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김갑수 기자의 기사 < 알몸의 강의석씨에게 누가 돌을 던지나>를 보기 전까지 나는 알몸의 강의석씨에게 돌을 던질 마음도, 시간도, 생각도 없었다. 그저 강의석이란 이름을 가진 용자(?)가 자행한 불쾌하기 짝이 없는 사건에 대해서만 조금 알고 있는 정도였다. 그렇기에 그 씁쓸한 사건이 내 일상에 별 영향 없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오마이 갓,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내가 즐겨 찾는 <오마이뉴스>의 주요 페이지에 강의석씨의 모자이크 처리된 알몸 기사가 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강의석씨의 알몸이 내 모니터 앞에 비췄을 때의 그 불쾌함이란, 말로 다할 수가 없을 듯하다. 이쯤 되면 가만있을 수가 없다(기분이 나빠진 것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물며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부도덕하기까지 한 일이다."
- 김갑수 기자의 기사 중에서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그 기준은 누구에게나, 고상한 이상을 지켜나가는 사회운동자들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강의석의 행동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나는 그가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나 싶다.
그는 자기의 알몸 쇼가 어떤 이들에게 불쾌감을 끼친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법률적으로 치면 '경범죄', '풍기문란죄'에 해당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을 다 떠나서 '진정성'이 없는 알몸은 보기가 민망했다. 정말 최악이었다.
문득 떠오르는 광경이 하나 있다. 기억하는가? 예전 음악 프로그램에서 있었던 모 인디 밴드의 알몸 행위. 그때 경악한 시청자들이라면, 또 그 씁쓸한 기억을 트라우마처럼 간직한 이들이라면, 이번 강의석씨가자행한 알몸 쇼에 불쾌감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두 사건은 비슷한 면이 많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미디어와 알몸을 이용한 충격 요법이라는 점에서 같았다. 그렇기에 그런 행위에 대해 비판할 권리는 당연히 있다. 당시 그 그룹은 사회적 비판 여론으로 매장됐다. 안타까운 사실 하나는 그로 인해 죄 없는 홍대 인디밴드들까지 수난을 겪었다는 것이다.
안타까움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뛰고 있는 사회운동가들이 때 아닌 욕을 먹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는 당사자는 오히려 당당하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매장 당한 그때 그 그룹에 비해 강의석씨에 대한 세간의 비판은 너그럽기까지하다. 게다가 '자유'라는 이름을 들어 옹호하는 이들까지 생기니 재미있는 일이다.
"실제로 강의석씨는 군대 반대 100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다만 옷을 벗은 것은 혼자였을 따름이다. 안중근 의사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때 혼자서 총을 쐈지 않은가."
- 김갑수 기자의 기사 중에서
그런데 그런 옹호글들은 백 번 이해한다 쳐도, 알몸 쇼에 대한 비판을 마치 우리의 고정 관념 탓으로 생각하는 김갑수 기자의 글은 황망스럽기 짝이없다. 또 강의석씨의 알몸 쇼를 안중근 의사의 거사와 같은 문장에 넣어서 비유하는 김갑수 기자의 글은 도저히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가 없다(사실 평소 김갑수 기자의 글을 존중하고 좋아하지만, 이번에는 생각이 너무 달라 본의 아니게 글을 쓴다. 이해해 달라).
강의석은 '미디어 스타'일 뿐
우선 김갑수 기자는 "굳이 언론에 노출된 횟수를 따진다면 유창선씨가 강의석씨보다 많다"면서 "그런데 유씨는 자신의 언론 노출은 정당하며 강씨의 언론 노출은 부당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노골적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데 '언론 노출에 횟수'에 관한 논점에 있어서 나는 근본적으로 생각이 다르다.
나는 강의석씨의 문제는 언론의 노출 횟수가 아니라 노출 방식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보자. 사회운동가의 언론 노출이 '백인보나 기타 사회운동처럼 자기를 희생해 열렬히 신념을 외치는 것'이라면 누가 비난하겠는가?
문제는 강의석씨는 제대로 된 사회운동으로 노출된 것이 아니라, 신변잡기식, 즉 권투선수, 택시기사, 호스트바 취업, 박태환에게 보낸 글 정도로 미디어에 오르락 내리락하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는 점이다. 나는 강의석이 진정성이 없기에 여론의 뭇매를 맞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김갑수 기자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하다.
부처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행의 길을 갔고,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다. 비단 성인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암울한 근·현대사 속에 빛나는 운동가들, 안중근 의사는 신념을 이루는 것에 목숨을 걸었다. 전태일은 불길 속에서 산화했다. 오체투지의 신부, 스님도 여론의 관심도 없이 묵묵히 고행의 길을 가고 있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말이다. 이렇듯 진정성을 얻으려면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가장 최적의 위치에서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의석에게 진정성은 있나
그런데 강의석씨에게 진정성은 있는가?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기에 김갑수 기자에게 묻는다. 그에게 진정성은 있는가? 아리송하다면 과거로 돌아가보라. 학생의 종교 자유라는 그 고결한 기치를 향해 뛰던 투사 강의석과 지금은 동일 인물인가? 안타깝게도 처음의 그 기치는 점차 개인적인 소소한 것들로 바뀌었고, 지금 군 입대를 앞두고 행하는 군대 폐지 퍼포먼스는 그 극단성에 힘을 잃고 말았다. 극단성은 진정성은 잃게 만들었다.
물론 기대는 절망보다 나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신념이 아닌 자기의 신변잡기를 미니홈피에 드러내고, 알몸을 통해 반응을 얻으려는 이에게 더이상 사회운동가라는 이름은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미디어 스타'라는 이름이 더 격에 맞지 않을까? 미디어 스타에게 사회 변화의 희망을 기대하기엔 너무 무리라는 생각을 한다.
"군대 폐지 같이 수용되기 어려운 요구를 하면서 굳이 알몸 퍼포먼스를 하는 방식으로 여론의 지지를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강의석의 알몸 퍼포먼스는 내용이나 형식에서 극단적인 편향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강의석이 왜 이렇게 자주 언론에 자신을 노출시키는지 모르겠다." (유창선씨의 블로그 글 발췌)
나는 유창선씨의 글에 동의한다. 사회운동에 대한 진정성이 없기에 내용이나 형식이 극단적인 편향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단번에 성과를 기대하고, 반응을 얻으려는 생각은 위험하다. 그것은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계에 만연한 방식이다. 사회운동과 연예계는 엄연히 다르다.
그렇기에 김갑수 기자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반라의 강의석에 대한 환상을 깨라는 것이다. 물론 개인적 부탁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부도덕하기까지 한 일이라니, 이것은 어디까지 부탁으로만 남겨두겠다.
하지만 알몸의 강의석씨는 안중근도, 전태일도, 오체투지의 신부, 스님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저 몇 해 전, 일어났던 한 인디밴드의 알몸쇼, 그 충격을 답습한 미디어스타에 가깝다. 그렇기에 김갑수 기자의 질문에 답한다. 알몸의 강의석에게 누가 돌을 던지냐고? 바로 내가 던진다. 기분을 불쾌하게 한 것만으로도 비판의 이유는 충분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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