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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들대로 즐기고 들쥐는 들쥐 나름대로 재미있게 살면 되지 않을까요.'

- <밤의 거미원숭이> 서문중

 

무리지 않나 싶다. 명절날 책을 읽다니. 그것도 한 집안의 며느리라는 처지에서는 언감생심 '택'도 없는 소리다. 

 

집안청소, 장보기부터 시작하여 음식준비, 식사준비, 차례상준비, 성묘, 손님치레…. 이 바쁜 명절연휴에 독서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아니, 어울리지 않다기보다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명절연휴가 끝나고 난 뒤 방 한구석에 싸늘하게 내팽겨쳐있는 책을 펼쳐들곤 했다. 명절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읽었던 책이다.

 

모서리가 세모로 접어있는 책장을 펼쳐드면 언제 읽었나싶게 까마득하다. 수평선보다도 더 까마득하고, 아주 오래 전에 연락이 끊긴 동창만큼이나 서먹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올해는 어떻게 하면 명절날 책을 놓지 않고 지낼 수 있을까 궁리했다.'명절 연휴, 며느리도 독서를 할 수 있다'라는 오기가 발동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감각을 잃지 않기위해서다. 며칠씩 책을 읽지 않으면 연휴가 끝나고 난 뒤에도 책을 읽기가 좀처럼 쉽지않기 때문. 올해 명절에는 단 몇줄의 글이라도 보겠다고 결심했다.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했다. 어렵거나 난감한 책은 곤란하다. 골똘히 생각을 해야 하거나 메모하거나 밑줄 긋는 책도 난감하다. 그렇다면 대충 소설과 수필류로 그 범위가 좁혀진다. 그러나 소설도 호흡이 긴 장편소설은 제외다. 너무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소설은 차라리 고문이다.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책을 억지로 떼어놓아야 하는 그 고통은 명절을 원망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만난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단편소설 <밤의 거미원숭이>는 이런 복잡한 요구조건에 아주 딱 들어맞는 책이다. 이 책을 보는 순간 '딱이다' 싶었다. 첫째, 우선 호흡이 짧다. 물론 하루키의 수필은 대부분이 짧고 경쾌하다. 하지만 이것은 수필도 아닌 소설이다. 그러나 말이 소설이지 200자 원고지로 3~4장 분량 정도 되는 '초단편소설'이다. '엽편소설'보다도 더 짧은 분량이다.

 

커피 마시는 5분 이면 두 세 편 읽을 수 있다

 

작품에는 하루키만의 엉뚱하고 발랄한 상상력과 위트가 작품 전체에 배어있다. 마블링이 잘 된 고기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한편을 읽는데 1분이면 족하다. 워낙 문장이 쉽기도 하고, 내용도 무겁지 않기 때문에 쉽게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안자이 마즈마루의 삽화까지 곁들여 있어 책도 술술 넘어가고 눈도 즐겁다.

 

둘째, 별 내용이 없다. 머리 아프게 생각해야 할 주제도, 은유에 내포된 상징적인 의미같은 것을 골치아프게 헤아릴 필요도 없다. 그냥 즐겁게 읽으면 될 뿐이다. 물론 그 안에 담긴 심오한 의미를 헤아리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굳이 말릴 필요는 없다.

 

이 책에 수록된 36편의 글들은 그냥 한번 쓱 웃게 하기도 하지만 때론 머리를 갸우뚱하게도 한다. 한방울의 향수처럼 인상적이고 강렬한 맛도 있지만 맨숭맨숭 심심한 것도 더러 있다. '나는 왜 이 작품이 이해가 안되지?'라거나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일까'하고 끙끙댈 필요는 없다. 그런 것은 그냥 넘기고 재미있는 작품을 골라서 읽으면 된다. 하루키의 엉뚱발랄한 상상력에 기꺼이 동참하면 된다.  

 

그러나 '메시지'에 집착하는 독자에게 이 책은 난감한 존재다. 사실, 나도 읽고난 후 무슨 내용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있다. 줄거리 대신 이미지가 충만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비록 줄거리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읽고난 후 마음은 조금 가볍고 발랄하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시선을 조금 위로 '붕' 뜨게 해주기 때문이다.

 

하루키도 '노동'할 때 쉬엄쉬엄 이 글을 썼다는데

 

사실 이 책은 하루키가 그의 장편소설 <태엽감는 새>를 쓰는 도중 간간이 쓴 글들이다. 하루키 자신도 너무나 힘겹게 썼다고 얘기하고, 많은 독자들도 어렵다고 손꼽는 <태엽감는 새>를 집필하는 도중, 그는 이 글들을 씀으로써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중압감도 이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하루키도 노동할 때 쉬엄쉬엄 이 글을 썼다는 말 아닌가. 어쩐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전을 부치고 난 뒤 빳빳햇던 허리도 필 겸, 느끼한 기름냄새도 좀 지워버릴 겸 이번 명절에는 <밤의 거미원숭이>와 좀 느긋하게 노동절을 즐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커피 한 잔 마시는 5분 동안이면 두 세 편의 작품을 충분히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두부처럼 담백한 글들이 마음의 기름때까지 닦아주리라 기대해 본다. 이렇게 명절날 책을 볼 수 있다니. 역시 아무리 명절증후군, 명절울렁증이 막강하다하더라도 '우리는 우리들대로 즐기면 되는' 것 아닌가.  


밤의 거미원숭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문학사상사(2008)


태그:#무라카미 하루키, #밤의 거미원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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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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