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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가 가장 큰 집안행사로 자리 잡은 지 어느덧 꽤 되었습니다. 일가친척들이 모일 수 있는 설이나 추석명절이 있긴 하지만 뿔뿔이 흩어져 사는 현실, 차례를 지내러 가는 곳이 각각이다 보니 모두가 한자리에 모인다는 건 요원한 일이 되었습니다.

 

집성촌을 이루며 이웃해 살던 예전에야 굳이 일부러 모이지 않아도 명절만 되면 다들 만나고 인사 나눌 수 있었겠지만 핵가족화 되고 흩어져 살다보니 6촌 형제간에도 1년에 얼굴 한 번 보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 되었습니다.

 

나이 40이 넘은 사람들이야 어릴 때라도 만난 기억이 있지만 20대 이전의 젊은 사람들은 친척 간에도 얼굴조차 모르고 지내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는 야박한 세월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조금이나마 극복하고 해결하고자 15여 년 전부터 1년에 한 번 하는 벌초만큼은 모두가 모여 한꺼번에 하고 있습니다. 가까이는 부자나 형제, 할아버지까지 함께하는 3대가 모이지만 멀게는 16촌이 훨씬 넘는 형제들까지 한 날 한 시에 모여 벌초를 시작합니다.

 

올해도 그랬습니다. '음력 7월 그믐에 가까운 일요일은 일가친척이 모여 벌초를 하는 날'이니 올해는 지난 일요일(31일)이 벌초를 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오전 8시, 전날 왔거나 새벽같이 먼 길을 달려온 사람들이 한자리로 모여듭니다. 안부를 묻고 악수를 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지만 1년 만에 만나는 사람도 있으니 반가운 시간입니다.

 

거반 10대나 되는 공용 예취기를 사용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손질하거나 수리를 해다 놓는 일, 갈퀴나 낫등을 챙겨 놓는 일은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어른들의 역할입니다. 꼿꼿했던 허리가 구부정하게 휜 늙수그레한 어르신들이지만 고향을 지키는 등대불이며 장승목과 같은 집안의 어른들입니다.  

 

친척들 얼굴 익히고 조상의 묘도 익혀

 

어느 정도 사람들이 모이면 조를 나눕니다. 요즘의 공원묘지처럼 집단으로 조성되어 있지 않고 각자의 사정에 따라 고향산천 곳곳으로 선산이나 전답에 조성되어 산소들을 방향이나 구역별로 구분해 조별로 나눈 사람들을 배치합니다. 조를 나누고 배치하는 데 적용되는 작은 원칙이 있다면 젊은이들에게 집안이나 산소의 내력을 설명해줄 나이 지긋한 어른이 반드시 조장으로 배치되고, 지난해에 벌초했던 방향이나 구역이 아닌 다른 산소를 벌초하게 함으로써 조상들의 산소를 골고루 찾아다니며 알게 합니다.    

 

 

예취기 한 대당 너덧 명으로 조가 나뉘고, 벌초를 할 산소들이 결정되면 조장의 인솔로 각자가 흩어집니다. 10리쯤 멀리 떨어져 있는 먼 산소를 가야하는 사람들은 트럭을 이용하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곳에 모셔진 산소를 가야하는 사람들은 산길을 걷고 고개를 넘어 찾아갑니다.

 

먼 곳에 있는 산소를 시작으로 집결지 방향으로 있는 산소를 향해 벌초를 해오다보면 자연스레 집성촌처럼 산소가 무리를 이루고 있는 선산으로 모이게 됩니다. 작년 봄에 이장으로 모신 임백령 할아버지 산소를 중심으로 오밀조밀하게 조성된 수십 기의 묘 모두가 문중의 산소입니다. 

 

각자의 방향에서 벌초를 마치고 먼저 도착한 사람은 먼저, 조금 늦게 도착한 사람은 늦게 선산의 산소들을 벌초합니다. 여기저기서 윙윙 거리는 엔진소리에 산천이 시끄럽습니다. 예취기를 짊어진 사람이 풀을 베 내면 갈퀴를 들고 있던 사람이 뒷정리를 합니다.

 

예취기 소리가 한바탕 지나가고 나면 덥수룩하고 지저분했던 잡풀들이 바리캉(bariquant)으로 밀어낸 빡빡머리처럼 말끔하게 정리되었습니다. 반쯤은 숲을 이루고 있던 산소들 한 기 한 기를 모두 벌초하고 나면 선산 둘레가 훤해집니다.  

 

선산에 있는 산소들까지 벌초를 마칠 때쯤이면 헛헛했던 배가 고파집니다. 네 것이니 내 것이니 할 것 없이 보이는 예취기를 짊어지고, 갈퀴나 낫을 챙겨 들고 푸짐하게 차려져 있을 점심을 먹으러 갑니다. 

 

여자들은 점심준비 하고, 고향마을에 아이들 떠드는 소리 울려

 

남자들이 벌초를 하는 사이 남편들을 따라 온 여자들은 점심을 준비합니다. 올 벌초 때는 누구 네가 점심을 준비한다는 식으로 집안이 돌아가며 점심을 마련하고 있으니 한곳으로 모여듭니다. 집단벌초를 처음 시작 할 때는 고향에 사시는 친척들이 식사를 준비했지만 한두 해 지나고 나선 객지에 나가 살고 있는 친척들도 차례를 정해 한 끼의 점심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남자들이 벌초를 하며 일가친척임을 익혀간다면 여자들은 점심을 준비하며 일가친척임을 알아갑니다. 젊은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은 친척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금방 오빠나 언니가 되어 어울리고,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리지 않던 고향마을엔 아이들 소리로 활기가 돕니다.

 

갖은 양념을 넣어 버무린 야채나 산나물반찬이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 앞에 사람들이 앉으면 널찍한 그릇에 담긴 푹 퍼진 보리밥이 하나씩 놓입니다.

 

갖은 반찬과 고추장을 넣어 쓱쓱 비빈 보리밥 한 그릇으로 모두가 포식을 합니다. 입이 짧다고 소문이 났던 조카, 편식을 한다는 소문이 있던 조카도 숟가락에 얹힌 수북한 보리밥만큼이나 맛난 표정을 짓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얼마간의 담소를 나누다 보면 내년 벌초를 기약해야할 이별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고향에 부모가 살고 있는 사람은 집으로, 부모형제 모두가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일가친척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며 발걸음을 총총히 옮깁니다.

 

일가친척이라고 하지만 어른들과 함께 있지 않으면 얼굴조차 모른 채 남남처럼 지나칠 수 있는 현실에 이렇듯 일가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벌초가 집안의 내력을 계승시키고, 혈연의 우의를 돈독하게 해주는 하나의 방편이리라 생각합니다.


#벌초#일가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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