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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옥정호 끄트머리가 보이는 운암대교 앞에 숙소를 정했다. 저녁을 먹고 숙소에 들어간 새신랑, 임실 관광지도를 펴놓고 나름 내일 일정 계획에 들어갔다. 관광지도를 한참 들여다보던 이 남자 심각하게 말한다.

"나는 말야, '구담마을' 하고 '장산 진뫼마을'이 가보고 싶네."

구담 마을이라면 '아름다운 시절 영화 촬영지'니까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고, 장산 진뫼마을이라면 김용택 시인이 살고 있어 잘 알려진 마을이다. 그런데 이 남자 은근히 내 의중을 떠보아 쉽게 공감을 얻어내려는 의도다.

"가 보고 싶으면 가면 되지. 순창은 좀 천천히 가서 늦게까지 둘러보면 되고…."

나는 이미 진뫼마을을 다녀 온 적이 있다. 1997년 문학 기행이었다. 벌써 11년이나 되었으니 지금은 또 어떻게 변했을까, 다시 한 번 가보고 싶기도 했다. 아름다운 시절 영화야 나오기 전이니까 안 가봤지만 김용택 시인과 관련된 곳은 시인의 안내를 받아 다 가 보았다. 오래돼 정확한 길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름다웠던 것과 인심 좋았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다음날, 간단하게 아침밥을 먹고 짐을 꾸리자 이 남자 구담마을부터 간단다.

"아니 그럼 옥정호는 어떡하구?"
"가다보면 옥정호가 보여?"

'그래?' 나는 의심을 내려놓지 못한 채 꾸역꾸역 차에 올랐다. 다른 때 같으면 관광지도를 펼쳐 놓고 차근차근 설명을 해가며 수정을 요구했겠지만, 그저 고개만 갸웃하고 말았다. 굿으로 유명한 필봉마을을 지나고 섬진강 줄기 따라 30분 남짓, 샛강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를 건너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둘이 번갈아 가며 아름답다, 아름답다,를 연발하는 사이 도담마을에 도착했다.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 도담마을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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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절 영화 촬영지. 영화에서는 강변 가득 빨래가 널려 있었다.
▲ 도담마을 강가 아름다운 시절 영화 촬영지. 영화에서는 강변 가득 빨래가 널려 있었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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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집도 옛날부터 있었을 법한 낡은 집이 두어 채 있고. 저 멀리 강도 보인다. 영화에서 겹겹이 빨랫줄을 매 놓고 빨래를 잔뜩 널어 말리던 강변도 있다. 억척스레 빨래를 해 삶고 널고 걷었던 강변. 그곳이 아스라이 눈에 잡혔다. 영화에서는 바람만 불면 삐그덕 소리가 날 정도로 낡은 판잣집도 있었다. 빨래가 바람에 날리는 장면은 시원한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했고, 묘한 향수도 불러 일으켰었다.

강이 보이는 정자에는 모자가 매달려 나그네를 맞고 있었다.
▲ 정자 강이 보이는 정자에는 모자가 매달려 나그네를 맞고 있었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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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보이는 곳에 정자가 있는데 한 쪽 기둥에는 모자가 매달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손님을 맞이한다. 그러나 영화(映畵)의 영화(榮華)는 어디로 갔는지 마을이 예전부터 간직하고 있었을 쓸쓸한 분위기만 감지되었다.

김용택 시인이 33년이나 다녔다는 초등학교다
▲ 덕치초등학교 김용택 시인이 33년이나 다녔다는 초등학교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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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돌려 시인의 마을을 찾는데 도무지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두 번을 돌아 겨우겨우 덕치초등학교를 찾았고, 드디어 시인의 마을도 찾았다. 시인의 집이다 싶어 차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는데 두 남자가 집 앞을 서성인다.

11년 전이나 다름없는 시인의 집
▲ 시인의 집 11년 전이나 다름없는 시인의 집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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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김용택 시인의 집, 맞지요?"
"그런 거 같은데요."

그 분들 역시 쉽지 않게 시인의 집을 찾아오신 듯, 긴가민가 둘러보고 있다. 그런데 할머니 한 분이 집 쪽으로 걸어오신다. 난 아직 김용택 시인 어머니가 이 집에 살고 계신지 궁금해 할머니께 여쭈었다.

"여기 이 집에 아직도 누가 사시나요?"

왼쪽 끝이 시인의 서재고, 마당에는 잔디가 깔려 있다.
▲ 시인의 집 왼쪽 끝이 시인의 서재고, 마당에는 잔디가 깔려 있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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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 문학기행 때 찍은 사진. 마당 가득 채송화가 깔려 있어 아주 아름다웠다.
▲ 시인의 집 11년 전 문학기행 때 찍은 사진. 마당 가득 채송화가 깔려 있어 아주 아름다웠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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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가만 보니 조금 의아한 표정. 아, 그렇지! 아무 거리낌 없이 집으로 들어서시는 걸 보니 시인 어머니이신 것 같다. 어머니도 내 얼굴을 아실 리 없지만 반색하시며 맞으신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인의 어머니는 손님에게 후하다. 박절한 세상이지만 미물에게도 마음을 쓰신다니 길손을 마다할 리 없다. 한참을 이야기 하며 집을 둘러보는데….

"차나 한 잔 드실까?" 하신다.
"아, 네. 그냥 물이나 주세요."

곧 시인의 어머니는 시원한 결명자차를 내오셨고 우리는 더운 날 정말 시원하게 잘 마셨다. 사실은 어머니 성의라 달라 한 것인데 어찌나 시원한지, 먼저 오신 두 분은 두 잔씩 드셨다. 11년 전이나 다름없는 환대다.

내가, 그때는 안마당에 채송화가 가득 깔려 피어 있었다고 하니, 지붕을 새로 하면서 잔디를 깔았다고 설명해 주신다. 담장엔 능소화가 아름답게 피어 고개를 삐죽이 내밀고 있고 주인의 서재도 집 분위기에 맞게 단출하게 들어 앉아 있다. 서재 앞마당에는 김장을 붙이시려는지 배추 모가 나란히 정렬해 있는데, 어머니는 이제 나이가 들어 농사일은 전혀 못한다고 하신다. 올해로 80을 넘기셨다고.

시인의 집이 궁금해 찾아왔다는 길손. 능소화가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 시인의 집 시인의 집이 궁금해 찾아왔다는 길손. 능소화가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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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싫다며 한사코 손사래를 치시던 어머니가 마지못해 모델로 나서셨고, 우리와 함께 했던 두 분도 기념촬영을 하셨다. 시인이 나서 환갑을 사신 집과 마을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내가 '이제 퇴직을 하셨지요' 하니까 29일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다고 알려주신다. 언젠가 시인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TV에서였던가. 요즘 농촌 학교에는 조손가정 아이들이 많다고. 그래서 그 아이들의 정서가 메마를까봐 감수성을 위한 교육을 하고 있다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참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평생을 좌우하는데 저렇게 알아서 좋은 교육을 시키니 아이들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이제 시인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도 또 좋은 선생님이 뒤를 이어 외로운 아이들을 보살폈으면 하는 마음도 갖게 되었다. 우리는 11년 전 모여 앉아 시인의 이야기를 듣던 느티나무도 둘러보고 섬진강가에도 가 보았다. 11년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을 앞을 지키는 느티나무. 시인은 아마 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꿈을 키웠을 것이다.
▲ 느티나무 예나 지금이나 마을 앞을 지키는 느티나무. 시인은 아마 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꿈을 키웠을 것이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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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신문에 시인은 이런 말을 썼다.

꽃이 피는 살구나무 아래 앉아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서른이었고,
살구나무 아래 앉아 아이들이랑 살구 줍다가 일어섰더니, 마흔이었고,
날리는 꽃잎을 줍던 아이들 웃음소리에 뒤돌아보았더니, 쉰 이었습니다.
어느새 내 나이 머리 허연 예순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스물다섯인가 여섯 무렵 자신이 다녔던 이 학교(덕치 초등학교)에서 환갑이 될 때까지 살기로 다짐을 했다고 한다. 소박하고 아름다운 인생일 거란 생각에…. 그리고 정말 환갑을 앞두고 퇴임을 하신다. 그가 퇴임식을 하는 학교에 다닌 햇수는 합해서 33년이란다. 모두들 꿈꾸는 대박은 아니어도 난 시인의 글에서 행복해 하는 진솔한 모습을 보았고, 나도 덩달아 행복해졌다.

진뫼마을을 나오자, 회문산 자연휴양림 이정표와 맞닥뜨렸다.
"저기를 가야지."
"아니, 옥정호를 가야지?"
"그래도 여기서 4km밖에 안되는데?"

이쯤 되면 나도 말릴 수 없는 상황. 길을 잘못 잡은 것이다. 다음 일정이 순창인데 이러다보면 순창으로 그냥 빨려 들어갈 것 같다. 문제는 옥정호. 결혼한 지 6개월. 대충 감이 잡히는데, 우린 대단히 감정적인 남자와 대단히 이성적인 여자의 결합이었다.

그러다보니 가끔 옥신각신 한다. 나는 미리 계획하고 실천하는 형이고, 그는 당장 내키는 대로 하는 스타일. 그러니까 시인의 집이 궁금한 나머지 눈앞에 있는 옥정호도 몰라보고 이리로 내달린 것이다.

"여기서 순창 강천사도 가깝네. 그냥 순창으로 가자? 가서 점심도 먹어야 하고."

아침을 간단히 먹어 배도 좀 고플 것이고, 한 번 왔던 길을 다시 가는 것도 싫을 테니, 옥정호를 그냥 놔두고 가려는 것이다. 잠시 뜸을 들인 나, 차근차근 공세에 들어간다. 표정은 느긋하게 짓고 말은 최대한 낮고 부드럽게 하면서….

시인의 마을에 마음을 빼앗겨 나중에 둘러보게 된 옥정호...
▲ 옥정호 시인의 마을에 마음을 빼앗겨 나중에 둘러보게 된 옥정호...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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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옥정호는 임실의 하이라이트야. 우리가 여기 다시 오기도 쉽지 않은데 그냥 가면 어떡해. 점심은 늦게 먹더라도 옥정호엔 갔다가 가야지."

나는 아침에 준비해 온 과일을 내밀면서 달래듯 말했다. 이 남자 내 말이 구수했는지 아까 왔던 길로 방향을 잡는다.

덧붙이는 글 | 8월 24일 다녀왔습니다.



태그:#시인의 마을, #김용택 시인, #도담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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