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0월의 어느 목요일. 향후 10년간의 세계 경제에 영향을 미친 뉴욕대공황이 시작된다. 연이은 증시의 폭락과 은행 파산으로 어수선한 세상을 뒤로 한 채 버몬트 숲 속으로 떠난 부부,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
두 사람이 쓴 책은 <조화로운 삶>, <희망>,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등 여러 가지다. 하지만 이들 책은 모두 한 가지 철학만을 담고 있다. 바로 조화롭고 소박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반(反)요리법으로 차리는 '소박한 밥상'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디자인하우스 펴냄)은 그녀의 자연주의 요리 철학을 그대로 옮긴 책이다. 그녀는 한 끼 식사에 오직 한 가지 음식만 먹는 것이 건강에 가장 좋다고 말한다.
'독자들이여, 요리를 많이 하지 않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 책을 읽으시길' 라고까지 말하는 이 책은, 아예 전반부는 요리법이 아닌, 반(反)요리법 철학을 담았다.
"나는 여성이 지킬 자리가 반드시 부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요리를 좋아한다면 요리의 즐거움을 만끽하라. 하지만 나는 요리를 좋아하는 부류가 아니다. 나는, 요리에는 최소한의 시간을 투자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밖으로 나가든지 음악이나 책에 몰두하고 싶다."
책의 전반부에서는 평생을 자연주의자로 살아간 그녀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부부는 간단한 차와 산책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아침식사를 대신했다. 일요일은 금식하고, 봄이면 위장 청소 겸 열흘쯤 사과만 먹었단다. 아침만은 왕처럼 먹어야 하고, 매끼 몇 가지 이상 반찬을 먹어야 건강하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보기좋게 깬다.
후반부는 드디어 본격적인 조리법이다. 하지만 세심하고 자상한 설명은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양파 조금, 레몬즙 약간, 물은 적당히' 등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요리사가 모험심 가득한 탐험가이길 바란다고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조리법을 읽을수록 '설탕 한 티스푼, 물 500㎖' 따위의 수량이 실은 의미 없는 숫자임을 깨닫게 된다. 애초에 '맛'이라는 것이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이지 않은가.
수십 가지 재료를 섞어 끓여낸 '잡탕의 맛'이 아니라, 재료 '고유의 맛'을 살린 나만의 조리법을 원한다면 충분히 도전해 볼만한 요리들이다. 단, 동양인에게 익숙한 재료와 맛이 아니라는 점은 아쉬울 뿐이다.
"인부들이... 20분만에 싹 먹어치웠어..."
가사노동에 최소한의 노력만 들여, 나머지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라는 그녀의 충고는 나의 마음을 뜨끔하게 한다. 일생을 '자식이 행복한 것'만 바라며 살아오신 우리 어머니. 그녀만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나는 단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대부분 손목관절의 고통을 호소한다. '손목터널 증후군'이라 불리는 이 병은, 주로 과도하고 지속적인 손목의 사용으로 발생한다. 집안 청소나 손빨래, 음식의 조리 등으로 어머니의 손은 평생 쉴 틈 없다.
일하는 주부가 전업주부보다 더 건강하다는 연구결과는 좀 더 치밀하게 나의 반성을 요구한다.
헬렌 니어링도 '소박하고 건강한 밥상'을 권하며 독자들에게 웃지 못할 일화를 이야기한다.
"한 농가의 부인이 일꾼 대여섯 명의 식사 준비로 하루를 다 보내다가 어느 날 오후 조용히 미쳐 버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정신 병원으로 가는 마차에 타서도 그 부인은 계속 '인부들이 20분 만에 싹 먹어치웠어. 20분 만에 다 먹어치웠어.'라고 되뇌었다는 것이다. 이 부인이 더 행복하고 창의적인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더라면 그렇게 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도서관의 요리 관련 도서를, 그것도 양피지에 적힌 기록부터 1만4천 종의 요리책을 훑어봤다고 한다. 때문에 시대를 초월해 반짝거리는 인용문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녀가 인생을 시작할 때 이 작은 책은 보물처럼 소중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 책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용하다고 확인되기를 바란다. 그런 기대 속에서 이 책을 대중에게 소개한다." - 어느 부인 (1812. '경제 원칙에 입각한 가정 요리의 새로운 방법')
맛있는 조리법이 가득 담긴 요리책이 아닌, '소박한 밥상'으로 여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라는 책이다. 내가 책을 덮자마자 어머니에게 선물한 책. 자연을 사랑하는 독자, 더불어 이제 막 요리 배우기를 시작하는 독자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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