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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했는데 너무 빨리 현실로 나타났다. 11일 이명박 대통령이 KBS 정연주 사장을 해임했다.

 

물론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다. 진작부터 보수적 성향의 시민단체, 보수언론이 정 사장의 퇴진을 줄기차게 요구하면서 압박해 왔고, 이에 더해 최근에는 검찰, 감사원, KBS 이사회가 정 사장의 해임을 위한 수순을 밟아왔다.

 

거듭된 논란 속에서도 대통령은 해임을 강행했다. 일사천리로 진행될 만큼 시급한 사안이었을까.

 

정 사장의 KBS 운영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다. 물론 '정치적'으로 퇴진하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하지만 꼭 짚어봐야 할 것이 있다. 정 사장 해임으로 가기 위한 일련의 조치가 법률에 따라 이루어졌는가. 관련 법을 보면서 풀리지 않는 법률적 의문을 짚어본다(정 사장에 대한 검찰 수사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하지만 일단 수사권은 검찰의 고유 권한이기에 존중하자. 만일 기소가 되더라도 법원의 판결에 따라 유무죄가 가려질 것이기에. 그러나 정사장이 무죄 판결을 받게 될 경우 검찰이 입을 타격도 만만찮을 것 같다).  

 

[의문1 - 감사원] '정연주 해임 요구'는 적정했나?

 

감사원은 대통령 소속 기관이지만 직무의 독립성을 보장받고 있다. 조직 운영에서도 '독립성이 최대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 감사원법 2조의 설명이다.

 

새 정부 들어서면서 전윤철 감사원장이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물러난 것을 두고 감사원의 독립성 훼손 논란이 있었다. KBS 역시 사장이 임기 도중 해임됨으로써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그 시발점이 된 것이 감사원의 해임요구이다.

 

감사원은 KBS 사장 해임요구안이 감사원법 32조(징계요구 등)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32조 8항은 '법령 또는 소속단체 등이 정한 문책사유에 해당한 자…에 대하여 그 감독기관의 장 또는 당해 기관의 장에게 문책요구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감사원은 단순한 '문책요구'가 아니라 한발 더 나아가 정 사장 '해임요구'를 했다.  '임원이나 직원의 비위가 현저하다고 인정한 때에는 그 임용권자 또는 임용제청권자에게 해임요구를 할 수 있다'는 규정(32조 9항)을 적용한 것이다. 

 

감사원의 발표를 보면 만성적 적자구조 고착화, 방만한 경영, 사업비 낭비 등 주로 경영상의 실책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을 '비위가 현저한 경우'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해임요구는 비위가 현저한 경우만... 경영상 과오로 해임요구는 무리

 

일반적으로 비위가 현저한 경우란, 뇌물을 주고 받거나 횡령, 인사 비리를 저지르는 등 범죄행위나 이에 버금가는 행위를 했을 경우를 일컫는다.

 

또한 정 사장이 운영상 적자를 냈다는 것도 수치상으로 단순하게 접근할 사안은 아니다. KBS 사장이란 자리는 '임기동안 얼마를 흑자로 남겼는가'로 평가받는 자리는 아니다. KBS가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기관, 공영방송이라는 특성을 감안한다면, 수익이 최종 목적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공공성을 위해 예산을 사용했다면 설사 적자가 나더라도 그것이 해임 사유가 될 수는 없다.

 

서울에 근무하는 A판사는 "설사 감사원의 발표대로 정 사장이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이러한 경영상 과오나 과실이 해임요구에 이를 만큼 '비위가 현저'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결국 법을 엄격하게 해석할 경우 감사원의 해임요구는 다소 무리였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독립성을 갖춰야 할 감사원이 정치적인 판단을 내린 것 아니냐는 지적도 이 때문에 나온다.

 

[의문2 - KBS 이사회] 사장 해임 제청권한 있나?

 

8일 KBS 이사회가 '사장 해임제청안'을 의결했다. 의결 내용이 적정했는지를 떠나 이사회가 사장 해임 제청권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KBS 조직 운영을 다루고 있는 방송법을 자세히 보자.

 

KBS 이사회는 '공사의 독립성과 공공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공사 경영에 관한 최고의결기관'(46조 1항)이다. 이사회는 사장 임명 제청권, 부사장 임명동의권이 있다. 방송법 50조에 나오는 권한이다. 또한 사장이 편성한 예산을 의결하는 것도 이사회다(같은 법 57조).

 

그런데, 사장 해임 제청권은 어디에도 없다. 사장을 '임명' 제청하는 때에는 제청기준과 제사유를 제시하여야 한다는 설명(50조 3항)까지 있지만 해임 제청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런데 이사회는 어떻게 해임제청안을 의결했을까.

 

이사회는 방송법 49조 1항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조항은 이사회 심의 의결 사항으로 예결산 사항, 사장 임명 제청, 재산 취득 ․ 처분, 정관 변경 등 14가지를 규정하고 있고, 그밖에 '기타 이사회가 특히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항'을 두고 있다. 이사회는 기타 의결 사항에 사장 해임 제청이 들어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상식적인 법 해석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사회의 논리대로라면 이사회는 KBS 운영과 관련한 어떤 사항이라도 의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법률상 임명제청권만 규정... 해임제청권은 언급 없어

 

이에 대해 B 판사는 "법에 이사회가 심의·의결할 사항들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으므로, 기타 사항은 이러한 심의 의결 사항과 관련이 있는 사항만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따라서 이사회가 명백한 권한도 없는 사장 해임 제청권을 갖고 있는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했다.

 

또한, 이사회의 의결안은 해임 사유로 보기엔 너무 추상적이다. 특히 KBS의 세금 환급소송과 관련하여 법원의 조정을 받아들인 것이 "막대한 회사의 소송 자산을 포기한 결과가 됐다"는 부분은 수긍하기 어렵다.

 

법원은 판결 선고로 당사자들이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을 경우, 양쪽 당사자의 의견을 조율하여 판결 대신 조정이나 화해를 이끌어낸다. KBS 역시 국가(국세청)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항소심 재판의 권고를 수용한 셈이다. 

 

조정 대신 판결을 선택했을 경우, KBS는 승소했을 수도, 패소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법원의 권고에 따라 조정을 받아들인 것이 사장 해임사유가 될 만큼 잘못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의문3 - 대통령] 법률상 사장 해임권이 있나?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대통령에게 '사장 해임권(면직권)'이 있느냐이다. 이 부분도 법 조문을 꼼꼼하게 따져보자. KBS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법 조항은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 왔으며, 현재는 방송법 내에 한국방송공사에 관한 장이 별도로 만들어져 있다. 주목할 부분은 사장의 임명에 관한 부분이다.

 

우선 1998년 2월 일부 개정된 한국방송공사법 15조를 보자.

 

① 사장은 이사회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면한다.

② 부사장은 이사회의 동의를 받아 사장이 임면하고, 본부장은 사장이 임면하되 직근하급 직원 중에서 임명하여야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명백하다. 한마디로 대통령은 이사회의 제청으로 사장을 '임면'할 권한이 있었다. 대통령에게 사장 ‘임면권’을 주었기 때문에 해임도 가능했다. 그러다가 김대중 정부 시절, 이 조항이 바뀌었다. 2000년 여야가 우여곡절 끝에 만든 방송법 50조는 이렇게 되어 있다.    

 

① 공사에 집행기관으로서 사장 1인, 2인 이내의 부사장, 8인 이내의 본부장 및 감사 1인을 둔다.

② 사장은 이사회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③ 이사회가 제2항의 규정에 의하여 사장을 제청하는 때에는 그 제청기준과 제청사유를 제시하여야 한다.

 

이때 '임면권'이 '임명권'으로 바뀌었으며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임면'을 '임명'으로 바꾼 것은 방송법을 둘러싼 여야 정치권의 타협의 산물로 볼 수 있다. 한나라당이 야당 시절 만들어진 이 조항은 사장이 정권에 휘둘리지 않고 공영방송의 수장으로 역할을 하기 위한 장치라고 야당과 시민단체들은 강변하고 있다.

 

이에 반해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임명권자는 당연히 해임권도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정 사장 해임안을 신속하게 추진해 왔다.

 

2000년 사장 임면권이 임명권으로 법 개정... "해임권 엄격하게 해석해야"

 

C 부장판사는 사장 해임 조항이 따로 없는 것에 대해 "의도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법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입법의 불비'로 일단은 생각된다"는 조심스런 견해를 밝혔다. 그는 "대통령에게 해임권이 있는지 없는지 해석이 분분한 상태에서 이것을 정 사장에게 불이익으로 돌아가게 하는 게 적절한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A판사도 "사장 해임과 같은 중대한 사안은 유추해석해서는 안 된다. 법 조문에 나온대로 엄격하게 해석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대통령이 정 사장 해임안을 수용했지만 이러한 의문들은 풀리지 않고 있다. 법을 집행하는 정부로서는 당사자들과 국민들을 설득하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밀어붙이기만 보인다.

 

지금까지 나온 사실만 본다면 형사 처벌을 받지도 않은 정 사장을 해임하기엔 다소 무리가 아닐까 싶다. 현 정부의 정연주 사장 해임 결정은 정치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논란과 의문이 끊이지 않을 것 같다.


태그:#KBS, #정연주, #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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