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월스트리트가 금융 위기에 휩싸이면서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제의 핵심이었던 '규제 완화' 목소리가 미 대선전에서 싹 사라졌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것은 결국 제대로 된 규제와 감시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퍼지자 버락 오바마와 존 매케인 모두 미 금융 시스템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자유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적극 반대해왔던 매케인 후보는 갑자기 '규제 강화론자'로 돌아서 시류에 따른 표변이 너무 심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아무튼, 이번 미국의 금융 위기는 규제 완화를 만병통치약으로 여기고 있는 이명박 정권과 한국 보수들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섯달 만에 변신한 매케인... 규제철폐 법안 찬성했는데
<워싱턴포스트>는 17일 "매케인은 10년 전 은행과 보험사의 경계를 허무는 법안에 적극 찬성하면서 '규제 완화가 경제 성장을 촉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며 "그러나 지금은 '월스트리트의 규제받지 않은 탐욕과 부패가 현재 위기를 발생시켰다'고 공격하면서 '규제 옹호론자'로 변신했다"고 꼬집었다.
매케인은 올 3월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항상 규제 완화에 찬성해왔다, 불필요한 정부 규제를 없애버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02년 초고속 인터넷 시장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그는 1990년대에 모든 정부 규제의 기능을 중단시키는 법안 제정 시도에 적극 찬성했다. 1996년 통신 산업에 대한 탈규제가 불충분하다며 통신법에 반대했던 5명의 미 상원 의원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99년 매케인은 다른 공화당 의원들과 함께 은행·보험사·투자회사 간의 장벽을 허무는 법, 이른바 그램-리치-빌리 법 통과를 위해 맹렬하게 활동했다. 미국은 대공항기인 지난 1933년 은행·투자중개사·보험 회사의 교차 소유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램-리치-빌리 법으로 이 장벽은 철폐됐고 상업은행과 투자 은행끼리의 합병을 위한 길이 열렸다. 이 법의 발의자 가운데 하나였던 필 그램은 매케인의 경제 참모이기도 하다.
그램-리치-빌리법에 따라 생명보험사인 AIG는 전 세계 은행과 투자 시장에 참여할 수 있었고, 리먼브라더스도 급성장을 했지만 동시에 현재 문제가 된 각종 불량 채권도 가지게 됐다.
결국 AIG는 미 정부로부터 850억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아 살아남았지만, 리먼 브러더스는 파산했고, 메릴린치는 헐값에 뱅크오브아메리카(BOA)로 넘어갔다. 그램-리치-빌리법은 현재 금융 위기를 발생시킨 주범 가운데 하나인데, 매케인은 이 법에 의해 만들어졌던 야심과 탐욕, 그리고 이를 추구했던 경영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금융 위기가 노골화하자 매케인은 "경영자들은 끝없이 쉽게 돈 벌기를 추구했고, 미 행정부의 각종 규제 관련 기관들은 평소 감시를 소홀히 했다"며 "이 기관들은 흩어져 있고 집중적이지 못하고 비효율적이다"라고 비난했다. 그는 "이번 사태는 정부의 실패이자, 규제기관의 실패"라는 말도 했다.
매케인은 TV 광고를 통해 월스트리트를 개혁하겠으며 공정함과 정직이 살아있는 새로운 규제를 만들겠다고 공언하고 있는데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내놓고 있지 못하다.
오바마, 금융 위기 반사이익... 그러나
매케인에 비해 오바마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다. 그 자신이 평소 방만한 자유방임경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한 예로 매케인의 홈페이지에는 경제 규제와 관련한 내용이 전혀 없지만 오바마의 홈페이지에는 올 3월부터 금융 시스템 규제와 관련한 정책이 올려져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 전 금융 관련 기관에 대한 기본적인 감시 권한 부여 ▲금융 위기를 예상하고 정부에 보고하는 금융 시스템 감시 위원회 설립 ▲서로 임무가 상충되는 각종 규제 기관의 효율적인 통합 등의 내용이다.
그러나 민주당과 오바마 역시 규제 완화 논란에서 자유스러운 것은 아니다.
미 민주당 상원 원내 총무인 해리 라이드 의원은 지난 16일 그램-리치-빌리 법을 면밀히 검토해 폐기하거나 수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라이드 자신은 1999년 이 법에 찬성했다. 현재 오바마의 러닝메이트인 조 바이든 의원도 찬성했으며, 무엇보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민주당 소속 빌 클린턴은 이 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서명했다. 그램-리치-빌리 법 발의자 가운데 하나인 짐 리치는 법안이 제정될 당시에는 공화당 소속이었지만 지금은 오바마의 지지자다.
미 <워싱턴 포스트>의 칼럼니스트인 로버트 새무얼슨은 18일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세계 금융의 중심인 월스트리트가 공포와 탐욕의 무게에 눌려 무너지고 있다"고 했다.
이런 공포와 탐욕을 잉태한 책임에서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엮여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규제 완화'였고, 규제 완화에 반대하는 것은 마치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사고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아무튼 현재 금융 위기가 공화당 정권하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오바마는 반사이익을 얻고 있다.
17일 <로이터통신>과 여론조사기관 조그비의 공동 여론조사에 따르면, 오바마가 47%의 지지도를 얻어 45%를 얻은 매케인을 살짝 앞서고 있다. 미 <CBS>와 <뉴욕타임스>의 공동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오바마는 등록 유권자들 가운데 48%를 얻어 43%를 얻은 매케인을 5% 포인트 차로 앞섰다.
매케인은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던 지난 15일 "우리 경제의 펀더멘틀은 튼튼하다"고 발언했다가 오바마 쪽으로부터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우리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인가"라고 역공을 당하는 등 금융 위기 대처에 있어 혼란상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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