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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알이 영글어가는 포도
▲ 포도 알알이 영글어가는 포도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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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사는 후배의 집 마당에 포도가 익어간다. 올해는 딱 한 송이 열렸단다.

시장에 가면 잘 익은 포도야 널렸지만 이렇게 포도나무 줄기에 달려 하나 둘 익어가는 포도가 진짜 포도 같다. 어릴적 집 마당에도 포도나무가 있었다. 여름에는 그늘막이 되어주었고, 이맘때면 검게 익은 포도송이를 하나 둘 따먹는 재미가 좋았다.

"얘야, 하나만 집중적으로 따먹어라. 여기저기 손대지 말고!"

어머니의 말씀이셨다.
가을이면 잘 익은 포도송이가 손님들이 올 때마다 하나씩 올려졌고, 손님들에게만 내어놓는 어머니의 마음씀씀이가 미워 누나들과 밤에 잘 익은 포도송이를 서리하기도 했다.

익어가는 포도송이를 보니 어릴적 포도나무가 있던 마당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말라가는 가지가 가을임을 알린다
▲ 가지 말라가는 가지가 가을임을 알린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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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지를 이렇게 말리면 온갖 오염물질이 다 붙어버릴 터이니 한번쯤 시도해 보고 싶지만 언감생심이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잊었던 풍경을 보면서 가지로 네등분해서 빨랫줄마다 가득 널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어느 여름인가 가지가 한 접(100개)에 100원하던 때가 있었다. 여름에 먹는 환상적인 쭈쭈바도 100원, 가지 한 접이 담긴 자루를 낑낑거리며 마당으로 옮긴 후 쭈쭈바는 나의 군것질 품목에서 사라졌다. 그때 어렴풋하게나마 농민들의 흘린 땀방울이 제대로 값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가지값이 폭락을 할 때면 가지를 따서 말리는 것이 일이었다. 한참 칼질을 하다보면 보랏빛으로 손가락이며 손바닥이 물들다가 검게 변한다.

새벽이슬에 촉촉한 가지를 따서 한 입 베어먹으면 얼마나 맛있었는지, 너무 많이 따먹으면 입병이 난다고 했건만 여름이면 가지를 따먹다가 종종 입안에 헐기도 했다.

가을꽃 곰취가 피어나고 있다.
▲ 곰취 가을꽃 곰취가 피어나고 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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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나물 중에서 으뜸인 곰취, 넓은 이파리에 비계가 많은 삼겹살 올려놓고 쌈장에 쇠주 한 잔이면 아쌀한 맛에 흠뻑 취해버리는 나물의 왕이다. 그렇게 이파리가 연할 때 다 뜯기도도 가을이면 활짝 웃으며 노란꽃을 내어놓는다. 참 기특한 가을 꽃이다.

나도 누군가 내 삶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뜯어가도 언젠가는 활짝 웃을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의 부모들이 자식들을 위해서, 부모가 낸 내가 자식들을 위해서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이렇게 웃어야 행복할 것 같다. 뜯긴 상처들이 너무 아프다고 울면서 피어나는 꽃은 없을 테니까.

빨갛게 잘 익은 고추를 말리는 풍경
▲ 고추 빨갛게 잘 익은 고추를 말리는 풍경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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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익은 고추를 따서 태양초를 만든다고 신나게 말렸다. 하나하나 잘 마르라고 일렬로 정리정돈까지 했는데 소낙비가 내릴 듯 산마루에 먹구름이 몰려온다.

"서울양반, 고추 걷어. 비올라."

어찌 그리도 잘 아시는지, 물골 할머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두 방울 떨어지는 듯 하더니 소낙비가 쏴아 쏟아진다. 기겁을 해서 고추를 걷고는 집에 돌아와 어머님께 그 이야기를 했더니 혀를 차시며 이런 말씀을 하신다.

"고추를 따서 바로 햇볕에 말리면 익어서 물러버려. 그늘을 만들어 주고 어느 정도 말린 다음에 뙤약볕에 말려야지…소낙비가 고춧가루 더 나오게 했네."

참으로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그들은 몸으로 배웠지만 나는 책으로 눈으로 배웠기 때문에 겉멋만 잔뜩 들어있는 것이다.

자마구란 '곡식의 꽃가루'를 말한다.
▲ 벼꽃 자마구 자마구란 '곡식의 꽃가루'를 말한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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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꽃, 자마구가 바람에 흔들린다.

작은 바람에도 쉴새없이 흔들리는 작은 꽃가루를 품은 꽃술, 허긴 열매가 있는 것들은 모두 꽃이 있고, 꽃이라면 당연히 암술과 수술이 있는 법인데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처럼 대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어느 새 빽빽해진 논, 이제 후텁지근한 바람이 아닌 아침저녘으로 쌀쌀한 바람과 여름햇살과는 다른 따가운 햇살이 연금술사가 되어 저 초록의 생명을 황금빛으로 빚어낼 터이다.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보니 나는 올해 무슨 열매를 맺었는지, 어떤 열매를 익히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올해는 초장부터 힘들었고, 국내의 정치상황들로 인해 무기력증에 빠져지냈다. 가을바람을 한 번 맞고, 풀떼로 손을 장식하고, 잡초의 줄기에 다리며 손에 상처를 입고 나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우리 곁에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그동안의 무더위를 다 씻어버리려는 듯 지난 밤부터 종일토록 굵은 장대비가 내린다.

좋다.

포도 익고, 가지고추 마르고, 곰취벼꽃 피는 가을, 참 좋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카페<달팽이 목사님의 들꽃교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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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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