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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는 이른바 조손가정에서 자랐다. 내 나이 다섯에 부모님께서 헤어지시고 시골에 계신 조부모님께 맡겨졌던 것이다. 빨간 대야에 생선을 담아 파시던 내 할머님. 월남에서 허리를 다쳐 500원짜리 삯바느질을 하시던 내 할아버님. 나는 15년간 그렇게 성장했었다. 얼굴 한번 제대로 본 기억이 없는 아버지 덕에 국가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우리 형편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장차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라는 두 분의 가르침과 헌신적인 사랑을 먹으며 그렇게 자라났다. 할아버님, 할머님은 내겐 아버지, 어머니와 같은 분이셨다.

성인이 된 후 결혼을 하였다. 아쉽게도 할아버님은 이미 돌아가셨기에 나는 할머님만을 모시고 살고 있다. 하지만 지은 지 20여년이 다 되는 월세방에 살며 변변히 용돈 한번 못 챙겨드리고 있다. 그래도 나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할머님의 말씀은 내겐 큰 힘이 되고 있다.

그래도 할머님 보시기에 나는 아직까지 어린 아이 같은가 보다. 퇴근 후 집에 오면 가장 먼저 반겨주시며 밥을 챙겨주신다(아내보다 내가 먼저 퇴근). 또한 식사 후 꼭 챙겨주시는 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수박"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수박이기에 그런 것이다. 

할머니께서 사오신 수박이다. 일단 겉보기에는 잘 익어 보인다.
 할머니께서 사오신 수박이다. 일단 겉보기에는 잘 익어 보인다.
ⓒ 임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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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퇴근해보니 할머님 얼굴이 매우 피곤해 보이신다. 무슨 일이 있나 하고 봤더니 복도 한쪽 켠에 수박이 보인다. 얼핏보니 크기가 꽤 커보였다.

슬쩍 들어보니 상당히 묵직하다. 전자체중계로 달아보니 무려 8.8kg이나 나간다.
 슬쩍 들어보니 상당히 묵직하다. 전자체중계로 달아보니 무려 8.8kg이나 나간다.
ⓒ 임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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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를 재어보니 8.8kg이나 되었다. 이 뜨거운 여름에 힘든 몸을 이끌고 사오셨으니 안 지칠래야 안 지칠 수가 없다. 이럴 때마다 나는 고맙고, 뭉클한 마음과 달리 할머님께 신경질을 내곤한다. 이렇게 뜨거울 땐 좀 집에 가만히 앉아 쉬시라는 거다. 그러나 나는 올해 여름 단 하루도 수박이 끊기는 것을 보지 못했다.

칼을 넣어 보니 쫙~하고 갈라진다.
▲ 반으로 갈라진 수박 칼을 넣어 보니 쫙~하고 갈라진다.
ⓒ 임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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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들고 쪼개보니 제법 잘 익었다. 칼을 넣자마자 쫙~하는 소리와 함께 갈라지고, 쪼개지고 나니 향긋한 냄새가 난다. 할머님께서도 좋아하신다.

이래저래 썰어 넣었다.
▲ 화채를 만드려 통에 담은 모습 이래저래 썰어 넣었다.
ⓒ 임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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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내가 수박 물 흘리는 걸 싫어해 주로 화채를 담아 먹곤 한다.

수박을 모두 썰어 넣어보니 큰 통으로 2통이나 나왔다.
▲ 모두 담고 난 후 수박을 모두 썰어 넣어보니 큰 통으로 2통이나 나왔다.
ⓒ 임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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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잘라 담아보니 한참을 먹었는데도 두통이나 나왔다. 양이 상당하다. 엄청난 땀을 흘리며 손자에게 수박 한쪽 먹이겠단 마음으로 뙤약볕을 다니셨을 할머니 생각이 난다. 또 다시 뭉클한 마음에 뜨거운 눈물을 삼킨다.

할머님께서는 기초노령연금 수혜자이시다. 가끔 작은 아버님께서 주시는 용돈을 받으신다. 그 외에 수입은 전혀 없다. 그런데 가만 살펴보면 늘 돈이 딱 맞아 떨어지기는 하는데, 정작 할머니 자신에게 쓰이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집 반찬거리와 손자와 증손녀 먹일 간식 거리로 다 나가는 게다.

나는 또 다시 신경질을 낸다.

왜 그러시냐고...제발 그러지 마시라고...이제는 그만큼 고생하셨으면 되었으니 할머니 자신을 위해 쓰시라고...놀러도 다니고, 친구도 사귀며, 맛있는 것도 사서 드시라고...

하지만 벌써 2년이 넘게 이런 생활이 반복되고 있다.

자식은 그런 것 같다. 아무리 부모님께 은혜를 갚으려 해도 늘 부족하다. 바다 같은 부모님의 사랑에 시냇물 수준의 자식의 효도가 비교 될 수는 없다.

허나 그래도 늘 자식 걱정하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맛난 걸 먹이고자 죽을 때까지 헌신하시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이 사랑을 내 자식과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자 마음 먹게 된다. 또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일꾼이 되고자 다짐해본다.

이것이야말로 늘 부족한 이 철딱서니 없는 자식이 그분들께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효도이자, 최선이 아닐까 싶은 마음에...

덧붙이는 글 | 본인의 블로그와 이슈플레이에 함께 올립니다.



태그:#수박, #화채, #할머니, #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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