계와도 인터뷰를 했었습니다. 협상 결과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한국은 세계의 과학적인 표준을 따르는 리더십을 가진 나라로 칭찬받아 마땅하며, 완전히 시장을 열어준 것에 감사한다"고 하더군요. 이 내용 역시 방송에는 '누락'됐습니다.
혹시, 새로 들어오는 쇠고기 얘기는 들으셨습니까? 미국 정부로부터 허가받은 수출작업장 중엔 최근 병원성 대장균 O-157이 검출돼 2400톤을 리콜한 업체도 포함돼 있답니다. '1급 리콜'이었다지요. 미국 정부로부터 '분쇄육 공정 자체가 O-157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한다'고 지적받았던 곳이라고 하더군요.
이번 협상 결과에 따라 앞으로 분쇄육도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돼 있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들어와 O-157이 검출되더라도 당장 해당 작업장의 수출 선적을 중단시킬 수도 없답니다. 미국 정부에 통보한 뒤 협의하거나 개선 조치를 요구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하더군요.
제작 당시 협상결과를 앞에 놓고, 작가이기 이전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믿을 수 없어 했던 '검역주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본 방송에선 길게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광우병' 편 제작에 참여했던 작가로서 개인적인 소회를 밝혀도 좋다면, 나는 그때 방송을 끝내놓고 절망스러웠습니다. 장차 몇 가지 '번역 오류'로 프로그램 전체가 왜곡으로 몰리는 사태가 닥칠 줄은 예상하지 못한 채로, 이미 충분히 절망스러웠습니다.
담아야 할 내용은 너무 많은데 프로그램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고, 처음 편집을 했던 두 시간 분량에서 이것도 저것도 빼야 했던 심정은 마치 살점이 뜯기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다른 작가가 했다면 더 나았을까, 방송에 다 담지 못한 내용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국민들이 촛불을 든 건, 아레사 빈슨이 인간광우병 의심환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한 달 전 부검결과가 발표된 미국 여성의 MRI 결과가 무엇이었든 국민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들이 바라는 건, 앞으로 자식들과 함께 먹을 미국 쇠고기가 안전했으면 하는 것뿐입니다. PD수첩이란 일개 프로그램이 완전무결하지 않았음을 입증한다고 해서, 곧 들어오게 될 미국산 쇠고기가 100% 안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PD수첩>이 또 얼마나 갈기갈기 찢길지 알 수 없습니다. 작가인 저조차 몰랐던 또 다른 흠집이 어디선가 발견될까 마음을 졸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무엇이 괴담이 되고 과장이 되고 왜곡의 근거로 떠오를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지민씨, 그것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이제 그만, 거짓의 상상을 멈추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