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의 답변은 아직도 시원치 않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non-combat help', 즉 '비전투 지원'을 요청했다. 한국군의 아프간 재파병을 우려하는 국민과 언론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가운데 청와대는 이것이 '비군사 지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공식 해석했다. 한국군 재파병 논의 자체를 곤혹스러워 하는 정부는 애써 그 의미를 축소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 측에 진짜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간단한 일이지만 정부는 진짜 의도를 이미 알고 있거나, 아니면 그것이 사실상 재파병을 요청하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올까봐 묻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이하 나토)가 아프간에서 처한 상황을 살펴보면 의외로 그 답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병력 부족을 호소하는 국제안보지원군
먼저 아프가니스탄 주둔 다국적군 현황부터 살펴보자. 현재 아프가니스탄에는 나토가 이끄는 '국제안보지원군'(ISAF) 병력 4만1천명이 주둔하고 있다. 이들은 39개 나라가 파병한 병력으로 구성돼 있고 호주·네덜란드·캐나다·폴란드·프랑스·영국·독일·미국·이탈리아가 천명 이상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다. 이 중 미국이 1만6천명, 영국이 7800명 정도로 가장 많은 병력이다.
국제안보지원군은 '평화유지군'의 한 형태로 2001년 12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로부터 아프가니스탄 안보와 개발 촉진의 임무를 부여받고 주둔중이다. 미국은 국제안보지원군과는 별도로 '항구적 자유 작전'(OEF)을 위해 1만3천명의 병력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국경 지역에 배치하고 있다.
나토가 통솔하는 국제안보지원군과 미군은 계속해서 병력 부족을 호소하고 있다. 나토는 지난 2년간 세력을 한층 팽창시킨 탈레반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7500명 정도의 병력이 더 필요하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비교적 많은 병력을 주둔시킨 독일은 올해 초 추가 파병은 없다고 못 박았고, 캐나다는 병력 증강을 통해 효과적인 작전 수행이 없다면 병력을 철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상태다. 현재까지 100여명의 인명 손실을 본 영국은 지난 6월 230명 추가 파병을 놓고 과연 아프간 작전이 가치가 있는 것이냐는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 4월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국제안보지원군의 효과적 작전 수행을 위해 해병 3천명의 추가 파병을 고려중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계획은 봄이 되면 적극적 활동을 재개할 탈레반 세력의 확장 저지와 소탕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런 우려에 답이라도 하듯 탈레반은 지난 6월 칸다하르의 감옥을 공격해 350명의 탈레반 수감자들을 석방시켰다.
'지켜야 할 평화'가 없는 평화 유지 활동
이런 정황으로 볼 때 미국이 한국에 요구하는 것은 재파병이다. 다만, 지난해 한국인 인질 사건이 기폭제가 돼 병력을 철수시킨 한국의 상황을 고려해 탈레반과의 직접 교전이 많은 남부와 동부 지역 이외에서 평화유지와 재건 활동을 하는 재파병을 의미했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미국과 나토가 주도하는 아프간 작전의 정당성 여부다. 국제안보지원군은 공식적으로 유엔 안보리의 재가를 받은 평화유지군이다. 그러나 국제안보지원군의 현 활동은 '평화 유지'보다 그 이전 단계인 '평화 만들기'에 가깝다. 그것도 휴전 협상이나 화해같은 노력 없이 무력에 집중하는 군사 작전이다.
'지켜야 할 평화'가 없는 평화 유지 활동인 셈이다. 또한, 대부분의 평화유지군이 평화 협정 후 무력 충돌 집단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다만 이들의 무력 충돌을 막기 위한 활동에 주력하는 것과 달리 국제안보지원군의 활동은 탈레반 소탕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아프간 작전은 시작부터 정당성이 없었다. 9·11 직후 미국은 테러 공격의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을 지원하고 은닉한 혐의를 빌미 삼아 탈레반 정권의 합법성을 부인하면서 아프간 공격의 명분을 쌓기 시작했다. 이때 미국 내에서도, 미국이 발을 뺄 수 없는 전쟁의 깊은 수렁 속으로 말려들어 갈 위험이 있다는 논란이 많았지만 부시 행정부는 같은 해 10월 영국과 합동으로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단행했다.
그 결과 12월에는 탈레반 정권이 몰락했고 같은 달 유엔 안보리는 미국과 나토 병력으로 국제안보지원군을 창설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이 주도한 전쟁을, 국가들 사이의 이익이 첨예하게 작용하는 유엔정치가 정당화시켜준 것에 불과했다.
지난 7년 동안 다국적군의 아프가니스탄 주둔이 아프간 상황을 개선시키고 국민 생활을 안정시키는데 기여했다면 현재의 군사 작전이 정당성을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탈레반의 세력 확장은 국민에게서 반감을 샀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7년간 다국적군은 미국이 세운, 수도 카불의 카르자이 대통령 정부 지원에만 급급했고 이 정부는 카불 이외의 지역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개발 지원과 사업은 지지부진하고 주민들의 생활은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 이러는 동안 탈레반은 세력을 확장했고 이제 주민들은 정부군과 탈레반 사이에서 이중고를 겪고 있다. 정국의 혼란과 내전 상황의 재개를 보는 아프간 국민들은 차라리 억압적인 평화라도 누렸던 탈레반 통치 시절이 나았다는 말까지 하고 있다.
명분을 찾기 힘든 아프가니스탄에 재파병할 이유가 없다
다국적군의 아프간 작전은 만 7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 명분도 성과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게다가 탈레반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탈레반 소탕이 과연 현실적인지도 의문이다. 아프간 국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프가니스탄의 평화를 위해서는 탈레반과 현 정부 사이의 휴전과 평화 협상이 가장 현실적이다. 그러나 탈레반을 적으로 규정한 다국적군은 아직 이런 시나리오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명분을 찾기 힘든 아프가니스탄에 재파병을 할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평화건설 노력 없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무력 대립에만 의존하는 내전 상황에 다시 발을 들여놓을 이유가 전혀 없다. 한국 정부는 파병과 관련해 먼저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에 기초해 국익을 판단해야 한다.
한국은 정당성이 없고 무력 대립을 악화시켜 주민들의 삶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아프가니스탄에 어떤 이유에서라도 파병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아프간 작전처럼 유엔이 재가한 작전이라도 마찬가지다. 군부대를 보내는 파병 대신 총체적인 평화건설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한다.
아프가니스탄이 현재 필요로 하는 것은 구호와 개발 지원이며 한국은 파병보다는 이러한 지원을 통해 국제적 신뢰와 영향력을 키울 수 있다. 나아가 이런 원칙이 세워진다면 미국과 같은 무원칙한 파병 요구에 전전긍긍할 필요도 적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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