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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덮어버리고 싶을 만큼 솔직해서 당혹스러운 책들이 있다. 인권운동가 오창익이 쓴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이 그런 책이다. 두 달에 한 번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무료로 보내주는 잡지 <인권>을 보면서 늘 느끼는 점이 있다.

 

특별히 신념을 갖고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 자신의 입장이 아닌 부분에 대해서 인권을 챙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인권의 사각 지대에 놓은 사람들의 소식을 전해주는 잡지를 볼 때마다 느꼈던 부끄러움, 미안함, 당혹스러움 등을 책 한 권을 다 읽을 때까지 똑같이 느껴야 했다.

 

책에서 지적한 한국의 부끄러운 모습들은 한국이 꽤 잘 사는 나라임에 틀림 없지만, 필자에게 별로 살고 싶지 않은 나라로 느껴지게 하는 원인들이기도 하다. 

 

"이 책에 실린 한국의 모습들은 대부분 한국 사회가 '지양(止揚)'해야 할 모습들이다. 솔직히 다른 나라 사람들은 보지 않았으면 하는 대목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썼다. 물론 내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내 나름대로 표현한 것이다. … 굳이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잘하고 있는 것, 우리가 외국 사람들에게 내세울 만한 것들은 차고 넘치게 많다.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을 더 잘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지양해야 하는 것들을 살펴보는 일은 바람직한 작업이 될 것이다." (5~6쪽)

 

지은이의 말대로 내세울 것이 은근히 많은 나라지만 우리가 이 낯뜨겁고 부끄러운 기록을 읽어야 하는 까닭은, 자랑하고 싶은 것을 더 늘리고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은 나라가 되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간첩 색출 위해 만든 주민번호 내 아이도 만들어

 

이 책에 나온 이야기들은 이미 알고 있던, 그래서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부분들이 많지만, 처음 알게 된 내용들도 많다.

 

"간첩 색출이란 명분으로 태어난 주민등록증을 처음 갖게 된 박정희와 그의 부인 육영수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는 '100001'과 '200001'이었다. … 박정희의 주민등록번호는 '110101-100001'이었는데, 앞의 두 자리 11은 서울, 다음 01은 자하동을 뜻하고, 뒷자리의 1은 성별 구분을, 그 다음의 숫자는 주민등록을 한 순서를 뜻한다. … 번호를 매겨서 국민을 관리하는 나라, 그것도 번호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아서 관리하는 나라는 이 세상에 없다. … 우리는 여전히 간첩을 골라내기 위해 만든 숫자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31~33 쪽)


주민등록번호에 그런 역사적 배경이 있는 줄 몰랐다. 간첩 색출을 위해 만들었다는 시대적 한계를 인정한다고 해도, 여전히 통제 받아야 하는 신세가 황당하고, 어이없으며, 기분 나쁘다. 자국 국민을 그렇게 번호로 줄 세워 관리하는 나라라는 게 끔찍하고 무섭다. 아이를 낳은 뒤 한 달 이내에 주민등록번호를 발부 받도록 출생신고를 해야 했는데, 이 글을 읽고 나니 내 아이를 잠정적으로 간첩 색출의 대열에 끼워 넣은 것만 같다. 자식을 낳자마자 간첩 색출을 위한 번호 안에 등록시켜야 하는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김밥혁명'이라 부르던 것이 미안해지다

 

"한국에는 유독 24시간 영업을 하는 음식점 등 가게가 많다.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24시간 꼬박 영업하는 비결의 핵심은, 초저임금의 '알바'를 고용하는 데 있다. … 24시간 언제나 햄버거를 먹을 수 있는 편리함은 시급 3100원을 벌기 위해 졸린 눈을 비벼 가며 밤을 새는 가난한 집 청소년들의 희생에 기댄 것이다. … 많은 나라들에서는 노동을 보호하고 청소년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법률 체계를 갖추고 있다. 어린 학생들이 밤샘 노동으로 내몰려야 하는 나라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은 많은 나라들이 일찍이 깨달은 바다." (69~70 쪽)

 

워낙 김밥을 좋아하는 필자는 출출할 때마다 알루미늄 호일에 싸서 파는 1천원짜리 간식을 즐겨 먹으며, 그 가게 이름을 '김밥 혁명'이라 고쳐 부르곤 했다. 내게는 정말 '천국'보다 가까운 곳에서 벌어진 '혁명'같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재료를 넣으면서 어떻게 1천 원에 팔 수 있는지 궁금해 한 적은 없다. 그저 싸고 맛있다는 생각만 했을 뿐, 밤 새워 일하면서 김밥 세 줄 짜리 임금을 받는 사람들의 수고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미안한 일이다.

 

찾는 사람이 없으면 시장의 원리상, 자동적으로 퇴출 될 시스템이었을텐데, 나처럼 즐겨 찾는 이들 때문에 지하철 입구, 버스 정류장마다 성업하게 했으니 말이다. 누군가의 밤잠을 설치게 하고, 팔목 관절을 아리게 하면서 무조건 편하고 싸게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워했던 그악스러운 소비자였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되돌아보게 됐다. 지은이의 세심한 관찰과 지적이 고마울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눈에 밟힌 무서운 대목을 옮긴다.

 

"한국의 형사 사건 무죄율은 2005년 현재 0.18퍼센트이다. 곧 한국의 검찰은 형사 사건 피의자를 재판에 붙이면 99.82퍼센트 유죄를 받아 낸다는 것이다. … 무죄율이 매우 낮은 것은 기본적으로 법원이 검찰의 수사 결과를 너무 신뢰하기 때문이다. 검찰의 공소장과 전혀 다른 새로운 논리를 전개하며 판결문 쓰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판사들의 태도도 문제이다. … 어쨌거나 법원이 얼마나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 검찰이 99.82퍼센트의 순도로 일하고 있다고 보도 자료까지 내어 자랑하고 있을까. 한심한 일이다." (91~92쪽)

 

한국의 형사 사건 무죄율이 0.18퍼센트라는 말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 부분에 따르면 검사들이란 완벽한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실로 무서운 조직인 것이다. 판사들의 현명함을 기대하기란 힘든 나라인 것인지, 검사들의 노력이 정말 순도 99.82퍼센트짜리인지, 제대로 따져 묻고 싶은 부분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광고중단 누리꾼이나 촛불 시민들에게 보이는 검찰의 행동이 유독 자신감 있어 보이는데, 이 책을 보니 앞으로 남은 기간이 더 걱정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대화 자리에서 거칠 것 없이 '맞짱'뜨던 그들이기에 더 무섭다.

 

지은이는 책에 언급한대로 '십중팔구 한국에만 없는', 한국이 지향해야 할 '선진화'된 모습을 하루 빨리 책으로 묶어내주길 바란다. 좀 더 살기 좋은 나라, 나처럼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국민이 없는 나라가 되기 바란다면 말이다. 부탁이다, 얼른 후속편을 써주시길!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 - 인권 운동가 오창익의 거침없는 한국 사회 리포트

오창익 지음, 삼인(2018)


태그:#한국, #인권 , #검찰, #김밥, #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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