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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자살 클럽>겉표지
 <경성 자살 클럽>겉표지
ⓒ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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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경성 자살 클럽>은 도발적인 문장이 눈에 띈다. 바로 "하나의 유령이 근대 조선을 배회하고 있다. '자살'이라는 유령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 유명한 '공산당선언'을 패러디한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패러디의 배경이 '근대' 조선인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일제 침략으로 인해 자살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다는 것일까?

아니다. 전봉관이 이미 <황금광 시대>에서 밝혔듯이 일제 시대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독립 운동을 하려고 했거나 혹은 나라를 잃은 설움에 울분을 터뜨리지 않았다. 교과서가 알려주지 않았을 뿐이지 그 시대 사람들도 지금과 다를 바 없었다.

<황금광 시대>에서 지적했듯, 다들 '한탕'하는데 혈안이 돼있었고 또한 백화점에서 쇼핑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우리가 몰랐을 뿐이지, 근대 조선인들도 지금처럼 '욕망'적인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 '자살'이 벌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신여성 윤영애는 달콤한 신혼생활에 젖어 있었다.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꿈 같았다. 하지만 '봉건'적인 시어머니와 시댁 식구들 때문에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더욱이 남편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나자 그 신세가 처량하기 이를데 없었다. 한때 잘 나가던 신여성이었건만, 남자 잡아먹은 못된 여자로 온갖 욕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윤영애는 자살했다. 억울했기에, 설움이 깊었기에 자살했던 것이다.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든 평양 명기 강명화의 자살은 무슨 사연으로 벌어진 것일까? 강명화는 도도한 명기였다. 그녀의 얼굴 한 번 보려면 웬만한 돈 갖고는 어려웠다. 그랬던 강명화가 장병천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둘은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쪽빵을 얻어 신혼생활을 차린다. 찢어질 정도로 가난했지만 그들은 행복했다.

하지만 사랑만 갖고 결혼생활을 영위해나갈 수는 없는 법이다. 강명화는 돈을 번다. 장병천의 집안이 유명한 부자였지만 그들에게 한푼도 주지 않았기에 별의별 짓을 다해서 돈을 번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장병천이 신세를 망쳤다는 소문이 돌자 강명화는 참을 수가 없어 독약을 먹고 목숨을 끊는다. 지고지순한 사랑 때문에 자살을 했던 것이다.

이화여전의 고학생 문창숙이 자살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돈을 훔쳤다는 누명 때문이었다. 학생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다해 흰 눈이 펄펄 내리던 날 뒷산에 올라 목을 맨 것이다. 이렇듯 이들의 자살 사건은 오늘날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유로 발생한 것이었다. 근대 조선이라고 해서 독립운동이나 나라를 잃은 한으로 자살했거나 하는 일은 많지 않았던 셈이다.

그렇다면 전봉관이 굳이 이 자살 사건들을 묶은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그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그 사건들을 통해 근대 조선인의 삶을 엿보기 위해서다. 신여성 윤영애의 자살 사건은 그 시대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신여성, 그들의 등장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과 결혼할 남편들과 시댁 식구들은 '신'이 아니었다. 여전히 봉건적이었다.

그래서 신여성들은 결혼하는 순간 그 모든 걸 포기해야했다. 아니면 자신이 배우고 생각하던 것을 지키기 위해 '투쟁'을 해야 했다. 자살 사건을 보면 그들의 삶이 얼마나 험난했는지는 두 번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 시대의 '고민'을 상상하게 해주는 셈이다.

평양 명기 강명화의 자살 사건은 면모가 알려지면서 '신드롬'을 일으켰다. 마치 <젊은 베르테르의 죽음>이 알려진 후 자살 사건이 이어진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근대 조선인들은 낭만을 꿈꿨던 것이 아닐까? 그 시대의 새로운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고학생 문창숙의 자살 사건은 왜 따돌림을 당했는지를 분석하면서 그 시대의 흐름을 엿보게 해준다. 돈을 훔쳤다는 누명 이전에 '고학생'이라는 사실 때문에 따돌림 당했다는 사실 등을 지적하며 그 시대 여학생들의 새로운 생각을 엿보게 해주는 셈이다.

이렇듯 <경성 자살 클럽>은 10건의 자살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 일이 벌어진 이유과 파장 등을 분석하며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근대 조선인의 삶과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건들을 모은 것 같지만 두고 보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던 역사적 사실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셈이다.

이야기를 건네는 방식도 흥미롭지만 그 이면에 담긴 내용 또한 알차다. 최근에 쏟아져나오는 '조선'을 이야기하는 책 중에 단연 돋보인다.


경성 자살 클럽

전봉관 지음, 살림(2008)


태그:#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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