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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빠요. 할 말 없어요."

 

14일 서울 가산디지털단지(옛 구로공단)에서 만난 노동자들로부터 자주 들은 말이다. 김소연 기륭전자 분회장과 유흥희 조합원의 단식이 65일째를 맞은 이날, 출근길을 재촉하는 노동자들에게 "기륭전자를 아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특히 기륭전자 인근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기륭'이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손사래를 쳤다. 어떤 이들은 "나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고 귀띔했다. "빨리 해결돼야 하지 않겠느냐"고 간단한 말을 해주는 이들도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꼭 숨겼다.

 

현재 구로공단이라는 이름을 지운 가산디지털단지엔 더 이상 '공순이·공돌이(공장 노동자를 낮춰 부르는 말)'는 없다. 이젠 첨단 아파트형 공장 등 번쩍이는 고층 빌딩만 즐비하다. 서울의 여느 번화가와 마찬가지로, 전철역에 내리면 스타벅스와 미래에셋이 반긴다.

 

하지만 애써 눈을 좀 더 크게 뜨면 허름한 생산 공장들이 눈에 띈다. 귀를 열면 목숨을 건 기륭전자 조합원들의 단식 소식도 들린다. 이날 하루, 보이진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열악한 환경에 처한 노동자들을 만났다. 이들은 기륭전자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시끄러운 회사는 망한다, 있는 사람이 양보해야"

 

오전 8시 가산디지털단지 3단지. 전철역과 인근의 버스정류장은 출근하려는 많은 사람들을 토해냈다. 젊은 사람들은 최근에 지어진 높다란 빌딩으로 향했다. 하지만 주변건물과 어울리지 않은 한 제약공장에는 40~50대 아주머니들이 몰렸다.

 

이들에게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바쁜 출근시간대여서 그런지 기자를 외면했다. 눈길을 주는 이들도 "어떤 일 하시느냐?" "기륭전자 얘기를 아느냐?"는 질문에 "바쁘다, 할 말 없다"며 입을 닫았다.

 

이곳에서 대화를 시도한 사람들 중 '야쿠르트 아줌마' 김숙자(가명·53)씨 만이 "기륭전자를 안다"고 말했다. 지난 1988년부터 이곳에서 야쿠르트를 배달한 그는 가산디지털단지 아니, 구로공단의 역사를 꿰고 있었다.

 

김씨는 "지금 생산 공장이 많이 없어져서 화이트칼라가 더 많다, 만날 보지만 가끔 높은 빌딩에 놀란다"며 "예전보다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아졌다, 현재 벤처회사엔 좋은 학벌 가진 사람들이 많다, 전체적으로 돈을 많이 번다"고 말했다.

 

"2005년 당시 최저임금보다 10원 더 많은 64만1850원을 받고 일했다"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얘기와는 다른 듯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특히 주부사원들은 얼마나 받느냐?"고 물었다.

 

김씨는 "정규직의 경우, 보통 주5일하고 월 100만 원을 받는다, 점심도 제공된다, 보너스 받는 회사도 있다, 야근하거나 주말에 일하면 120만 원도 벌 수 있다, 얼마나 좋아졌느냐"고 말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사정은 어떨까 싶었다.

 

그는 "계약직·일용직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많은데, 용역회사가 중간에서 갈취를 하니, 80만 원 정도 받는 곳이 많다, 그래도 잔업수당하면 100만 원은 받는다"고 말했다. 김씨와 대화하는 사이, 무표정한 많은 주부사원들이 아파트형 공장으로 바쁜 발걸음을 옮겼다.

 

31년 전엔 전남 목포의 한 고무회사에서 노조 활동을 하고, 20년간 수많은 공장 노동자의 파업을 지켜봤다는 김씨. 그는 마지막에 기륭전자를 향해 쓴소리를 던졌다.


"노사 관계가 좋지 못한 곳은 모두 망했다. 예전 노조의 투쟁으로 무척 시끄러웠던 회사가 있었다. 사장이 바뀌자, 임원들이 매일 아침 노동자들에게 인사를 했다. 고개를 숙였다. 그다음부턴, 파업 얘기 들려오지 않았고, 회사가 크게 성장했다. 있는 사람이 양보해야 한다."

 

"사람부터 살리자" - "시끄러워서 일을 못 하겠다"

 

 

기륭전자가 내려다보이는 한 낡은 아파트형 공장. 이곳에서 만난 이들은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모습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낮 12시 점심시간을 이용해 이들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점심시간은 고작 30분 정도로 긴 대화는 어려웠다. 대부분 밥을 허겁지겁 먹고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이날 만난 노동자들이 외친 "바쁘다"는 말이 피부로 와닿았다.

 

신사복을 만든다는 정현자(가명·57)씨는 "매일 볼 때마다 너무 안쓰럽다, 관도 있던데 보기가 좀 그렇다"며 "사람을 살리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최현숙(가명·57)씨 역시 "우린 100만 원 정도를 받는데 괜찮다. 기륭전자 분회는 젊은 사람들이라 돈을 더 벌어야 한다. 물가도 많이 올랐고, 애들 학원비도 그렇고 쓸 데가 많을 것이다. 빨리 해결을 돼야 한다"고 전했다.

 

기륭전자 분회 단식 농성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휴게실에서는 40대 정규직 주부사원들이 '65일 단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A씨 : "젊은 나이에 왜 저러고들 있는 거야?"

B씨 : "억울하게 잘리면 가만 있을 수 있겠어? 나는 저런 식으로 잘리면 불지를 거야."

C씨 : "해결할 기미가 안 보여. 딱해.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 우리도 생산직인데, 힘들어. 우리 일도 단순 업무인데, 저 사람들보면 우리도 어떻게 될지, 너무 불안해."

 

공장 구내식당에선 50~60대 비정규직 주부사원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한 60대 비정규직 노동자가 "서로 좋게 끝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짧게 말했다. 다른 노동자가 "일자리를 달라는데, 일을 주지 왜 저렇게 만드는지…"라고 대꾸했다. 기자가 다가가자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30대 구내식당 사장은 "업주 입장에서는 비정규직을 쓸 수밖에 없다. 기륭전자 문제는 정치문제가 됐다"고 지적했다. 한 정규직 노동자는 "2005년 12월 군대 가기 전에도 투쟁하더니, 지금도 한다"며 "참 지겹다, 소음 때문에 시끄럽다"고 말했다.

 

"기륭분회가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전해달라"

 

윤종희 기륭전자 조합원은 "우릴 모르는 사람, 안 좋게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면서도 "오래 싸웠고, 언론을 통해서도 우리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노동자들도 많다, 착취 당하고 빼앗기는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을 것이다, 멀리서나마 응원을 해준다는 게 힘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한 응원 때문일까? 최근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 등의 중재로 진행 중인 교섭에서 노사의 입장차가 다소 줄었다. 송경동 '기륭비정규 여성노동자 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은 "당장은 아니겠지만 타결될 수 있지 않겠느냐"며 다소 희망적인 상황을 전했다.

 

이날 오후 6시 30분, 기륭전자 인근 아파트형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다들 지쳐 보였다. 이들은 기륭전자 쪽으로 눈길을 줬지만 이내 돌렸다. 이 모습에 이날 만났던 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말이 떠올랐다.

 

"요즘 정규직 일자리는 비정규직으로 대체되고, 비정규직은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 고용불안을 겪는 지금, 부당하게 해고당한 기륭분회가 일터를 되찾아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전해줬으면 좋겠다."


태그:#기륭전자 비정규직,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 #기륭전자, #가산디지털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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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법조팀 기자입니다. 제가 쓰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필요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이나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하고자 합니다.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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