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잠든 새벽밤 찌르르 우는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끼는 9월입니다. 가을은 가을인데 한낮엔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며 따가운 햇살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녁쯤엔 선선한 바람이 오늘 흘린 땀을 살며시 식혀주고 친한 친구들과 어디 가까운 한강둔치나 풀밭에 앉아 맥주 한 잔에 조용히 담소를 나누며 가을의 정취를 느끼고 싶은 때이기도 합니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깊어져가는 가을밤의 흥을 느끼고 싶었던 9월의 어느날, 설레는 마음으로 뮤지컬 <대장금>을 보고 왔습니다.
일단 처음 들어가는 순간 고궁 주위를 은은하게 빛나게 하던 조명들에 안구 정화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고궁에 들어서기 전만 해도 종로 일대의 현란하고 어지러운 조명에 눈이 어지럽고 정신이 없었는데 우아하게 빛나는 경희궁 숭정전의 자태에 눈이 맑아지는 느낌이랄까. 오묘한 빛의 향연이 공연을 보는 내내 오늘 내 눈이 제대로 포식하는 날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공연장에 들어가면 흰색 티를 입은 어린 도우미친구들이 친절하게 안내해 줍니다. 아르바이트생인지 서포터즈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언젠가 이런 무대를 만들 미래의 꿈나무들이겠죠. 풋풋한 친절함에 괜시리 기분이 더 좋아지던군요. 들어가 보니 빈자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여기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의자에 푹신푹신한 방석이 깔려져 있더군요. 그냥 의자만 배치해 놨으면 딱딱하고 차가운 의자에 다소 불편함을 느꼈을 것 같은데 PMC프로덕션의 세심한 배려에 편안하게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또 무대 양 옆으로는 한글과 영어 자막이 동시에 나와서 공연보다가 대사가 잘 안들리거나 이야기의 흐름을 놓칠때 살짝살짝 볼 수 있었던 점도 좋았습니다.
드디어 공연 시작! 배우들이 나오는 순간 "오, 뷰티풀!"을 외치며 감탄사를 연발했던 게 '의상'이었습니다. 멀리서만 봐도 한복의 옷감에서 느껴지는 샤라락 소리가 들려오는 듯 그 실루엣과 흘러내림이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또 절제미와 단아함을 잘 살린 색감이 은은한 조명빛에 반사되어 연못에 떠있는 꽃잎들이 아롱아롱거리는 듯했습니다. 새삼 한복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선선한 가을바람에 배우들의 청명한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여기가 무릉도원이구나 싶었습니다.
뮤지컬 <대장금>은 대중적인 코드를 많이 갖고 있는 뮤지컬이었습니다. 그 대중적인 코드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쉽게 동화되고 내용에 몰입할 수 있는걸까 골똘이 생각해 보니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우리 민족 특유의 한(恨)이라는 정서와 그 한을 승화하는 과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는 겁니다.
주인공 서장금은 가슴 속에 맺힌 게 많은 여자입니다.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 때 미천한 신분의 여자에다 고아였으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게 된다는 운명을 타고났으니 가슴 속에 절절히 맺힌 한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장금이는 무기력하게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자신의 서글픈 인생에 대해 탄식하고 원망하기보단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며 한이라는 감정을 고차원적으로 승화시켜나갑니다. 사랑하는 남자를 가슴 속에 품은 채 의원의 길을 위해 세상속으로 나아가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그래서 더 감동적으로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음악, 안무,의상, 내용 등 전체적인 면에서 현대적인 세렴됨과 옛것의 맛깔스러움이 잘 어울러진 뮤지컬이었습니다. 2008년 가을밤 사랑하는 이와 뮤지컬 대장금을 보며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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