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가까워오면서 한동안 찾지 못했던 조상의 무덤을 찾아 벌초를 하고 절을 올리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지구에 있는 여러 나라 중 아마 우리나라처럼 조상을 깍듯이 받들어 모시는 나라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룰 때 '신주 모시듯'이란 말까지 있겠는가.
유교사상이든 불교사상이든 그 어떤 이념을 떠나, 조상을 깍듯이 받들어 모신다는 것은 나와 가족의 뿌리를 찾고 흘러간 역사를 찾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에 매달려 살자는 뜻은 아니다. 오늘날 내가 있기까지 어떤 발자취가 있었는지 알아야 나를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했다. 흘러간 역사를 붙들고 '그때 이랬더라면 어땠을까'라고 아무리 억측을 부려도 한번 흘러간 역사는 되돌이킬 수 없다. 때문에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만약에'라는 가정을 단 시행착오를 더 이상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조상을 깍듯이 모시는 것도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의 삶을 보다 올곧게 살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1985년 1월8일 국보 제227호로 지정된 종묘 정전(서울 종로구 훈정동 1-2)도 마찬가지다. 이곳에 조선 역대 왕의 신위를 모시고 해마다 정해진 날에 제례를 올리는 것 또한 흘러간 역사를 챙기는 일이다. 그 역사를 이끌었던 왕들의 업적과 나라 수난사를 향불로 되새김으로써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길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겠는가.
노랑머리 파란 눈에는 종묘 정전이 어떻게 비칠까 7일(일) 오후 3시. 추석을 꼭 일주일 앞두고 종묘로 간다. 길라잡이(나)는 해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조상님 무덤을 찾아 벌초를 하고 절을 올렸다. 하지만 지난해와 올해에는 서울에 산다는 핑계로 창원과 진해에 있는 조상님 성묘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일요일 오전 내내 죄책감이 자꾸만 들었다.
이 시간쯤 가족과 친척들은 조상님 무덤과 무덤가 주변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벌초를 하고 있을 것이다. 가족과 친척들은 벌초를 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길이 너무 멀다고 벌초를 하러 오지 않은 길라잡이를 말도마 위에 올려놓고 '조상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게 무슨 시인!' 하며 못마땅해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괜히 온몸에 좀이 쑤시는 듯했다. 그렇게 집을 나서 찾아간 곳이 조선 역대 왕들의 신위를 모시고 있는 종묘 정전이다. 길라잡이가 종묘 정전으로 발걸음을 옮겨놓은 까닭은 이번 추석에는 내 조상님 뿌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뿌리까지 다시 한번 차분하게 더듬어보기 위해서다.
초가을이라 하지만 햇살은 아직 따갑다. 짙푸른 녹음이 짙게 드리워진 종묘 정전으로 가는 숲길 곳곳에는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카메라를 목에 건 외국인들 모습이 더 많이 눈에 띈다. 노란 머리칼에 파란 눈을 가진 저들은 종묘 정전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행여 이 나라 사람들은 미신에 너무 빠져 쓸데없는 공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나 않을까.
임진왜란 때 불 탄 종묘 정전, 광해군 때 새롭게 손질 사적 제125호 종묘는 토지와 곡식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사적 제121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시하고 있는 제례 공간이자 종묘제례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1995년 12월)된 찬란한 우리 문화유산이다. 그중 정전은 종묘의 중심 건물로 영녕전(보물 제821호)과 구분키 위해 태묘(太廟)라 부르기도 한다.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종묘는 1392년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1394년 10월28일 터를 닦기 시작해 태조 4년 1395년 9월29일에 새 궁궐과 함께 세웠다. 그때 종묘는 대실(大室)이 7칸이었으며m 대실 안에는 석실(石室) 5칸이 있었다. 그리고 익랑(翼廊, 대문의 좌우 양편에 이어서 지은 행랑)을 각각 2칸씩 이어 지었다.
이와 함께 공신당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 3칸, 서문 1칸을 짓고 담을 빙 둘러 쌓았다. 담 밖에는 신주 7칸, 향관청 5칸, 좌우 행랑 각각 5칸, 남쪽 행랑 9칸, 재궁 5칸을 지었다.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1395년 10월, 개성에 있었던 태조의 4대조인 목조와 효비, 익조와 정비, 도조와 경비, 환조와 의비의 신주를 모셨다.
종묘는 태종 때에 이르러 모습이 크게 달라진다. 태종은 정전 건물 양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온 동,서월랑(東西月廊)을 세우고, 종묘의 담 바깥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 공신당을 종묘 담 안 묘정(동쪽 계단) 아래로 옮긴다. 이와 함께 제기고와 재생방 등 부속건물을 지어 제례기능을 빠짐없이 갖춘다.
태종은 이때 향관 처소도 재전 동남쪽 낮은 곳으로 옮기게 하는 것은 물론 둘레 담과 하마비까지 세운다. 명종 때에는 정전 4칸이 더 만들어져 모두 11칸이 된다. 하지만 종묘 정전은 불행히도 임진왜란 때 불타게 된다. 종묘는 그 뒤 선조 1608년(41년) 1월에 공사를 다시 시작해 5개월 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완공된다.
종묘 정전은 이때에도 11칸이었다. 하지만 영조 2년, 1726년에 4칸을 더 만들었고, 헌종 2년 1836년에 또다시 4칸을 더 늘려 지금의 19칸이 되었다. 정전은 조선시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태조 이성계의 4대조(목조, 익조, 탁조, 환조) 신위를 모셨다. 하지만 그 뒤부터 집권한 왕의 4대조(고조, 증조, 조부, 부)와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셨다.
왕은 죽어서도 백성을 부린다?우리나라 단일 건물로는 가장 길다(101m)는 종묘 정전 앞에 선다. 절로 '후우~' 소리가 나면서 갑자기 현기증이 인다. 까마득하다. 디카를 들고 이리저리 맞추어 보지만 워낙 건물이 길어 다 담기지 않는다. 정전 앞에 드넓게 펼쳐진 운동장만한 크기의 마당에 박힌 돌들도 눈을 무겁게 만든다.
누가 이 웅장한 건물을 지었을까. 이 건물 곳곳에 얼마나 많은 민초들의 피땀과 땅이 꺼지는 한숨이 박혀 있을까. 왕들은 죽어서도 살아 있는 백성들을 제멋대로 부려먹는 재주가 있는 것일까. 문득 수평선처럼 쭈욱 뻗은 하얀 용마루 위에 그때 이 건물을 지은 백성들의 한이 따가운 가을햇살이 되어 우수수 쏟아지고 있는 듯하다.
'후우~' 다시 한 번 한숨을 포옥 내쉰 뒤 정전을 똑바로 바라본다. 조선 역대 왕들의 신주를 모신 곳이어서 그럴까. 정전 기둥과 19칸의 나무에는 화려한 단청 대신 붉은색이 칠해져 있고, 마무리 부분에만 녹색이 칠해져 있다. 지붕은 홑처마에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며,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하게 튀어나온 배흘림이다. 정문 3칸은 정남쪽에 있다.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지금 정전에는 조선시대 19분의 왕과 왕비 신주를 각 칸을 1실로 하여 모두 19개의 방에 모시고 있다. 하지만 한 시대를 거머쥐고 뒤흔든 왕과 왕비의 신주를 실제로 볼 수는 없다. 문화재청 종묘관리소에서 일반인들의 정전 출입을 엄격하게 막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정전에는 서쪽 제1실에서부터 태조와 왕비, 태종과 왕비, 세종과 왕비, 세조와 왕비, 성종과 왕비, 중종과 왕비, 선조와 왕비, 인조와 왕비, 효종과 왕비, 현종과 왕비, 숙종과 왕비, 영조와 왕비, 정조와 왕비, 순조와 왕비, 문조와 왕비, 헌종과 왕비, 철종과 왕비, 고종황제와 황후, 순종황제와 황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죽은 왕에게도 1등과 2등, 꼴찌가 있는 것일까죽은 왕들을 모신 저승의 공간에도 1등과 2등, 꼴찌가 있는 것일까. 왕들의 순위는 누가 정하는 것일까. 조선시대 왕들의 신위를 순서대로 읽고 있으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정전에는 정종과 문종, 단종, 예종, 연산군, 인조, 명종, 광해군의 신위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종묘 정전을 새롭게 세운 왕이 아닌가.
예로부터 성공하면 혁명이요, 실패하면 반역이라 했다. 실록은 승자 위주로 기록된다. 제 아무리 한 시대를 이끈 뛰어난 지도자라 해도 당파싸움에서 희생당하는 그 순간 폭군으로 바뀌고 만다. 그래서일까.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그 어디에도 없다. 한때 폐위되었다가 숙종 때 복위된 단종의 신위와 정전에 없는 왕들의 신위는 모두 영녕전에 모셔져 있건만.
연산군과 광해군. 이 두 왕은 모두 중종반정(연산 12년, 1506)과 인조반정(광해 15년, 1623) 때 왕위를 잃은 슬픈 군주들이다. 이 두 왕에 대한 평가는 아직까지도 실록에만 기대고 있을 뿐, 그 진실을 속속들이 밝힌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광해군에 대해서는 '보수세력에 밀려 개혁에 실패한 군주' 쯤으로 알려지고 있다.
역사는 흐른다. 역사는 흐르면서 그 어떤 진실을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면 감추어졌던 역사의 진실이 새롭게 밝혀지기도 하지만 엄청난 거짓 속에 짓눌려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진실도 있다. 때문에 후손들이 문화유산을 거울삼아 역사의 진실을 낱낱이 비춰보고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