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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녕전은 정전(국보 제227호)에 모시지 못하는 왕과 왕비, 죽은 뒤 왕위에 오른 왕과 왕비들 신주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 영녕전 영녕전은 정전(국보 제227호)에 모시지 못하는 왕과 왕비, 죽은 뒤 왕위에 오른 왕과 왕비들 신주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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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저승길이 멀다 해도 문 밖이 저승', '저승 가는 길에는 순서가 없다'고 했다. 삼라만상이 모두 이승에 태어난 순서에 따라 저승으로 간다면 죽어가는 사람이나 살아남은 사람이나 슬픔은 그나마 덜 할 것이다. 하지만 저승은 이승에 태어난 순서를 따지지 아니하고 어느 날 문득, 갑자기 찾아온다.

어떤 생명은 이승의 빛조차 못보고 저승으로 곧바로 가는가 하면 어떤 생명은 사고, 질병, 천재지변 등으로 새파란 나이에 저승을 맞이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참으로 불공평한 것이 삶과 죽음이다. 어떤 이는 빈둥빈둥 놀면서도 편안한 삶을 오래 즐기는가 하면 어떤 이는 이 세상 고생이란 고생은 다 짊어진 사람처럼 아등바등거려도 힘겨운 삶을 짧게 산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저승에는 등급이 없다. 하지만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에게도 등급을 매긴다.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남긴 업적에 따라 새로운 지위를 내리기도 하고, 그 신주를 모시는 장소도 달리 한다. 신주를 모시다가 저승집이 꽉 차면 기둥과 지붕을 이어 붙이기도 하고, 아예 새로운 저승집을 짓기도 한다.

종묘 영녕전은 '저승(정전)이 꽉 차 따로 지은 작은 저승집'이다. 조선시대 죽은 왕들이 사는 저승의 별채쯤으로 여겨지는 영녕전은 정전(국보 제227호)에 모시지 못하는 왕과 왕비, 죽은 뒤 왕위에 오른 왕과 왕비들 신주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한 마디로 저승(정전)에서 작은 저승으로 밀려난 왕가들의 별묘라는 그 말이다.       

영녕전을 꼭꼭 숨기고 있는 대문 기둥에는 빛이 약간 바랜 빨강 파랑 노랑 태극무늬가 예쁘게 박혀 있다
▲ 영녕전 대문 기둥에 있는 태극문양 영녕전을 꼭꼭 숨기고 있는 대문 기둥에는 빛이 약간 바랜 빨강 파랑 노랑 태극무늬가 예쁘게 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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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월8일 보물 제821호로 지정된 종묘 영녕전
▲ 영녕전 1985년 1월8일 보물 제821호로 지정된 종묘 영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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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도 왕과 왕비 대접 못 받았는데 죽어서도...

7일(일) 오후 3시. '조선시대 죽은 왕과 왕비들의 천국' 정전을 둘러보고 창경궁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종묘 영녕전(宗廟 永寧殿,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2-1). 1985년 1월8일 보물 제821호로 지정된 종묘 영녕전은 정전에서 쫓겨난 서자처럼 정전 서북쪽에 엉거주춤 서서 정전을 곁눈질하고 있다. 

영녕전을 꼭꼭 숨기고 있는 대문 기둥에는 빛이 약간 바랜 빨강 파랑 노랑 태극무늬가 예쁘게 박혀 있다. 영녕전 안으로 들어서자 촘촘촘 박힌 널찍한 돌마당을 물고 있는 초록빛 예쁜 잔디밭에 까치 몇 마리 앉아 초록빛을 열심히 쪼고 있다. 길라잡이가 가까이 다가가자 까치 몇 마리 서너 번 통통통 튀더니 이내 초록빛을 물고 정전 쪽으로 날아간다. 

까치 몇 마리 날아간 푸르른 하늘엔 햇살이 유리가루처럼 하얗게 부서져 내리고 있다. 눈이 부신다. 마치 영녕전에 모시고 있는 왕과 왕비들의 혼백이 따가운 햇살이 되어 정전을 향해 수없이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다. '살아서도 왕과 왕비 대접을 제대로 못 받았었는데, 죽어서도 대접을 이 따위로 할 수 있느냐' 따지는 것처럼.

영녕전 앞에 선다. 영녕전은 정전과는 달리 가운데 건물이 볼록 솟아올라 양쪽 건물을 날개처럼 펼치고 있다. 전체 건물보다 약간 높게 지은 이 가운데 건물에는 방이 4개 있다. 그 방에 조선 태조 4대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와 왕비들 신주가 있다. 이는 조선을 세운 태조의 조상들이니 더 높이 받들겠다는 뜻이다.  

그 곁, 서쪽 5번째 방부터 16번째 방까지 정종과 왕비, 문종과 왕비, 단종과 왕비, 덕종과 왕비, 예종과 왕비, 인종과 왕비, 명종과 왕비, 원종과 왕비, 경종과 왕비, 진종과 왕비, 장조와 왕비, 의민황태자(영친왕)와 태자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하지만 신주를 직접 볼 수는 없다. 그저 굳게 닫힌 방문과 안내자료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떡여야 할 뿐이다.

영녕전은 정전과는 달리 가운데 건물이 볼록 솟아올라 양쪽 건물을 날개처럼 펼치고 있다
▲ 영녕전 영녕전은 정전과는 달리 가운데 건물이 볼록 솟아올라 양쪽 건물을 날개처럼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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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건물보다 약간 높게 지은 이 가운데 건물에는 방이 4개 있다
▲ 영녕전 전체 건물보다 약간 높게 지은 이 가운데 건물에는 방이 4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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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한가?

서글프다. 누가 왕들에게 등급을 매겼을까.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어디로 간 것일까. 정종과 문종, 단종, 예종, 인종, 명종은 정전에 있는 왕들에 비해 무엇이 얼마나 다를까. 덕종, 원종, 경종, 진종, 장조는 또 어떻게 죽은 뒤에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을까. 이 모두 왕과 왕비를 둘러싼 세도가들의 권력 암투과정에서 빚어진 일이 아니겠는가.    

정전은 사실 종묘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왜? 지금 우리가 종묘라 부르는 곳에는 처음 영녕전은 없고 정전만 있었으니까. 하지만 세종 원년, 서기 1419년 조선 2대 왕 정종이 승하하자 정종의 신위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가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다. 종묘에는 이미 태조의 4대조(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태조의 신위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정종의 신위를 정전에 모시게 되면 목조의 신위를 모실 수 없게 된다. 이때 조정에서는 "그 신주(정종)를 묻어 버린다는 것은 정말 차마할 수 없는 일이며, 또한 간직할 만한 곳도 없다"고 의견을 모은다. 이와 함께 중국 송(宋)나라에서 별묘였던 사조전(四祖殿)을 세워 4조를 모시는 예를 받아들인다.

"조종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을 가진 영녕전(세종 3년, 서기 1421년 10월)은 이렇게 세워진다. 그때부터 별묘인 영녕전은 '조묘'라고도 불렀다. 영녕전을 처음 세웠을 때에는 태실(太室) 4칸과 양옆 익실(翼室) 각 1칸을 합쳐 모두 6칸이었다. 영녕전이 세워지자 조정에서는 그해 12월 목조의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긴다.

그때부터 정전에는 익조의 신위를 제1실에 모시고, 도조 환조 태조의 신위를 차례로 모신다. 이어 세월이 흐르면서 정전에 모셔야 할 왕의 신위가 자꾸 늘어나면서 정전 또한 계속 늘려 짓는다. 이와 함께 신위 또한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옮겨 모시기 시작하면서 종묘는 정전과 별묘인 영녕전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서쪽 5번째 방부터 16번째 방까지 정종과 왕비, 문종과 왕비, 단종과 왕비, 덕종과 왕비, 예종과 왕비, 인종과 왕비, 명종과 왕비, 원종과 왕비, 경종과 왕비, 진종과 왕비, 장조와 왕비, 의민황태자(영친왕)와 태자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 영녕전 서쪽 5번째 방부터 16번째 방까지 정종과 왕비, 문종과 왕비, 단종과 왕비, 덕종과 왕비, 예종과 왕비, 인종과 왕비, 명종과 왕비, 원종과 왕비, 경종과 왕비, 진종과 왕비, 장조와 왕비, 의민황태자(영친왕)와 태자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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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프다. 누가 왕들에게 등급을 매겼을까
▲ 영녕전 서글프다. 누가 왕들에게 등급을 매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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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녕전 안으로 들어서자 촘촘촘 박힌 널찍한 돌마당을 물고 있는 초록빛 예쁜 잔디밭에 까치 몇 마리 앉아 초록빛을 열심히 쪼고 있다
▲ 영녕전 영녕전 안으로 들어서자 촘촘촘 박힌 널찍한 돌마당을 물고 있는 초록빛 예쁜 잔디밭에 까치 몇 마리 앉아 초록빛을 열심히 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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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군과 폭군은 누가 만드는 것일까

저승에서도 큰집에서 당당하게 큰 소리 치지 못하고 작은 집으로 밀려난 왕과 왕비들 신위가 모셔져 있는 영녕전. 영녕전 앞에 서서 역사가 드리워놓은 어둔 그림자를 차분하게 더듬는다. 서울시 안내자료에 따르면 영녕전은 선조 25년, 서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전과 함께 불에 타고 만다.

선조는 이에 41년, 1608년 1월에 정전을 고쳐 짓는 공사를 시작한다. 이어 5개월 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정전 공사가 매듭지어진다. 그때 정전은 4칸, 좌우 협실 각 3칸을 합쳐 모두 10칸이었다. 영녕전은 한참 뒤인 헌종 1년, 서기 1835년 10월 종묘영녕전증수도감을 설치되면서 고쳐 짓기 시작, 지금의 모습인 정면 16칸, 측면 4칸으로 탈바꿈된다

영녕전과 정전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우선 제례를 모실 때 정전보다 한 단계 낮게 지내며, 건축 크기나 앞마당도 정전보다 적다. 하지만 태조의 4대조를 모신 건축물은 정전의 크기와 높이가 같다. 이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4대조는 정전에서 모시고 있는 왕과 왕비들과 위상이 같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영녕전의 특징은 정전에는 있는 공신당과 칠사당이 없다는 점이다. 까닭은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와 익조, 도조, 환조는 죽은 뒤에 왕위에 오른 왕이므로 신하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녕전에 모시게 되는 그 이후의 왕들은 신하가 없는 태조 4대조가 있는 영녕전에 신하를 데리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살아서도 왕과 왕비 대접을 제대로 못 받았었는데, 죽어서도 대접을 이 따위로 할 수 있느냐'
▲ 영녕전 '살아서도 왕과 왕비 대접을 제대로 못 받았었는데, 죽어서도 대접을 이 따위로 할 수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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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
▲ 영녕전 "조종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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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의 작은 집 영녕전. 까치 열 댓 마리 12지신 상처럼 지붕에 앉아 있는 영녕전 앞에 서서 조선 왕들의 역사를 거슬러 오른다. 어느 왕이 백성을 하늘처럼 떠받든 성군이며, 어느 왕이 백성들의 숨통을 짓누르던 폭군이었을까. 성군과 폭군은 누가 만드는 것일까. 성군도 폭군도 모두 정치모리배들이 만들어낸 쓸쓸한 자화상이 아닐까. 


태그:#영녕전, #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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