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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마다 깨닫는 일은 우리말을 너무 모른다는 사실이다. 띄어쓰기·맞춤법이 틀리고, 중간 중간에 외국말이 뒤섞인 글은 엉망이다.

 

내 글이 얼마나 엉망인지 <오마이뉴스>에서 최종규님이 “'-의' 안 써야 우리말이 깨끗하다” “'-적' 없애야 말 된다” “얄궂은 한자말 털기,” "'것'에 갇혀 우리 말투를 잃어버리다"를 보면 얼마나 내가 우리말을 모르는지 알 수 있다. 좀 배웠다고 하는 사람이 우리말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 일은 비극이다.

 

이 비극은 우리 아이들을 보면 더 심각해진다. ‘어륀지’로 등장한 영어몰입교육은 우리말을 죽음으로 이끌고 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외치면 온 나라가 분노하지만 우리말을 영어로 가르치겠다는 정부 정책에 겉으로는 화를 내도 내심 내 아이 영어에 뒤떨어지지 않을까 안절부절이다. 

 

말과 글은 나라와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모든 나라가 자기네 말과 글을 통하여 미래 세대를 가르치고, 물려주는 일을 가장 중요한 교육 정책으로 삼는 이유다. 글과 말을 잃어버린 나라와 민족치고 정신과 문명을 이어가는 나라와 민족은 없다.

 

얼마 전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둘러싼 이야기를 담은 <초정리 편지>를 읽었다. 배유안씨가 글을 쓰고, 홍선주씨가 그림을 그린 <초정리 편지>는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 이후 눈병 때문에 충북 청원군 초정 약수터로 요양을 갔던 일화를 담은 책이다.

 

초정에 사는 '장운'이라는 사내아이가 있다. 장운 천민이다. 천민으로 살아가기 버거운데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석수장이로 살다가 다리를 다쳤다. 하나뿐인 누이는 어머니 병 수발에 들어간 돈 때문에 결국 다른 집에 보내진다.

 

신분과 환경에서 절망만 있는 석수장이 장운이가 자신이 가진 꿈을 이루어가는 이야기를 통하여 한글 창제에 관한 이야기를 숨겨 놓았다. 장운은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눈이 빨간 양반 할아버지를 만난다.

 

눈이 빨간 할아버지는 “ㄱ ㅋ ㄷ ㅌ” 따위로 만들어진 그림 같은 글자를 장운에게 가르쳐주고 다음날 외워오면 쌀 한 되를 선물로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서로는 동무가 된다. 어느 덧 장운은 할아버지와 새로운 글자로 필답을 하고, 누이에게도 글을 가르쳤다. 할아버지는 장운에게 “허허, 너와 네 누이가 내 근심을 많이 덜어 주었느니라”고 한다.

 

고귀한 한자를 버리고, 천한 언문을 가질 수 없다는 신하들 등쌀에 힘들어 했던 세종에게 장운은 얼마나 고마운 존재였을까? 근심은 나랏일을 맡은 중신들이 아니라 장운이 들어주는 장면은 글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글은 신분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어느 누구나 쓰고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말을 할 수 없다. 그 때 글을 통하여 생각을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귀한 일인가?

 

장운은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신 글은 어렵지 않아 쉽게 멀리 다른 집에 팔려간 누이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빚 때문에 남의집살이를 하러 간 누이 일로 큰 슬픔에 빠진 장운은 때맞춰 할아버지도 떠나는 바람에 쓸쓸하게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장운은 누이로부터 새 글자로 쓴 편지를 받고 숨이 멎을 듯한 충격을 받는다. 생각을 종이에 적어 보낼 수 있다니! 야, 내 생각을 이렇게 적을 수 있다니 참 좋다."(p84)

 

숨이 멎을 듯한 충격, 기쁨, 고귀하다는 중국글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찌 놀랍지 않은가? 글이란 배우기 어려워야 고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가 쓰고, 읽을 수 있어여 고귀한 것임을 글쓴이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신분질서는 견고하다. 중인 출신 석수장이 ‘상수’는 장운에게 신분제가 드리운 견고한 성이다. 감히 천한 노비가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나 읽고, 쓸수 있는 새로운 글이 만들어졌지만 신분제는 거부한다.

 

“인마, 글이라는 게 아무나 쓰는 게 아니야. 양반이나 우리 같은 중인은 되어야 쓰는 거지, 너같이 노비 출신이 글은 무슨 글이냐? 웃기게.”

“그 글자는 백성들 누구나 다 쓰라고 만든 거예요.”

“누구나? 그 글자 못 써, 인마. 필요 없다고 다들 반대하는 글자야.”

“윤초시 댁 마님도 좋은 글자라고 하셨어요.”

“호기심이겠지. 글자라는 게 한자처럼 점잖고 어려워야 글자지, 아무나 다 쓰면 그게 무슨 글자냐?”

“누구나 다 쓸 수 있으면 좋잖아요.”

“좋긴 뭐가 좋아? 양반 상놈 구분도 안 되게. 그리고 양반들은 그런 거 안 써. 평생 배워 온 진서가 있는데 뭐 하러 그까짓 걸 새로 배우냐?”

장운은 입을 다물고 발길을 떼었다.

“네 주제에 뭐, 사람들을 가르쳐? 분수를 알아라. 네 신분을 좀 알란 말이다.” (152 - 153쪽)

 

<초정리편지>는 어느 누구나 쉽게 쓰고, 읽을 수 있는 위대한 문자 '한글'을 할아버지(세종)와 장운, 누이와 동무들의 꿈과 좌절이 담긴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생생하게 들려준다.

 

장운과 동무들, 석수장이들은 조선시대 하위계급들이다. 아니 중인과 양반층 부녀자들도 천민은 아니지만 남성 양반에 비하면 하위계급이다. 한글은 이들 하위계급들의 고단한 삶, 철저한 신분사회에서 고통당하는 삶에 파고들었다.

 

한글은 영원히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그들에게 생각하게 하고, 말하게 하고, 글을 쓰게 해주었다. 글을 통하여 정신과 문화까지 만들어가는 참 인간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된다. 

 

지금은 사라진 '아래아(·)' 따위 15세기 한글표기로 된 편지가 더해져 보는 재미까지 준다. 옛날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옛글을 독해하기 위하여 머리를 싸맸던 시절을 생각나게한다. <초정리편지>는 글은 신분을 가름하는 기준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생각을 나누고, 전할 수 있는 고귀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세종 시대 '중국말'로 신분제를 구축했던 어러식은 양반기득권세력이 한글을 언문으로 비하했듯이 우리 시대는 영어가 한글을 비하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초정리편지> 배유안 지음, 홍선주 그림 ㅣ 창비 ㅣ 8,500원


초정리 편지

배유안 지음, 홍선주 그림, 창비(2006)


태그:#한글, #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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