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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 한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남해 금산 잔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딴딴한 흙을 뚫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얼레지꽃 생각이 났습니다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
해토머리 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울 돋아나게 했습니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얼레지' 모두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당돌하다. 시인 김선우는 그 당돌함 속에서 진실을 줍는다. 하긴, 한 송이 꽃이 피어나는 것이 어찌 벌 나비 때문이겠는가. 꽃이 벌 나비 때문에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벌 나비가 활짝 피어난 꽃을 보고 날아들지 않겠는가. 그가 옛날 애인이 묻는 자위행위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것도 생태계의 본능, 곧 이 순수에서 비롯된 듯하다.  

붓다와 마르크스를 정신의 주춧돌로 삼고 있다는 시인 김선우. 그에게 붓다가 마음이라면 마르크스는 몸이다. 그에게 붓다가 삶을 이끌고 가는 혼이라면 마르크스는 그 삶을 작품으로 엮어가는 자판기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유심론과 유물론이라는 경계는 없다. 유심론이 있어 유물론이 있고, 유물론이 없으면 유심론도 없다는 것이다.  

글쓴이가 김선우를 처음 만난 것은 1990년대 초 '한국문학예술대학'에서였다. 그는 그때 시창작반에 다녔다. 시창작반은 김남주, 이시영, 고정희, 박몽구 등이 담임을 맡고 있었고, 고은, 신경림, 정호승, 정희성, 강은교 등 한국문단에서 내노라 하는 시인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특강을 했다. 

그는 그때 어느 시인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 글쓴이, 시창작반 벗들과 어울려 마산에 갔다. 근데, 마산에 있는 한 시인이 그를 보자마자 귀찮을 정도로 졸졸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는 그 시인을 가까이 하지도 않고 멀리 하지도 않았다. 사람 사이에 섣부른 선을 함부로 긋지 않았다는 그 말이다.

20일 오후5시 청계광장 노천무대에서 시상식

지난 8월초, 춤꾼 최승희(1911~1967)의 삶을 그린 첫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실천문학사)를 펴낸 시인 김선우(39)가 한국여성문예원(원장 김도경)이 해마다 실시하고 있는 '2008 올해의 작가'에 뽑혔다. 김선우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을 쓴 작가 조세희(66)의 권유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최승희는 개인의 삶을 산 게 아니라 춤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 김선우 첫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 최승희는 개인의 삶을 산 게 아니라 춤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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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문예원 김도경 원장은 "'올해의 작가' 선정은 지난 해 9월부터 올해 8월 사이에 가장 뛰어난 작품활동을 한 여성시인과 소설가를 대상으로 해마다 실시하는 행사"라고 밝혔다. 김 원장은 "올해는 처음으로 한국여성문예원 회원 200여 명이 자체 설문조사를 통해 '올해의 작가'를 선정했기 때문에 그 어느 해보다 뜻 깊다"고 덧붙였다.

'2008 올해의 작가' 선정행사는 오는 20일(토) 오후 5시 한국여성문예원이 주최하는 청계천 문화행사 '청계천의 시인이 되어서' 행사장인 노천무대에서 열린다. 이날 김선우 시인에게는 순금 선정패와 부상이 주어진다. 한국여성문예원(1982년 개원)은 서울시 여성백일장, 문학강좌, 시낭송회, 문학기행 등을 열고 있는 여성들의 문학단체다.  

웹진 시인광장 대표 우원호는 김선우에 대해 "독특한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확실한 자기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씨는 이어 "자신이 여성임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듯한 이 여성시인은 자연과 생명의 근원인 여성의 몸을 강렬하고도 풍요로운 설화적 이미지로 풀어내는 성숙한 시 세계를 자랑한다"고 평했다.

좋은 운동가로 사는 것이 곧 좋은 문학가로서 사는 것

"저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붓다'와 '마르크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시인 김선우. 그는 1970년 강원도 강릉 끝자락, 당두마을에서 태어났다. 그 외딴 마을에서 그는 산과 바다를 뛰어다니며 버섯도 따고 조개를 캐며 자란다. 그리고 여덟 살 때 외딴 초가집에서 제법 도시 내음이 풍기는, 반듯한 기와집으로 이사를 한다.

그의 형제는 일곱이다. 딸 여섯에 아들(막내) 하나. 그가 넷째 딸로 태어난 사연도 여느 집안과 비슷하다. 중학생이던 큰오빠가 사고로 그만 세상을 떠나자 딸만 셋이었던 그의 어머니가 늦둥이 아들을 보겠다며 아이를 가진 것이다. 그 아이가 바로 그다. 그는 자라면서 둘째언니의 영향을 꽤 받았다.

그가 책에 빠져 들게 된 것도 둘째 언니 때문이다. 그는 둘째언니의 책을 읽으며 '그리스인 조르바'도 만나고, 시와 희곡도 만났다. 하지만 그보다 11살이나 많은 둘째언니는 그가 고3일 때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 그때 시인은 학승이 된 언니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가 '붓다'를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 싹 튼 것으로 어림짐작된다.

그가 마르크스를 만나게 된 것은 대학 2학년 때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학 1학년 때까지만 하더라도 장학금까지 받는 모범 대학생이었다. 하지만 2학년 때 운동권 학생이 되면서 수업에도 '가뭄에 콩 나듯' 들어간다. 수업에 들어가서도 지도교수와 자주 싸웠다. 그렇게 졸업한 그는 전국학생문학 조직인 '학생노동문학위원회'에서 1년 정도 일한다.

좋은 운동가로 사는 것이 곧 좋은 문학가로 사는 것이라고 여겼던 그. 하지만 그가 몸담았던 문예운동은 점점 내리막길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그즈음 그가 만난 곳이 <한국문학예술대학>이었던 같다. 그는 그때부터 쟁쟁한 문학평론가들로부터 문학이론을 갈고, 탁월한 시인들로부터 실제창작에 따른 열띤 토론을 벌인다.  

한 시대 시인 작가의 탄생은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이루어졌다. 김선우. 요즈음 그는 소설쓰기에 매달린다. 기왕 나선 김에 앞으로 장편소설 3~4권은 더 쓰겠다는 당찬 각오다. 그렇다고 시 쓰기를 그만 둔다는 것은 아니다. 붓다와 마르크스 사이를 오가듯 시 소설쓰기도 그렇게 하겠다는 투다.

다음은 용인작업실에서 글쓰기에 빠져 있는 시인 김선우와 전화로 나눈 일문일답이다.

"작가라고 하면 장르에 빠지지 말고 자유로운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본다"
▲ 시인 김선우 "작가라고 하면 장르에 빠지지 말고 자유로운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본다"
ⓒ 한국여성문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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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 올해의 작가'에 선정된 것을 축하한다. 수상소감은?
"일단 기쁘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가끔 한 번씩 상을 타는 일이 생기면 힘이 많이 난다. 가족들도 그렇고. 상을 탈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래도 주변 사람들이 저를 많이 응원해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글쟁이로서의 보람을 느낀다."

- 대학 다닐 때 운동권 학생이었지만 이념이 기울고 있을 때였다. 그때 경험이 지금 미치는 영향은? 
"이십대 초반을 지배한 화두는 당연히 혁명이었다.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자유케 할 것인가하는. 그 나이에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테지만,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내가 나를 자유롭게 할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여기까지 형성한 중요한 것들 중 하나는 이십대 초반에 내가 받아들였던 이념들이었다."

- 시와 소설의 경계는 무어라 생각하는가?
"둘 다 매력 있는 장르다. 저는 늘상 시인이 본업이라고 생각하지만 소설을 겸업하는 일에서도 자유스러운 시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장르 구분에 엄격한 편이지만 사실 외국의 경우에는 장르 구분이 거의 없다. 작가라고 하면 장르에 빠지지 말고 자유로운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본다."

아름다움 이해하지 못하는 권력은 오래 갈 수 없다

- 첫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점은?
"최승희에 대한 그 어떤 선입견부터 걷어버리고 보아야 한다. 최승희는 개인의 삶을 산 게 아니라 춤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최승희는 정치가도 경제인도 아닌 예술인이다. 춤꾼으로서 역사의 질곡 속을 춤으로 전력 질주하는 최승희, 20세기를 살면서도 21세기를 향해 나아가는 최승희야말로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우리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 예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름다움을 잘 모르는, 미학적 결함을 가진 사람들이 모든 것을 권력으로 짓누르려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권력이 폭력으로 뒤바뀌는 것도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권력은 결코 오래 갈 수 없다."

- 지금 우리 문학은 침체기에 빠져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돌파구가 있다면?
"독자들이 문학을 살리는 주체이다. 시 같은 경우는 소설보다 독자가 많지 않다. 독자 분들이 시인에게 힘을 불어넣어줘야 한다. 소설은 시와 다르다. 소설은 마케팅이나 광고 등에 책 판매가 좌우되기도 하지만 시는 다르다."

- 김선우 시인은 다른 시인에 비해 그나마 시집이 많이 팔리는 편이다.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저는 축복 받은 편이다. 시집은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술이 줄 수 있는 감동, 시가 줄 수 있는 감동을 독자가 더 잘 아는 것 같다. 시 독자는 솔직하다."

다음 소설 주제는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희망찾기

시인이자 작가 김선우는 1970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 시인 김선우 시인이자 작가 김선우는 1970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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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쓸 때 시 쓰기는 포기하는가?
"지난 1년 동안은 시를 일체 발표하지 않았다. 문예지들의 수레바퀴에 따라 끌려 다니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1년 정도 쉬다 보니까 그동안 소설쓰기에 짓눌려 있었던 시들이 마구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요즈음은 시를 발표하고 있다. 시 발표가 어느 정도 끝나면 바로 소설쓰기에 들어갈 생각이다."

- 다음 소설에는 어떤 내용을 다루려 하는가?
"다음 소설에도 인물 이야기다. 주인공은 이미 정했다. 소설 내용은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희망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현대인 내면의 희망 찾기다."

- 앞으로의 계획은?
"열심히 글을 쓰는 일이다. 시 쓰고 소설 쓰는 것 그밖에 달리 할 일이 없는 것 같다."

시인이자 작가 김선우는 1970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가 있다.

산문집으로는 <물 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의 사물들> <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이 있고, 동화 <바리공주>가 있다. 대산문화재단 문학인창작지원금, 현대문학상, 천상병시상 받음.


태그:#시인 김선우, #나는 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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