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대단히 크고 놀라운 석불이네, 그런데 저 석불모양이 부부상처럼 보이지 않아?"

"정말 그러네요, 그런데 석불이 쓴 모자모양이 서로 다른 것이 이상하네요. 석불 하나는 둥근 갓을 썼는데 다른 석불은 왜 사각모자를 썼을까요?"

 

파주 용미리 쌍미륵석불입상 앞에서 아우와 아들이 동시에 놀라 탄성을 지릅니다. 지난 16일 경기도 파주지역 파주3현의 유적지 답사 중에 광탄에 있는 윤관장군묘를 둘러보고 나오다가 들른 용미리 쌍미륵석불입상 앞에서였습니다.

 

석불입상은 나지막한 산자락 숲속에 있었지만 높이가 17m나 돼 도로에서도 보였습니다. 도로에서 약간 비껴난 오솔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 올라갔습니다. 석불은 용암사라는 사찰마당 옆길로 난 계단을 100여개 오른 곳에 있었지요.

 

석불은 산자락 끝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를 조각하여 만든 것이었습니다. 두 개의 석불이 나란히 서 있는 옆에는 조각되지 않은 바위 한쪽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요. 크고 둥근 모자를 쓴 석불과 사각모자를 쓴, 조금 작은 석불은 정말 부부상처럼 정다워 보였습니다.

 

"저 둥근 모자를 쓴 큰 석불을 자세히 살펴봐 왼손으로 비파를 잡고 오른손으로 연주하고 있는 모습 같잖아?"

아우가 하는 말을 들으며 올려다 본 큰 석불은 정말 무슨 악기를 한손으로 잡고 다른 손으로 연주하고 있는 모습 같기도 했습니다.

 

 

"부부상이 맞는 것 같아요. 둥근 모자를 쓴 큰 석불은 이목구비가 투박한 모습이 남성적인데 사각모자를 쓴 석불을 보세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모습하며 매끈한 코와 갸름한 눈매와 입술 등 아주 여성적이잖아요?"

 

아들은 사각모를 쓴 석불을 자세히 설명하며 여성상이라는 것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며 비교해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모자만 다른 것이 아니라 석불의 얼굴모양도 하나는 남성상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분명히 여성상이었습니다.

 

마침 다른 관광객 몇 사람도 불상을 바라보며 우리들이 나누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맞장구를 쳤습니다. 석불 아래에는 연등과 함께 제단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장소가 비좁아 거대한 불상을 카메라에 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고려 13대 왕이었던 선종이 자식이 없어 걱정이 많았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후궁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에서 깬 후궁은 하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 오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

 

석불상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의 내용입니다. 이 전설로 인해 용미리 미륵불은 다산의 효험을 주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고 합니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 전설에 나오는 한산후는 선종과 원신궁주의 아들로서 선종의 뒤를 이은 현종의 동생입니다.

 

 

그러고 보면 전설에 나오는 선종이 후사가 없어 고민했다는 말은 사실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지요. 전설의 내용이 실제와 조금 다르기는 하나 이 전설은 이 석불입상이 세워지게 된 배경과 연대를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더구나 창건연대가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은 석불입상 아래에 있는 용암사의 역사를 미루어 알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하지요. 그 외에도 고려 선종 연대에 미륵사상이 폭넓게 성행되었음을 알 수 있는 문화사적인 가치를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석불은 자연의 바위절벽에 몸통을 새기고 그 위에 머리와 갓을 만들어 얹은 형태로 안동 제비원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단 두 곳밖에 없는 아주 귀중한 문화재입니다. 옛 신라의 고도 경주 남산에도 비슷한 형태의 석불들이 몇 개 남아 있긴 하지만 원형대로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지요.

 

더구나 이 용미리의 쌍미륵석불입상은 높이가 무려 17m로 규모가 매우 크고 두개가 나란히 붙어 있어서 문화적 가치도 더욱 높은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런 가치를 문화재청으로부터 인정받아 보물 제9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 석불입상은 전설처럼 고려 선종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조선 세조임금 때 만들어졌다는 학설도 있던데요."

우리들과 같이 안내판을 읽고 있던 40대 관광객이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럴 듯한 말이었습니다. 세조는 숭유억불정책을 폈던 그 시절, 그 누구보다 불교와 가까웠던 임금이잖아요?

 

그의 말에 의하면 이 지역에 사는 어느 향토사학자 한 사람이 석불 뒤에 새겨져 있는 희미한 글씨들을 정밀하게 판독해본 결과, 이 석불은 세조임금 때 만들어졌고, 석불도 세조임금과 정의왕후의 상이라는 것이었지만 더 이상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석불입상을 살펴보고 내려오는 길에 용암사를 둘러보았습니다. 사찰은 조용하고 아담한 모습이었습니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석탑 한 개가 세워져 있고 대웅전과 ㄱ자 형태로 요사체 겸 종무소로 쓰이는 건물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요사체 아래쪽에 서있는 범종각은 매우 운치 있는 모습이었지요. 마당가에는 작은 연못도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연못가에는 돌물병을 어깨에 멘 승려상이 있었습니다. 그 상은 귀엽고 해학적이어서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들었습니다.

 

 

마당가에 있는 좌대 위에는 돌거북도 만들어져 있었는데, 거북은 무병장수를 상징하는 동물이어서 상징적으로 만들어 놓은 듯했습니다. 우리일행이 사찰을 둘러보는 동안 그곳을 찾은 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돌거북을 바라보고 있을 때 승려 한 사람이 종무소에서 나와 마당으로 내려섰는데,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미소를 지었습니다. 용미리 쌍미륵석불입상과 용암사를 둘러보고 내려오는 오솔길 소나무 사이로 초가을답지 않은 뜨거운 햇볕이 따갑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쌍미륵석불입상, #용암사, #전설, #세조임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바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자.

이 기자의 최신기사100白, BACK, #100에 담긴 의미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