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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 KBS 전 사장 체포 소식은 정신이 번쩍 드는 뉴스다. 무엇보다도 세상이 어느새 이렇게까지 변했나 하는 놀라움 때문이다. 대통령이 바뀐 게 6개월이 채 안 됐는데 어느새 이렇게 등골 서늘한 뉴스를 접해야 하나 하는 놀라움이다.

영향력 1위·신뢰도 1위인 이 나라 공영방송 사장이 체포돼 승용차 뒷좌석 가운데 중죄인처럼 앉혀 끌려가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고도 남았다.

체포 사유는 검찰 소환에 5차례나 불응했다는 것이다. 다 알다시피 검찰은 그동안 "정 전 사장이 국세청과의 세금 환급소송에서 2300억원을 돌려받을 수 있는데도 500억원만 돌려받기로 합의해 KBS에 1800억원의 손해를 끼쳤다"며 배임죄를 적용해 수사해왔다.

이에 대해 KBS 측은 "국세청과의 다툼 과정에서 재판부가 양쪽의 주장을 참고해 타당하다고 산정해 제시한 조정안을 회사경영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수용했을 뿐"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더구나 정 사장은 이번 수사가 '정연주 몰아내기'를 위한 정치적 수사라고 보고 소환에 불응해왔다. 조정안을 제시한 판사가 증인으로 나와야 하는 재판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정 사장 동네 슈퍼까지 뒤진 검찰, 해도해도 너무하다

정연주 KBS사장이 6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본관 회의실에서 감사원의 해임요구 결정 등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벌어진 사퇴압력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사장실로 가기 위해 승강기를 타고 있다.
 정연주 KBS사장이 6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본관 회의실에서 감사원의 해임요구 결정 등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벌어진 사퇴압력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사장실로 가기 위해 승강기를 타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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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렇다고 정연주 전 사장 개인비리를 잡아내기 위해 그동안 수사기관들이 총동원되다시피 한 것은 도가 지나쳤다고 아니 할 수 없다.
금품과 관련된 꼬투리를 잡기 위해 정 사장의 동네 슈퍼마켓까지 다 뒤지고 다녔다니, 정도를 걸어간 수사라는 소리는 듣기 어렵게 되었다. 운전기사와 차량운행 일지까지 조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미 밝혀졌지만 정연주 전 사장은 주말에 산행이나 친지 방문 등 사적인 용무로는 사장차를 쓴 적이 없다.

휴일에 급한 용무로 회사에 출근하면서 자기집 차를 몰고 나갔다가 정문에서 사장인 줄 모른 경비원에게 제지당한 적도 있다. 사장 차도 기름을 많이 먹는다고 에쿠스에서 그랜저로 바꿨다. 다 뒤져서 밝혀냈겠지만 개인적인 용도로 법인 카드를 쓴 적도 없다.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일이지만 정연주는 나의 고종사촌 매제가 된다. 내 고종사촌(고모 딸)이 정연주의 부인이다. 내가 중매를 해서 결혼을 했다.

그래서 나는 안다. 워싱턴 특파원 때 산 구두를 10년 넘게 신었던 사람, 마르고 닳도록 신은 그 구두 안 버린다고 부부싸움도 한 적이 있는 사람, 정연주는 그렇게 꽉 막히고 답답한 사람이라는 것을.

조사도 안 끝났는데 '불구속 기소' 주장까지

인멸할 증거도 없고 도망칠 이유도 없는 그에게 검찰은 체포에 앞서 지난 6일 출국 금지 조치를 내렸다.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는 8일 후진타오 주석이 마련한 오찬에 각국 원수들과 함께 초청한 전 세계 언론인 20명 가운데 유일한 한국인 1명으로 참석할 예정이었고 IOC위원장과의 면담도 약속돼 있었다. '출국 금지'라는 족쇄 때문에 국제적으로 실례를 강요당한 셈이었다.

12일 검찰에 체포된 그는 수사과정에서 '정치적 수사'에 항의해 묵비권을 행사했다고 보도된다. 체포해 가나 안 하나 죄가 있을 리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희한한 것은 정 사장에 대한 일련의 수사과정이 진행되기도 전에 정치권에서 처리 방향이 정확히 흘러나온다는 점이다.

소환에 불응하자 "출두 안 하면 체포라도 해야지"라고 어떤 여당 정치인이 말했다. 그대로 됐다. 12일 정 사장이 체포되자 바로 이어 "불구속 기소"라는 이야기가 한나라당 중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조사가 끝나지도 않은 시점의 이야기다.

5공 때 관계기관 대책회의라는 별난 기구가 있었다. 정치이건 사회이건 중요 현안문제가 생겼을 때마다 정부 내 주요기관의 책임자들이 모여 정보를 공유하고 처리 방향을 결정했다.

처리 과정의 중요한 잣대는 법과 원칙이 아니었다. 오로지 정권 보호 차원의 정치적 판단이었다. 그런 관계기관 대책회의가 다시 부활하지 않았나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든다. 정연주 전 사장 수사가 바로 그런 정치적 목적의 수사라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

정연주는 잡혀가고 기업인들은 풀려났다

정연주 전 사장이 체포돼 간 12일 정부는 8·15 광복절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바로 법의 집행을 주관하는 법무부 장관이 발표했다. 한 마디로 말들이 많다. 기준이 일정치 않고 유전무죄에 무전유죄의 축소판이라 했다.

재판에서 집행유예 판결과 함께 300일 사회봉사 명령을 선고 받은 기업인이 200일 봉사 밖에 안 했는데 사면됐다. 아들을 위해 보복 폭행을 한 폭행 범죄인이 경제인으로 분류돼 족쇄를 벗었다. "법원 판결은 잉크도 마르기 전에 휴지 조각이 됐다"는 판사들의 탄식도 들린다.

거액의 추징금을 내지 않거나 지방세를 납부하지 않아 '고액체납자'로 분류된 기업인들이 사면되는가 하면 대선 때 이명박 후보를 지지한 한국노총 관련자는 13명이나 사면에 포함됐지만 민주노총 관련자는 단 1명도 없다고 했다. 탈세 관련 조중동 인사들과 대통령에게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해준 종교인의 아들도 언론인으로서 사면 해택을 받았다.

특수 계층에는 특별한 잣대를 적용하고 촛불집회 참석자 같은 민초들에 대해서는 법질서 확립과 무차별 진압이라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 대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정 사장에게 납득할 수 없는 강압 수사를 벌이는 것도 문제가 많기는 마찬가지다.

공교롭게도 12일은 그래서 법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 날이 되었다. 자기들은 "바담풍" 하면서 국민들에게는 "바람풍" 하라고 하는 것은 공정한 게임이 아니다. 떳떳치 못한 일이다.

정 사장은 12일 저녁 검찰 조사 도중 묵비권을 행사하면서 "역사와 함께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역사 앞에 당당하리라"라는 휴대폰 메시지를 비둘기 보내듯 검찰청 울타리 밖으로 날려 보냈다. 그렇다. 이명박 정권도 역사 앞에서 당당해야 한다. 겸손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오홍근 기자는 국민의정부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을 지냈으며, 20년 전 월간지에 기고한 '청산해야 할 군사 문화'라는 칼럼 때문에 정보사로부터 테러를 당했다.



태그:#정연주, #언론자유, #KBS, #보수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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