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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설악산 대청봉에 살얼음이 잡히고 대관령에 첫서리가 내렸다는 소식에 가슴이 금세 차가워옵니다. 이곳 화악산 뒷자락도 그곳 못지않게 첫서리가 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침 기온이 제법 싸늘한가 싶은데 여름내 고생이 많았던 허리께가 자근자근 저려오고, 손발이 시려옵니다. 행여 서리가 내린 건 아닌가 하고 배추밭을 한 바퀴 돌아봅니다. 하얀 이슬방울이 솟아오르는 태양아래 구슬처럼 반짝이다 또르르 굴러 내립니다.

산국 피어나면 첫서리 내릴 징조, 애기벌레도 영양보충을 하며 겨울준비가 한창입니다.
 산국 피어나면 첫서리 내릴 징조, 애기벌레도 영양보충을 하며 겨울준비가 한창입니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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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가을은 배, 대추, 감은 주렁주렁한데 산밤은 흉년입니다. 가을 아침이면 먼저 하는 게 밤 주우러가는 일인데 알밤 떨어지는 소릴 듣지 못하니 아침이 한가롭습니다. 돌배와 다래는 서리가 내려야 제 맛이 납니다.

경험상 그 때까지 놔뒀다가는 다람쥐와 산까치들이 모여들어 거의 단물을 빼먹기 때문에 딸까말까 망설이다 그냥 되돌아섭니다. 먹을 만큼 먹다 보면 사람 몫도 조금은 남겨놓겠지 하고 생각을 바꾸니 돌배향이 더욱 가슴을 파고듭니다.

금불초도 들국화 종류입니다.
 금불초도 들국화 종류입니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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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하던 아침 기운이 들판을 건너가고 햇볕이 온 산골짝을 내리 비치고 있습니다. 가을볕은 마실수록 숨쉬기가 편하고 잔잔히 숨결을 고르며 가슴을 파고듭니다. 말없는 가을빛, 보고 듣고 느낄수록 속마음을 말갛게 채워옵니다.

하얀 햇살 아래 맑은 공기를 따라잡으며 가을빛을 따라나섭니다. 가는 곳마다 햇볕이 풍요롭습니다. 내가 거둘 것은 부실하지만 절로 피었다 지는 들꽃들만 바라보아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산골짝마다 피어난 쑥부쟁이, 구절초, 금불초, 산국들의 모습이 더욱 짠하게 다가섭니다. 들국화하면 쑥부쟁이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가을이 시작되면 산골짝마다 지천으로 피어나 옛날이야기 나누자 합니다.

'쑥부쟁이'란 쑥을 캐러 다니는 불쟁이(대장쟁이) 소녀를 말합니다. 세월이 지나며 불쟁이의 'ㄹ'이 탈락되어 부쟁이가 되었습니다. 부쟁이 누나는 병든 어머니와 11명의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날마다 산과 들을 쏘다니며 쑥을 뜯어 연명했습니다.

연보라색 쑥부쟁이, 가을이면 옛이야기 나누자합니다.
 연보라색 쑥부쟁이, 가을이면 옛이야기 나누자합니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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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다쳐 쓰러진 노루를 치료해 노란구슬 3개를 선물로 받기도 하고, 깊은 함정에 빠진 사냥꾼을 구해 사랑의 약속으로 오랜 세월을 기다렸건만, 안타깝게도 사냥꾼은 유부남이 되어 돌아왔답니다. 야속한 사냥꾼, 대장쟁이 첫째 딸 부쟁이 누나는 절벽에 떨어져 불쟁이의 혼을 아직도 뜨겁게 불사르고 있건만….

쑥부쟁이의 꽃말은 '이별' 사냥꾼을 한없이 기다리는 순정의 들국화
 쑥부쟁이의 꽃말은 '이별' 사냥꾼을 한없이 기다리는 순정의 들국화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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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부쟁이 누나는 연보라색으로 피어나 노란꽃술을 가득 머금고 가을을, 아니 사냥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염없이 사냥꾼을 기다리는 순정의 풀꽃, 수줍기만 한 샛노란 얼굴, 아무리 목을 빼보아도 사냥꾼은 오지 않고 산  모퉁이 돌아 나온 구절초만 하늘거릴 뿐입니다.

보다 못한 구절초가 한마디 합니다. '이젠 그만 잊어, 그 사람은 유부남이야, 안 돌아와, 이 바보야.' '아냐, 우리 사냥님은 가을바람이 불면 꼭 온다고 했어, 돌아오기만 한다면 유부남이라도 상관없어, 기다릴 거야.' 가을바람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쑥부쟁이의 안타까운 모습에 구절초는 갑자기 아홉 개  뼈마디가 자근자근 더 저려와 산모퉁이를 다시 돌아갑니다.

구절초는 담홍색으로 피어나 흰색으로 변한다. 가지 끝에 한 송이씩 하늘을 향해 피어나고, 음력 9,9일에 채취한 구절초가 부인병에 효험이 크다고...
 구절초는 담홍색으로 피어나 흰색으로 변한다. 가지 끝에 한 송이씩 하늘을 향해 피어나고, 음력 9,9일에 채취한 구절초가 부인병에 효험이 크다고...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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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냘프고 키가 작아 더 찡한 누님 같은 꽃 쑥부쟁이, 꽃말은 '이별'입니다. 가을바람 불어와 고독과 슬픔 같은 것이 자꾸만 밀려오면 나도 잃어버린 이별을 찾아 산 속을 헤매야할까 봅니다. 

덧붙이는 글 | 북한강 이야기에서 '윤희경의 山村日記'로 다시 태어납니다.



태그:#쑥부쟁이, #구절초, #산국, #금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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