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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갈피에서 나온 이혼서류
 만화책갈피에서 나온 이혼서류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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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런 게 왜 여기서 나오지?"
"뭔데... 어머, 이게 이혼서류라는 거구나."

작은애가 내민 A4 크기의 4장은 이혼(친권자 지정) 신고서 2부였다. 자기가 보던 만화책갈피에서 나왔단다.

작은애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동네 '녹색가'에 큰애가 입던 중학교 교복을 들고 갔던 적이 있다. 녹색가게는 책이나 의류 등, 생활도구 같은 것들을 진열해 놓고 필요한 사람이 싼 값으로 사거나, 물건을 맡기고 댓가만큼 다른 걸 살 수도 있으며 기부도 할 수 있다. 2, 30대의 젊은 엄마들은 녹색가게에서 육아정보나 알뜰살림의 정보와 사는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곤 했다. 

볼 일을 끝내고 나오다가 가게 문 앞에서 책을 잔뜩 들고 오는 한 주부를 만났다. 끈으로 꽁꽁 묶인 두 묶음의 만화책이었다. 물건을 들어주면서 나는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 한 눈에도 욕심나는 물건이었다.

"이 책 맡길 거죠? 내가 다 사고 싶어요."
"네, 보면 아시겠지만 구입한 지는 얼마 안 돼요. 아직 새 책이에요."

만화책은 55권, 시중에서 사려면 세트로 사야 했고 정가는 45만원이었다. 방대한 중국고전을 대만작가인 채지충이 쓰고 그린 것으로 그렇잖아도 아이에게 사주고 싶었던 책이었다.

작은애가 학교에서도 빌려왔던 만화책은 한 눈에 우리 책이 될 것을 예감했다. 책은 한 권에 500원씩 2만 7500원이었는데 500원 에누리를 받고 27,000원을 계산했다. 책을 들고 온 주부는 30대 중 후반쯤으로 보였다. 그녀는 책값을 모두 녹색가게에 기부하겠다고 했다.

그때가 3년 전이었다. 책을 맡긴 그녀의 얼굴을 기억나지 않지만 어딘가 힘이 없고 근심어린 표정만 생각난다. 이혼서류를 보고 있으려니 그래서 그런가싶다.

만화책을 양 손에 들고 오면서 열 번도 더 쉬면서 집에까지 왔는데, 마침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트로 책 사주는 걸 경계하는 편이라 한 묶음만 풀어놓았다. 그리고 두 세권 정도를 눈에 잘 띄는 거실 한 곳에 흘리듯 놓았다. 우리는 서두르지 않고 야금야금 만화책을 봤다.

그렇게 보던 책갈피에서 이혼서류가 나온 것이다. 서류에는 남편인 혼인당사자의 본적과 주소, 한자로 된 이름까지 써 있다. 내용은 읽어봐도 잘 모르겠는 법적인 말들로 참 복잡하다. 이혼사유의 네 번째는 '경제문제'라고 돼 있다.

우리 부부도 경제문제로 티격태격 싸우고 풀어지고 다시 싸우길 스무 해가 다 되간다. 살아가는 일이 어찌 경제문제 뿐일까만, 그 때마다 서로 견디고 고비를 넘은 것 같다. 내 주변에도 그 동안 알고 지내던 부부들이 이혼으로 헤어진 경우가 있다. 한동안 소식 모르게 살다가 풍문으로 전해지는 달갑지 않은 이혼얘기를 듣는다. 처음엔 그저 사이가 좋지 않아서였다가 조금 지나면 헤어졌다는 안타까운 얘기로 끝을 맺었다. 그럴 땐, 그들 부부의 아이들이 눈에 밟힌다. 아이들은 외동이거나 둘, 셋을 둔 집도 있다. 여름이면 물놀이도 같이 가고, 명절 끝이면 집을 오가며 술 한 잔을 기울였던 부부들도 있었는데. 부부문제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만화책갈피에 접혀졌던 이혼서류의 부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쩜 작성하다 만 서류처럼 이혼을 결심하다가 그만 생각을 접었을 것 같다. 그러지 않았으면 그 서류가 이렇게 책갈피에 접힌 채로 내 손에 건너오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덧붙이는 글 | sbs u포터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이혼서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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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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