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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군 용화면 용화리 입구에 세워진  '지서주임 이섭진 영세불망비'
 충북 영동군 용화면 용화리 입구에 세워진 '지서주임 이섭진 영세불망비'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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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군 용화면 용화리에 들어서다 보면 세월의 무게에 깎이고 패인 비문이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그 비문은 '지서주임 이섭진 영세불망비'다. 이 비문은 30여 명의 생명과 관련돼 있다. 잠시 사연 속으로 들어가 보자.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원 등 많은 사람들이 남한의 군인과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첩첩산중 두메산골이지만 충북 영동군 용화면도 예외는 아니었다.

1950년 7월 18일. 인민군이 대전 점령이 기정사실화되자 남한 정부는 좌익세력이 인민군에게 협력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충북 영동의 보도연맹원까지 처형할 것을 지시했다. 이날 영동경찰서장은 충북도경국장으로부터 국민보도연맹원을 소집해 특무대(CIC) 영동파견대장에게 인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는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처형을 의미했다.  이날 오후 영동경찰서장은 각 지서장을 소집해 국민보도연맹원들을 모두 격리하라고 지시했다. 남부 네 개면은 황간지서로, 용화면은 용화지서로, 나머지 여섯개 면은 경찰서 수사계로 인계하라는 설명이 곁들여졌다.

지시를 받은 이섭진 용화지서장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보도연맹가입자들이 대부분 선량한 무지렁이 농사꾼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멍 뚫어 놓고 칼과 가위 넣어둬..

그는 우선 직원들에게 보도연맹원을 모두 소집하도록 했다. 30여명의 보도연맹원들은 군인들에 의해 모두 일제때 지은 목조건물인 용화국민학교 뒤 창고에 손이 묶인 채 수감됐다.

하지만 이 서장은 미리 목조건물에 사람이 빠져나올 만한 구멍을 뚫어 놓았다. 또 철사나 끈을 자를 수 있는 칼과 가위를 창고 안에 넣어 두었다. 이 서장은 이같은 사실을 동행한 한 보도연맹원에게 살짝 귀뜸했다.

영세불망비
 영세불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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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군 초병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용화지서로 달려와 소리쳤다.

"보도연맹원들이 창고 뒤에 구멍을 내고 모두 도망쳤습니다"

이후 영동경찰서장과 특무대 파견대장으로부터 '모두 잡아들이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이 서장은 직원들에게 인근 야산을 돌아보고 오라는 지시외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는 이 서장의 신변마저 위태롭게 하는 결정이었다.

그 사이 영동군에 사는 보도연맹원 수백여 명은 모두 끌려가 처형됐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던 어느날 영동경찰서로부터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인민군이 대전 점령 후 충북 옥천으로 남하하고 있다며 7월 21일 경북 왜관으로 모두 철수하라는 지시였다. 그때서야 이 서장과 그의 아내는 도주시킨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생각에 흐느꼈다.

같은 해 9월 말 영동경찰서 직원들은 유엔군과 함께 영동으로 복귀했다. 이 서장 또한 용화지서로 돌아왔다. 이 서장을 맞은 건 마을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이 서장에게 큰 절을 올리고 박수를 치고 연호했다. 이어 주민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이 서장도 울었다. 이 서장은 이듬해인 1951년 말 매곡지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질고 착한 마음으로 사람을 구했네"

다음 해 11월 11일. 용화면민들은 용화지서옆에 그의 마음을 기리는 '지서주임 이섭진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성명 미상의 석수장이가 며칠 동안 비석을 만들고 내룡리 정운익씨와 용화리 강일선씨가 글을 썼다.

영세불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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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에 새긴 내용 전문은 이렇다.

支署主任 李燮晉 永世不忘碑
(지서주임 이섭진 영세불망비)

剛明莅事 濟之慈仁
(강직하고 현명하게 일에 임하여 어질고 착한마음으로 사람을 구했네)
鎭玆一區 傍及外隣
(한 고을을 잘 다스리니 그 덕이 이웃에까지 미쳤도다)
家家懷德 人人迎春
(모든 사람들이 봄을 맞이하듯 집집마다 그의 덕을 기억하여)
路上片石 永年不泯
(비록 길가에 세운 조각돌일지라도 영원히 잊지 말자)

단기 4285년(1952년) 11월 11일 주민일동 

이 서장은 그후 황간지서장과 영동경찰서 외근주임을 역임한 후 1961년 퇴직했다. 퇴직 후에는 영동에 거주하며 전국시조명창대회 심사위원 등 소리꾼으로 또 다른 삶을 살았다. 그는 1989년 11월 27일 세상을 떠 현재 영동읍 설계리 교회묘지에 안장돼 있다. 

이같은 사연을 채록해 <무궁화꽃을 피운 사람들>에 담은 이창세(현 영동경찰서 정보 보안과장)씨는 글 말미에 "오스카 쉰들러는 독일 나치의 만행에 대한 가책과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유태인을 구했다면 이섭진 서장은 죽음에 처한 죄없는 동족을 보고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며 "이 서장의 이야기는 오늘도 용화면민들에게 전설 같은 이야기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밝혔다.

<무궁화꽃을 피운 사람들>
영동경찰 부끄러운 과거까지 있는 그대로 수록
<무궁화꽃을 피운 사람들>의 저자 이창세씨
 <무궁화꽃을 피운 사람들>의 저자 이창세씨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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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의 쉰들러 이야기를 채록해 책을 편 사람은 현 영동경찰서 정보 보안과장 이창세씨다. 그는 지난 해 가을 펴낸 <무궁화꽃을 피운 사람들>을 통해 영동 경찰의 영욕과 애환을 긁어 담았다.

책속에는 영동 경찰관들의 직원숙소였던 '무궁화촌'이 만들어진 과정에서 부터 만취검사 한밤 행패기, 위임식도 못하고 떠난 경찰서장 이야기 등 영동경찰의 시작과 현재가 들어 있다.

또 의용경찰의 활약상을 비롯 민초들의 삶의 얘기를 있는 그대로 옮겨 담았다.

그는 "틈틈이 조사하고 자료를 채집하다 보니 책이 나오기까지 13년의 세월이 흘렸다"며 "인생의 반을 보낸 선배 경찰들의 삶이 구전으로만 떠돌다 사라질 것을 우려해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이어 "공비토벌 작전에 참가한 의용경찰의 경우 명단조차 남아 있지 않는 등 자료확보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며 "그마나 용화지서주임 공덕비 탁본을 뜨고 자녀들을 만나 일화를 채록한 것은 수확이었다"고 덧붙였다.

인천지방경찰서 서성근 청장은 발간사에서 "이 책에는 아름다운 이야기외에 밝히고 싶지 않은 경찰의 부끄러운 과거도 있다"며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영동이라는 지역의 한계를 뛰어넘은 우리 경찰의 자화상"이라고 평했다.  (320쪽, 출판사 당그래, 9800원)     


태그:#쉰들러, #보도연맹원, #영세불망비, #충북 영동 용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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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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