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해석>(마크 에드문슨 지음/송정은 옮김/추수밭 펴냄)은 미국인 저자가 2007년에 미국에서 출간한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광기의 해석>은 저자가 속한 국가를 휩쓰는 대중의 광기를 보면서 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에서의 일련의 보수정치 캠페인의 광기가 저자를 자극하고, 프로이트와 히틀러라는 각각 이론과 실천의 분야에서 대중심리의 원조격인 인물들을 새로이 불러냈다.
대중은 비민주주의적이며 가부장적인 통치자에게조차도 지배받기를 원하며, 복종하기를 갈망한다. 대중은 강력한 권력자를 열망한다.
그런 대중심리는 이 책의 배경인 1930년대 후반에 히틀러를 등장시켰고, 저자의 시대에서는 전쟁을 가져온 지도자를 연임시키기조차 한다. 대중은 강력한 권위를 갈망하고, 그런 가부장적인 리더십에서 심리적인 보상을 얻는 것 처럼 보인다.
"집단의 구성원들에게는 자신이 지도자들에게 똑같은 사랑을 받는다는 환상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도자 자신은 누구의 사랑도 필요하지 않다. 어쩌면 그는 자연의 오만한 소산물로 절재적인 나르시시즘과 자신감, 독립심에 빠진 존재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이 나르시시즘을 확인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68쪽)"
대중은 순수한 존재다. 대중은 지도자가 자신을 보살펴 준다는 환상에 사로잡히기 십상이고, 그런 대중은 여론조작의 대상으로 쉽게 전락한다. 1930년대 말의 독일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어났다. 대중들은 자신의 민족과 국가를 파멸로 이끈 히틀러를 지지했으며 선거를 통해서 집권시켰다.
프로이트와 히틀러는 대조되는 면이 많다. 게르만 순수주의를 내세우는 히틀러에 비해 프로이트는 유태인이고, 나이대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난다. 가치관에 있어서도 프로이트가 자유주의적이라면(그는 말년에 히틀러의 탄압을 피해서 자유의 나라 미국으로 망명을 한다), 히틀러는 독재형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
단 하나 공통되는 것은 그들 둘다 가부장적인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부장적인 측면도 실천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많이 다르다. 프로이트가 평생에 걸쳐서 '가부장적 권위'를 연구하고 해부했다면, 히틀러는 '가부장제'를 정치이념화하여 인류사에 크나큰 오점을 남긴다.
지금 우리 사회도 이 책의 공간인 1938, 39 년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사회의 민주적인 가치가 도전을 받고, 그것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동조하는 대중들이 상당하다. 우리사회의 미래가 또다른 히틀러를 등장시키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아니 이미 등장시켰는지도 모른다.
우리사회의 신독재화 경향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제기되고 있다. 우리사회에서 그간 벌어졌던 여러 사건들을 감안하면 우리사회에 대중적 에너지는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분출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에너지가 지난 여러 선거에서처럼 도착적으로 왜곡되지 말아야 한다. 대중을 조작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부터 해체되어야 하고, 대중의 에너지는 건강하고, 그리고 민주적으로 발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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