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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인 가이드는 우리를 조선인 위령비로 데리고 왔다. 그는 일본의 죄악에 대해 우리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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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16일(토)에서 23(토)까지 7박 8일 동안 기독청년아카데미와 기독교 사회 문제 연구원, 개척자가 주관한 "2008 한일 생명 평화 역사 기행"을 다녀왔다. 한일간의 역사, 평화의 문제.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생명의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를 고민하는 55명의 청년들이 모였다.

고난의 현장(석탄 박물관, 영생원, 오다야마 묘지), 우토로, 민족학교, 고베 생협, '쓰고 버리는 시대를 생각하는 모임' 등을 방문하며 우리의 삶에 어떻게 역사와 평화, 생명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시간을 보냈다.

고쿠라, 나가사키, 소또매, 오사카, 고베 등 일본 각지를 다니며 보고 배운 기행의 여정을 함께 나눈다. 이 글은 역사, 평화, 생명이라는 주제로 세 차례에 나누어 연재하며 시대를 고민하며 새로운 삶을 꿈꾸는 청년들의 여행 발자취를 따라가 볼 것이다. <기자 주>

한국과 일본 사이엔 대한해협이 있다. 일본에서는 '현해탄'이라 부른다. 하늘을 날아가지 않고선, 한국과 일본의 왕래는 이 검은 바다(현해탄의 뜻)를 거쳐야만 한다. 삼국시대 문물이 교류될 때도,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도, 일본강점기 수많은 유학생과 강제 징용당한 사람이 오갈 때도 항상 이 검은 바다를 통과했다.

'기독청년아카데미',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개척자'의 세 단체 청년 55명이 모였다. 생명과 평화, 역사라는 무게감 있는 구호를 가지고 일본으로 여행을 가는 우리도 이 바다를 건넜다.

대한해협은 거센 바다다. 그리고 많은 사연이 있는 바다다. 수천년 간 한국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라고 명명하신 함석헌 선생님의 이야기처럼 일본과 한국에 얽혀 있는 고난과 슬픈 사연은 이 바다를 통해 전해온다.

해방 이후 강제 징용당한 사람들이 그리운 고향 땅을 찾아 나섰다. 미나또라는 마을에서 모여 살았던 조선인들은 집도, 지갑도 모든 것을 내버려 둔 채 고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1945년 9월 17일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 '와까마츠 앞바다'에서 그들은 미꾸라자키 태풍을 만나 조난당하고 말았다. 해방의 기쁨과 고향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픈 희망 대신, 그들을 찾아온 것은 죽음이었다.

부산에서 본 바다는 그렇게 거세지 않았다. 그러나 한밤이 되어서야 만난 현해탄의 매서운 파도로 배가 무척이나 흔들렸다. 한 명 두 명씩 화장실을 찾아 구토를 했다. 배에서 맞이한 여행 첫날은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향하는 부관페리를 타고 깊은 밤을 지새우고 맞은 아침. 그러나 모두의 얼굴은 밝지 않다. 밤새 뱃멀미에 설잠을 잔 것이다. 피곤이 역력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다.

무거운 발걸음에, 강제 징용당해 일본에 온 조선인들의 발걸음이 과연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다. 미꾸라자키 태풍으로 삶의 희망이 불안과 공포로 돌변한 '영겁같이 느껴졌을 그 순간'이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내 발걸음은 조금 더 무거워져도 될 것 같았다. 우리가 겪은 부관페리에서의 시간은 어쩌면 신의 은총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으로 이 바다를 오갔던 무수한 이들의 고난과 시련의 삶을 조금이라도 체험하며 깨닫게 했으니.

고난의 현장 : 석탄 박물관, 영생원, 오다야마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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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갖 장비가 다 갖춰진 모형이 석탄 박물관에 서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저런 장비는 없었다. 저 장비가 오직 모형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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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에 대한 강제 연행이 시작된 것은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지면서이고,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그것은 가속화되었다. 일제는 전선의 확대에 따라 병력을 추가하면서 본국의 전시 산업을 뒷받침할 수 있는 토공, 직공, 광부와 같은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강제 연행된 조선인들은 노동 재해가 빈발한 장시간의 위험 지대에 배치되었고, 그 중 60%는 탄갱과 광산에서 일하게 되었다.

우리 여행팀의 첫 주제도 '기타 큐슈에 있는 탄광'과 관련된 곳이다. '석탄 박물관.'  기타 규슈에 있는 탄광 이야기를 기념하는 박물관이다. 원래 탄광의 노동은 죄인, 노예를 통해서 이루어졌단다. 이들이 살아가는 환경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열악했고 일하다 대부분 죽었다고 했다.

박물관은 석탄을 캐는 공정과 그 당시 여기서 힘들게 일했던 일본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된 그들의 죽음은 이렇게 위로받고 보상받을 수 있게 된다. 물론 충분한 보상과 위로는 아니지만.

그러나 이 지역 탄광은 조선인들 역시 강제로 끌려 와 일했던 곳이다. 그런데 그 박물관에서 조선인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가이드의 설명을 한 자도 놓치지 않은 채 주의 깊게 들었지만, 박물관 안에서 힘겹게 살았던 조선인 이야기는 찾을 수 없었다. 박물관을 나와 약간 떨어진 곳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야 조선인을 위한 조그만 '위령비'를 보게 되었다. 위령비가 있는 곳은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인데 가장 밑에서 일한 이들의 넋을 기리며 민단에서 20년 전 세운 비석이란다.

그러나 이곳으로 강제 징용된 조선인이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 몇 명이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여명'이라는 숫자 뒤에 붙여진 수식어는 인간의 생명이 추상적으로 표현되며 무시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일은 지금도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다.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 군인의 사상자 수는 철두철미하게 집계되지만 이라크에서 죽어간 무수한 민간인과 군인의 수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죽어서까지 차별당한 것이다. 살아서  존중받지 못했던 그들의 삶은 죽어서도 버려진 채로 남았다. 그들의 서글픈 삶을 어떻게 위로해 줄 수 있을까?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어떻게 함께 짊어질 수 있을까?

이들의 슬픔을 기리려고 일본 내에서도 인권운동이 지속되어 왔다. 우리가 방문한 영생원과 오다야마 묘지는 재일조선인들과 일본의 양심 있는 운동가들이 비극적이었던 역사와 대척하여 만든 소중한 유산이다.

규슈 지역과 홋카이도 지역은 채광을 비롯 석탄과 철광석 수송에 필요한 항만, 철도, 도로 등의 건설에 강제 투입된 조선인이 많았던 곳이다. 그런데 고된 노동 중 죽어갔던 그분들의 시신은 절간에서 제일 구석진 곳에 방치되거나 사과박스에 담겨 놓였다. 최창화 목사는 1973년 영생원을 마련하고 여기저기 떠도는 유골을 찾아내어 안치하였다. 그 당시 타가와 이이쯔카 등의 절에서 유골 157기를 가져왔다고 한다.

그 중 몇몇 유골은 그리운 고향을 찾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현재는 탄광 희생자 뿐 아니라 최창화 목사 부부와 재일 동포 유골 83주가 남아 있단다. 이 영생원은 멀리 동해가 보이는 언덕 위에 마련되었다. 고국을 그리워하는 망자들의 한을 위로하며 죽어서라도 고국을 향하고 싶은 그들의 마음을 담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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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생원엔 아직 83주의 분봉이 남겨져 있다. 그래도 그분들의 아픔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장소가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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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야마 묘지에 얽힌 이야기는 또 다르게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오다야마 묘지는 미꾸자라끼 태풍을 만나 죽었던 조선인들을 묻은 곳이다. 이들의 죽음은 36년 동안 까마득하게 잊혀졌다가 한 목격자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엄정난이라는 분은 송장이 되어 파도에 밀려온 시신들을 손수레에 담아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따라 1974년 진상 조사단이 결성되고 기타큐슈시에 부탁해 이들을 위한 묘지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1990년 이후 매해 9월 17일에서 제일 가까운 일요일. 이들을 위한 추도 집회를 한다.

석탄 박물관의 조선인 위령비도, 영생원도, 오다야마 묘지도 결코 화려하거나 돋보이는 곳에 있지 않다. 어느 것이든 일본인을 위한 기념의 장소 한 귀퉁이에 자리 잡았을 뿐이다. 처음엔 그 사실이 무척이나 서글펐고 어쩌면 이처럼 불공평할까 라고 한탄했다.

하지만 진정한 평화는 그 크기나 화려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화려한 기념비 귀퉁이에 놓인 자그만 위령비와 기념비, 묘지에는 외면으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의 크기와 깊이가 묻어 있다. 이것들은 패권적이고 파괴적인 역사에 대해 진실된 성찰과 반성이 없는 일본 정부의 역사에서 많은 조선인의 노력과 양심 있는 일본인의 투쟁이 이루어 낸 산물이다.

잘 보이지 않고 모르면 찾아갈 수 없는 그곳이 어쩌면 우리의 관심을 더 많이 유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들이 만들어진 험난한 역사만큼이나 우리의 관심과 애정을 애타게 기다리는 지도 모르겠다. 역사의 드러남은 자연스럽지 않다. 피나는 투쟁과 수많은 이들의 투철한 의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 역사와 대면할 수 있는 용기가 만났을 때 역사는 수면위로 드러난다. 그 드러난 역사는 우리를 기다린다.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다가와 꽃이 되었다던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우리의 기억 투쟁을 통해 그 사건은 진정한 역사가 된다.

평화는 소박함에 있다. 평화는 역사와의 진정한 만남에 있다. 그리고 평화는 그 역사를 끌어 안고 내 삶을 살아감에 있다. 그러나 여전히 또 다른 차원의 질문이 내게 엄습한다. '왜 이들은 그렇게 고통받아야만 했습니까? 그 고난의 현장에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근원적 질문 앞에서 난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다.

소또매 : 그 아름다움 뒤에 있는 슬픔. 슬픔 뒤에 있는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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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또매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바다는 저렇게 푸르릅니다"는 문구가 적혀 있는 비석이다. 비석 뒤로 보이는 바다는 정말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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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젠 지역에 위치한 소또매의 경치는 사뭇 이국적이다. 푸른 바다와 신비한 푸른색의 산세가 어우러져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뒤에는 인간의 구슬픈 역사가 있다. 1598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권을 장악하고 그리스도인을 모두 죽여도 된다는 법을 제정하게 된다. 일본 기독교 대박해 시절. 그리스도인들은 소또매 지역으로 몰려들고, 200여년의 세월을 은거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 지역은 엔도 슈사쿠의 소설인 <침묵>의 장소적 배경이기도 하다.

소또매 지역에 있는 민속 박물관에서, 바다가 훤칠히 보이는 곳에 자그만 비석이 있다. 그 비석에는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바다는 저렇게 푸릅니다"라는 침묵 소설의 한 구절이 적혀 있다. 인간의 역사는 이렇게 슬픈데 자연은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는 것일까? 인간의 비애와 자연의 아름다움은 어떻게 이렇게도 대립되는 것일까?

제주도 4.3 항쟁과 관련해 제주도를 다녀오며 같은 생각이 오갔다.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 어떻게 그렇게도 잔혹한 인간의 역사가 있는 것일까? 오히려, 그 자연의 아름다움이 거추장스럽게 여겨졌다. 인간의 역사를 망각하게 하고 감상에 젖게 만든다는 생각에 분통이 터졌다. 우리의 죄악만큼, 우리의 잔혹함 만큼 그것을 자연이 표현해 준다면, 최소한 우리는 그 역사를 잊지 않았을 것을….

그러나 새로운 눈이 열린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위대함이다. 인간의 추악한 행태와 아픔을 머금고도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것이 자연의 포용력이다. 그러기에 그 아름다움은 더욱 빛나고 그러기에 우리는 그 앞에서 더욱 겸손해진다.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외관적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간의 비극과 오욕을 품는 그 깊이있는 아름다움을 보아야 한다.

소또매의 경관이 새롭게 보였다. 눈요깃감으로서의 감탄과 경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간의 아픔을 끌어안는 자연의 아름다움. 숙연해지게 하고 겸손하게 하는 그 아름다움.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허락하십시오. 저 푸르른 바다를 보면서도 우리의 슬픔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럼에도 푸르른 바다를 우리에게 주신 당신께 감사하게 하옵소서."

"화려함 뒤에 있는 슬픔을 보게하시며 초라함 뒤에 있는 생명의 약동함을 보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