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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19일 새벽 여수에서 시작된 여순사건은 대략 1만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이중 대부분의 민간인 희생자는 재판 절차 없이 총살당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계엄령 속에 여수, 순천 등 전남 동부 지역을 포위한 대한민국 국군의 잔인한 진압과 학살은 여기저기서 생채기를 내며 60년이 넘는 오늘까지도 그 억울함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

 

지난 29일 순천 매곡동 학살사건의 집단매장지에 대한 발굴이 시작되었다. 전국에서 매화가 가장 먼저 핀다는 순천시 난봉산 자락 저우실(매곡동의 옛이름)에 바로 그 참화의 흔적이 60년의 세월을 숨기며 남아 있다.

 

1948년 10월 22일 순천시가지 탈환 작전이 시작되면서 14연대 반군치하에서 살아남았던 당시 순천군민들은 모두 반역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학살과 갖은 고문을 당해야 했다. 당시 순천에서 진압군에 의해 발생한 비무장 민간인 집단학살지는 생목동 수박등 공동묘지, 조곡동 둑실마을, 구랑실과 반송쟁이 그리고 이번 발굴지인 매곡동까지 대부분 알려진 곳이다.

 

입으로만 전해지던 순천 매곡동 학살사건은 지난 99년 이덕주 목사가 <기독교 사상>12월호 <한국기독교 문화유적을 찾아서(11)-남도의 한과 믿음> 편에 기고하면서 '순천판 노근리 학살사건'으로 보도되었으나, 세간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 후 2004년 당시 실제로 시신수습을 지휘한 엘머 보이어(Elmer T. Boyer/한국명-보이열) 선교사의 회고록 <한국 오지에 내 삶을 불태우며>(개혁주의신행협회 발간/68쪽)에 소개되어 그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보이열 선교사(1893~1976)는 1921년 세계선교위원회에서 파송한 1세대 선교사로 순천에서 요양소를 건립해 1천여 명의 한센병 환자와 고아들을 돌보고, 매산성경학교를 열어 성경공부와 복음을 전파하며 50여명의 목사를 배출했다.

 

또 제주도에서 의료봉사를 펼쳤던 보계선 선교사에 이어 디모데 보이어 선교사(대전외국인학교 과학교사)까지 3대에 걸쳐 한국과 인연을 맺고 있다.

 

그 후 2003년 창립한 <여순사건 화해와 평화를 위한 순천시민연대(대표 위계룡)>(이하 순천시민연대)에서 순천시내권 피해자 조사를 하는 과정 중에 국내 선교유적지 보존과 호남지역 농어촌선교활동을 하는 등대선교회의 박형규 선교사(버마 파송)와 그의 부친인 박기일 옹, 박종하 장로, 생존자인 황종권 목사(전 순창중앙복음교회 목사), 유족인 우채규씨 등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에 이른다.

 

1948년 10월 22일 오후 4시경 난봉산 자락에서 전투모에 하얀 띠를 두른 채 시내로 진격한 국군15연대 진압군인들이 매산등마을로 들이닥쳤다. 갑작스런 군인들의 출현에 문을 열고 내다보던 주민, 총소리에 겁이나 방안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주민, 저녁식사를 준비하던 주민 등 어린 아이까지 30여명을 끌어내 매산중학교 교정에 집합시킨 후, 몸수색을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무릎을 꿇고 걷도록 명령했다. 성서신학원(매산여고 밑) 입구에서 매산중 방향으로 내려가는 10m지점에서 땅바닥에 엎드리라는 명령 후 ‘총살’이라는 구령과 함께 등 뒤에서 무차별 사격이 시작되었다. 여기저기 신음소리와 비명이 나자, 다시 확인사살을 한 후 사라졌다. 그때가 저녁 7시경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황종권 목사는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살아남았지만, 함께 끌려간 부모, 큰형수와 작은형 등 가족 4명과, 집에서 하숙하던 고흥출신 방광수라는 3대 독자 외아들 학생도 그 자리에서 희생되었다. 다행히 어린 조카가 살아있어 품에 안고 다리를 절며 당나무 아래 계단으로 내려오자, 아래쪽에서 군인들이 다시 올라왔다.

 

하지만, 군인들의 길 안내를 하던 순천중앙교회 김창섭 집사의 아들의 변호로 살아남게 되었고 다음날 중앙병원으로 옮겨져 한 달간 치료를 받고 살아남았으나, 총을 맞아 많은 피를 흘렸던 조카 1명은 결국 죽고 말았다.

 

그 이튿날 학살의 현장은 피바다였다. 냄새가 진동해 쑥을 피워놓을 정도였다. 보이열 선교사를 비롯한 박기일, 중앙병원 직원인 일본 이노에(장의사), 이재만(매산고 기능직)씨 등이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보이열 선교사는 홑이불로 깃발을 만들어 앞장서고, 이노에씨가 시신을 염해 현재의 장소에 매장한 것이다. 학살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봉기군 1구의 시신까지 수습해 가마니로 묶은 다음, 중앙병원 의사였던 정인대씨가 가져온 페니실린병에 희생자의 이름을 써 넣어 묻었다.

 

당시 수습한 시신은 모두 27구였다. 김용환(23)과 우영철의 시신은 가족이 나중에 수습해갔다. 하지만, 김용환의 유족들이 당시 준비해둔 관으로 다시 매장지에 묻었다고 증언하고 있어 주민 25구, 봉기군 1구 등 26구의 유해가 안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시신은 난봉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길게 파 시신을 포개서 묻었다고 전한다. 접착성이 강한 황토라서 한동안 썩은 물이 밖으로 흘러나와 악취가 풍겼다는 것이다.

 

무덤은 오랫동안 동내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고, 위쪽에 주택이 들어서면서 묘역 중간으로 길이나 포장까지 되었다. 47년 전 이곳으로 이사 온 이명식씨 부부가 풀도 메워주고 주변에 꽃을 심어 한 많은 넋들을 달래주곤 했다.

 

마을 주민들이 묻힌 묘이지만, 온 가족이 몰살당하거나, 억울한 죽음에 한이 맺힌 어느 유족은 폐병으로 사망하기도 했고, 생활고에 시달리다 이장을 하지 못하고 타지로 이주해버린 경우도 있어 유해는 60년 동안 방치되어 왔다. 주민들이 시청에 묘지 이전을 건의하기도 했지만, 사진만 찍어갔고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고 매장지 주변 주민들은 전하고 있다.

 

현재 이곳에 매장된 것으로 확인된 피해자 신원은 황종권 목사 부모, 큰형수, 조카, 작은형, 하숙생 방광수를 비롯하여 우영철, 중앙병원 안선자 간호사의 부모, 언니, 김용환, 유족들까지 모두 사망해버린 나씨 집안 딸과 사위, 황 목사집 앞에 살았던 안모씨 가족(부모, 작은 아들, 작은 딸)등 17구뿐이다. 60년 세월 동안 찾아주는 후손도, 유족도 없이 묻힌 유해들은 말없이 난봉산 자락에 누워있다.

 

이제 반세기를 훌쩍 넘어 한 맺힌 넋들의 원혼을 풀어주고 화해의 손으로 보듬을 일만 남아 있다. 광주의 5월처럼 가해자의 반성은 없지만.

덧붙이는 글 | 다음블로그에도 올렸습니다(http://blog.daum.net/ckp920)


태그:#여순사건, #순천매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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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서 어용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하다 세월호사건 후 큰 충격을 받아 사표를 내고 향토사 발굴 및 책쓰기를 하고 있으며, 은퇴자들을 대상으로 인생을 정리하는 자서전 전문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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