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해거름에 농약을 쳐야하니 도와 주기를 원했습니다. 올해 두 번째 치는 농약입니다. 농약줄 길이가 100미터 정도 나가기 때문에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농약을 치기 위해서 산등성이를 넘어가야 합니다. 산을 올라가는데 지난 봄에 심은 고추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고향 동네(경남 사천)는 올해 유난히도 비가 많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밭농사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고추가 익어가는 모습이 그리 탐스럽게 보이지 않지만 그 무더운 여름을 내고 이긴 모습을 보니 왠지 마음이 좋아집니다.
조금 더 올라가니 단감에 노란 물이 들었습니다. 추석이 빨라 추석 때 먹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입에 침이 고였습니다. 알이 굵지 않아 약간 섭섭했지만 조금만 지나면 많은 사람들에게 단감이 주는 단맛을 듬뿍 줄 게 분명합니다.
땀이 이마에 송글송글 합니다. 가을 바람이 조금 불다가 이내 멈추었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누구였을까요? 네 농부들이 가장 키우기 힘들어 하는 참깨입니다. 참깨는 아무리 잘 되어도 타작하고, 말린 후 포대 안에 넣어야 한 해 농사 다 지었다고 할 정도로 농부들을 귀찮게 합니다.
몸이 너무 약합니다. 습도, 바람, 온도 모든 것에 이기는 법이 별로 없습니다. 정말 갓 태어난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마음이 없으면 참깨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이 녀석이 지금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지만 비 한 번, 바람 한 번 불면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립니다.
산등성이에 오르니 멋진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감격하여 그만 카메라에 담고 싶었습니다.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별 실력 없는 재주로 담았습니다. 하지만 저 구름이 나중에 엄청난 일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락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고향 동네는 중부 지역과 산간 지역보다는 나락 농사가 늦습니다. 고개는 숙였지만 아직 누런 물을 들지 않았습니다. 동생이 말하기를 올해 비는 많이 오지 않았지만 위에 있는 저수지 때문에 나락 농사는 잘 되었다고 했습니다.
농약을 치기 시작하자 이상하게 먹구름이 몰려 왔습니다. 산등성이에 올라 햇살을 자기 속에서 비치게 했던 그 구름이 그만 먹구름이 되어버렸습니다. 농약을 다 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만 비가 뚝뚝 거립니다. 농약값 10만원이 20분 만에 빗속으로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동생하고 허허 웃고 말았습니다. 농약값이 무슨 대수입니까? 올 한 해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고추, 단감, 참깨, 나락을 보면서 그리 화가 나기 보다는 즐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