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된 물건을 좋아한다. 새벽 0시,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모든 장난감들이 살아 움직이는 <호두까기 인형>처럼. 오래된 물건 속에는 '움직이는 시간'이 숨어있다. 낡고 닳았지만 손때 묻은 물건들, 가죽이나 은같이 흠집이 오히려 아름다워지는 물건이 좋다. 그래서 자석에 이끌리듯 '서울풍물시장'에 갔다. 거기서 물건을 사다 파산할 뻔했다.
청계천 복원 공사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서울 풍물시장. 지금은 신설동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지하철 신설동역에 내려서 10번출구로 나가면, 표지판이 꽤나 친절하게 가는 길을 알려준다.
1층은 골동품 위주고 2층은 동대문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생활용품들을 팔고있는데, 나는 로렐라이의 노랫소리에 홀려서 난파한다는 선원들처럼 1층을 떠나지 못했다. 내가 사고 싶은 물건은 오래된 라디오와 장식용품, 그리고 타자기. 하지만 왜 모든 아름다운 물건들은 비싼걸까?
작동이 되는 오래된 라디오를 사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고장난 것이 많았다. 그러던 중 골동품 더미에서 이 귀여운 라디오를 발견했다. 온 몸으로 "내가 바로 라디오!"를 외치는, 정말 라디오 같은 라디오.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니지만 -내가 어릴때도 우리집에선 이런 라디오를 썼다- 그래도 만족스런 가격인 만원인 데다, 소리도 짱짱해서 얼른 주머니를 열었다. 라디오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는데, 아저씨 왈. "이거 밖에 들고 놀러갈 땐, 밧데리 넣으면 잘 돌아가!"
푸핫! 왠지 커다란 라디오를 손에 들고 쿵짝쿵짝 엉덩이를 흔드는 내 모습이 생각났다.
오늘의 히든카드, 무쇠 팔, 무쇠 다리 강철 로보트도 구매했다. 기계부품으로 직접 만든 이 로보트는 희소성과 견고한 아름다움으로 감탄을 연발하게 만들었다. 혼자 사는 집 방범용으로도 제격인 강철 몸이 포인트다.
돌아다니다 보니, 배가 출출해졌다. 서울 풍물시장에는 시골 장터같은 음식점들이 있는데,생각만해도 군침도는 '비빔 국수'가 오늘의 선택메뉴. 주위를 둘러보니 밥을 먹는 사람보다, 나른한 오후 반주를 즐기는 사람들이 더 많은데, 아마도 저렴하고 군침도는 메뉴 때문일 듯하다.
풍물시장에서 만족스런 구경을 끝내고도 아쉬워서 풍물시장 주위를 어슬렁 거리다가 신설동역과 동묘앞역 중간 쯤에 위치한 또 다른 골동품 거리를 찾아냈다. 헌책방도 많고, 중고 가게들도 많은 골목 중간에 거의 기절할만큼 아름다운 물건들이 가득찬 가게에 들어갔는데 "사진 찍는 건 좋은데 팔지는 않는다"고 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이곳만 정지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남들보다 덜 가져도, 즐겁고 소박하게 사는 사람들. 물건 파는 것보다, 그늘에 쭈그리고 앉아서 이야기 하는 모습이 더 자연스러운 곳이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면서, 목마르면 시원한 생맥주 한 잔! 모든 근심이 훨훨 날아갔다.
세상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쓸데없는 물건들이지만, 내 눈에는 보석처럼 빛나보이는 게 있다. 그럴 땐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문득, 남들과 똑같으려고 하니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의 삶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아득바득 살다보니 슬프고, 아팠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맛있는 걸 먹고, 아름다운 물건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과 눈맞추고 걷는 길. 서울 풍물시장에는 추억과 꿈과 사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