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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서점의 여행코너에서 이 책을 집어들었다면 십중팔구 다시 내려놓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서점의 직원이라면, 나는 이 책을 여행코너에 진열했을 것이다.
 
매장 관리자가 "어이, 그 책은 인문코너나 러시아 전공코너에 꽂아야 해"라고 할지라도 나는 담당자의 권한을 핑계 삼아 기어코 이 책을 여행코너에 전시하겠다.

 

이 책의 부제는 '러시아 문화기행'이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러시아를 소개하는 입문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즉 저자가 여행을 하며 보고 느낀 것을 문화적 관점에서 펼쳐놓은 기행이 아니라, 러시아의 역사, 문화, 정치, 경제, 사회 등을 다각도에서 조망한 안내서에 가깝다는 의미이다.

 

이 책을 여행 코너에 진열해야 하는 까닭

 

따라서 이 책을 얼핏 훑어본 고객이나, 제목만으로 분류하는 관리자가 보기엔 여행코너에 적절치 않은 내용이라고 보기 십상이다. 나 역시 처음부터 이 책을 여행안내서로 읽진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순간 이 책이 러시아를 알고 싶거나 여행하고픈 사람에게는 필독서여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여행코너에 진열하기를 고집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저 관광지 사진이나 덕지덕지 붙여놓고 현장 안내판 수준의 해설만 늘어놓은 다음 나머지는 당사자 외에는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자잘한 경험이나 자질구레한 입담을 늘어놓는 여행기와는 다르다. 다시 한 번 부연하면, 이 책은 러시아 입문서이다. 그러나 딱딱한 학술서나 지루한 소개서가 아닌, 아주 단수가 높은 러시아 안내서이다.

 

어딜 어떻게 가면 볼거리, 먹거리가 있다는 식의 기능적 안내서가 아니라 인문의 창으로 본 길잡이인 것이다. 누군가 그랬지 않나.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우리가 보기 위해 러시아를 간다면, 더욱 알차게 보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그 봄의 수단인 앎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전달해준다.

 

정겹게 대화하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험한 코스를 헤쳐나가게 하는 가이드처럼, 재담에 귀기울이다보니 눈 깜짝할 새에 미로를 빠져나가게 하는 안내자처럼, 저자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러시아라는 거대한 백곰의 밑그림이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진다.

 

화려한 수사에 의지하지 않고 맨얼굴로 승부

 

이 책의 장점은 우선, 유려한 문체를 꼽을 수 있다. 저자의 문장은 군더더기 없는 단문으로 이어져 쉽게 읽혀진다. 이는 쪼잔한 기술로 현혹하지 않고 기본기를 제대로 구사하며 정상에 오른 복서처럼 믿음직스런 것이다. 누구나 짙은 화장발에 속기를 싫어한다.

 

저자는 번잡한 묘사나 화려한 수사에 의지하지 않고 맨얼굴로 승부한다. 가령 이러한 문장은 어떤가.

 

"(붉은광장) 길쭉한 직사각형 광장 네 변에 자리 잡은 건축물들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되돌아보노라면, 이곳을 러시아의 역사를 압축해놓은 한 페이지짜리 교과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둘째, 섬세한 시선이다. 본디 시인이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시적 습작을 거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자의 시선엔 시적 관찰과 예민함이 살아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조그만 사건이나 숨겨진 사실을 찾아내 역사적, 사회적인 시각으로 되살려내는 저자만의 관점은 전공인 사회과학적인 분석만으로는 이루어낼 수 없는 경지이다.

 

성 바실리 성당 앞에 있는 미닌과 포자르스키 동상을 보며 그 둘 사이의 역할과 활약을 유추해내거나, 푸쉬킨 부부의 동상에서 시선의 처리와 벌어진 손 모양을 지적하며 숨겨진 사연을 이야기해주는 것은 딱딱한 사회과학서적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이 책만의 미덕인 것이다.

 

셋째, 비틀기이다. 사건을 설명하면서 가끔 그 의미를 비트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하고 더불어 책읽기의 흥미를 배가 시킨다. 저자의 위트는 품격을 높여주는 미덕 중의 하나이다. 예컨대 스테판 라진의 처형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스테판 라진) 그가 반역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형이 처형당한 사건 때문이라고 하였다. 모름지기 지배자들은 반체제 인사들을 제거할 땐 일단 그에게 될성부른 동생이 있는지 잘 살필 필요가 있다. 10월 혁명의 주인공 레닌 역시 그의 형 알렉산드로가 반체제 활동으로 처형당하자 혁명에 가담하게 되는 점에서 흡사하기 때문이다."

 

넷째, 풍부한 화보로 시각적 효과도 소홀하지 않은 점이다. 역사적 사건의 경우처럼 사진을 구할 수가 없을 때에는 화가들의 관련 그림들을 수록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연상되도록 하였고, 그밖에 저자가 직접 찍은 러시아의 풍경은 전문가에 육박한 프로급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다소 산만한 것은 흠

 

반면 아쉬운 점을 들자면, 먼저 다소 산만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역사에서 시작하여, 문화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가 싶더니, 정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종내는 경제 쪽으로 물꼬를 돌려놓았다. 물론 저자로서는 역사적, 시대적 흐름에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어쩔 수 없다는 측면이 있다.

 

과거는 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밖에 없고, 문화는 러시아의 뿌리이기에 소홀할 수 없고, 정치를 빼놓고 설명이 되지 않는 시기가 도래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토대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현실 또한 간과할 수 없었기에 시선의 이동은 한계이자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학술서가 아닌 대중서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 정도 분량에 역사, 문화, 정치, 사상, 경제를 훑어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를 만난 독자의 행운을 빌어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다음으로 제목과 달리 '러시아'라는 거시적 조망은 있었지만, 러시아'인'이라는 미시적 관찰은 없었다. 출판사 기획물이다 보니 제목이 틀을 벗어날 수 없는 사정은 이해하지만, 이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있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저자의 다양한 거시적 시각에 섬세하고 촘촘한 미시적 시선이 보태졌더라면 아주 훌륭한 러시아의 '수학 정석'이 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떠나지 않는다면 이는 나만의 착각일까.

 

그러나 한편으론 이는 어쩌면 저자의 의도적 생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즉 러시아'인'에 대해선 보다 풍부한 얘깃거리로 독자와 다시 만나기 위한 장기포석으로 말이다. 만약 이것이 오해라면, 오해일지언정 가슴에 그런 바람이 차오르는 것은 이 책을 읽고 난 어쩔 수 없는 후유증이다.

 

이밖에 책의 내용에 관한 것은 읽는 사람 각자의 몫이므로 더 이상 깊이 들어가는 것은 실례일 것이다. 다만 아래와 같은 몇 가지 경구로서 이 책의 가치를 피력하고자 한다.

 

당신이 여행사 패키지로 러시아 관광을 떠난다면, 이 책을 가져갈 필요는 없다. 성 바실리 성당과 크렘린 궁 앞에서 자신을 선명하게 찍을 좀 더 크고 무거운 카메라를 챙기거나 쇼핑목록을 하나라도 더 챙기는 게 낫다. 

 

당신이 스칸디나비아의 아름다운 풍광을 구경한 다음 거기까지 간 김에 빡빡한 일정으로 모스크바를 둘러보겠다면, 이 책 역시 볼 필요가 없다. 당신의 바쁜 발걸음을 자꾸 늦추게 하여 어쩌면 비행기를 놓치게 할 수도 있다. 하여 예정에 없던 숙박비를 더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

 

당신이 자유여행을 간다면 이 책은 꼭 가져가길 부탁한다. 러시아라는 낯설고 거대한 문화 앞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나침반이 되어 주기도 하고, 자칫 방종하기 쉬운 자유에 균형추를 달아주기도 할 것이다.

 

당신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배낭여행을 간다면, 이 책은 배낭 맨 위에 얹혀져야 한다. 광활한 벌판과 자작나무만 며칠 동안 바라보다 마침내 이 책을 꺼내보면, 그 다음부터 쳐다본 시베리아는 벌판이 아닌 역사의 현장이 될 것이다. 그런 다음 배낭을 메어보라. 당신의 뇌는 어깨에 명령을 내릴 것이다. 참아줘, 무거운 만큼 발품을 덜게 됐잖아.

 

당신이 비즈니스 때문에 러시아를 방문한다면, 이 책을 밑줄 그어가며 읽어라. 나는 광개토대왕을, 임진왜란을, 외세에 갈가리 찢긴 우리의 근세사를, 기적처럼 일어난 파이팅 코리아를, 나아가 살짝 치켜올린 하회마을의 기와지붕을, 석굴암의 천년 미소를, 사라진 새만금의 갯벌을 아쉬워하는 외국인을 만난다면 그에게 기꺼이 한 끼의 식사를 대접할 용의가 있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당신이 러시아에 일년 이상 장기체류할 예정이라면, 이 책은 가져가지 말기를 바란다. 그리고 당신이 이와 같은 책을 써보길 권한다.

 

당신이 여행과 상관없이 러시아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기 전에 적어도 두 가지 색 이상의 형광펜을 준비하기 바란다.

 

당신이 점심 먹고 난 후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이 책을 집어 아무 페이지나 펼쳤다면, 황급히 책을 덮고 사무실로 돌아가길 바란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오지 않는 당신 때문에 당신의 상사는 무척 열이 받쳐 있을 것이다. 하여 그동안 당신에게 후하게 매겼던 점수가 일시에 날아갈 공산이 크다. 그런 줄도 모르고 유려한 문체에 빠져 있는 당신, 저자는 결코 책임지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 교보문고 리뷰란에도 올렸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쓴 러시아, 러시아인 - 권융 교수의 러시아문화기행

권융 지음, 효민(2008)


#러시아#러시아 문화기행#러시아인#모스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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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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