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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사랑스러운 아내라해도 둘만 보고 있으면 무료하다. 출산 초기는 하는 일도 단순해 쉽게 우울증이 찾아온다. 그 때마다 친구와 이웃들이 찾아와 대화를 나누며 우울증을 극복했다.
▲ 우울증 풀어주는 수다 아무리 사랑스러운 아내라해도 둘만 보고 있으면 무료하다. 출산 초기는 하는 일도 단순해 쉽게 우울증이 찾아온다. 그 때마다 친구와 이웃들이 찾아와 대화를 나누며 우울증을 극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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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먹고 땡, 점심 먹고 땡, 저녁 먹고 땡. 창문을 열어보니 비가 오더래. 지렁이 세 마리 기어가더래. 아이고, 무서워 해골바가지~."

큰딸(별·4살)이 어느 날 그림을 그리며 노래를 부른다. 20년 전 내가 부르던 노래를 딸이 부르다니…. 나는 운동장 흙에, 딸은 스케치북에 그린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다. 반가운 마음에 어디서 배웠는지, 누가 가르쳐주었는지 묻자, 딸은 귀찮은 듯 쳐다보지도 않고 "언니들이"라고 짧게 답한다. 며칠 지나자 나도 이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닌가. 청소하거나 빨래할 때 나도 모르는 사이 흥얼거리고 있다. "아침 먹고 땡~"

이 노래가 중독성이 강하기도 하지만, 특히 내 입에 착 달라붙는 이유가 있었다. 육아휴직한 뒤 내 삶이 이 노래와 딱 맞았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 밥상 차리고 먹고 치우면 금세 점심 준비할 때가 닥친다. 점심 해치우고 나면 빨래하고 청소하고…, 가끔씩 아내 주전부리 만들어주면 저녁 먹어야 한다. 하루하루 흐를수록 살려고 먹는 건지, 먹자고 사는 건지 헷갈린다.

살려고 먹나, 먹자고 사나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는 건 아내가 반찬 투정을 하지 않는다는 점. 아내는 예민한 편이지만 국이 맛이 없다느니, 또 같은 반찬 내놓았다느니 하는 소리는 입에 담지 않았다. 일주일 내내 미역국만 끓여주어도 잘 먹는다. 끓이는 나는 금방 질려 미역국 냄새만 나도 싫은데, 아내는 꾹꾹 참고 내가 끓인 미역국을 잘도 먹는다. 다만 밥 때를 놓쳐서는 절대 안 된다(아내는 저혈당이라서 배고프면 힘들어 한다.)

육아휴직하면서 가장 부담스러운 게 밥상 차리는 문제였다. 중학생 때부터 집을 나와 살았지만 할머니 도움을 받거나 사먹었기에 음식을 만든 적이 없었다. 결혼 초기 내가 부엌살림을 못하자 아내는 적지 않게 실망했다.

미역국을 처음 끓일 때였다. 아내가 먼저 미역을 들기름에 볶으라고 하기에, 마른 미역 채 볶았다가 된통 혼났다. "모르면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러느냐"고 대꾸했다가 "어떻게 미역을 불리는 것도 모를 수 있느냐"는 핀잔만 듣고 또 들었다.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 동네에서 모여 살고 있는 누나와 형, 아우들이 나를 보고 실실 웃을 때마다 창피했다.

육아휴직하면서 초기에 요리 솜씨가 조금 나아졌지만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진간장과 양념간장은 어떻게 다른지, 언제 소금으로 간을 하고 언제 간장으로 간을 하는지, 어떤 요리에는 들기름을 쓰고 어떤 요리에는 올리브유를 넣는지…. 항상 아리송하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쉽게 물어보기도 어려웠다.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아직도 그걸 물어봐?" 하는 말이 돌아온다. 아내는 화가 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내가 듣기에는 목소리가 날카로워지고 끝이 올라가는 게 언짢은 기분이 분명하다. 아마 아내는 내가 한심할 뿐이라고 할 것 같다. 운전은 아내나 남편에게 배우지 말라고 하던데, 요리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내겐 여전히 어려운 요리

집에 찾아와 아이를 대신 봐줄 때 짧은 휴식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재미나게 듣는다.
▲ 방문하는 친구들 집에 찾아와 아이를 대신 봐줄 때 짧은 휴식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재미나게 듣는다.
ⓒ 주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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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요리책을 보고 음식을 만들기도 어렵다. 간장을 '적당량' 넣는다, '충분히' 졸여준다 따위의 문구를 만나면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요리책에서 넣으라고 지시한 양념 한두 개는 꼭 집에 없다.

한번은 요리책을 따라 우엉조림을 만들었다. 그런데 왜 내가 만든 우엉은 아삭아삭하지 않고 흐물흐물한지, 분명 요리책대로 했는데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웃에 사는 누나가 내 궁금증을 간단하게 풀어주었다. 요리책을 그대로 따라하면 안 된다고. 아! 그러니까 어쩌란 말이냐고.

금방 돌아오는 밥 때 말고도 아침저녁으로 청소해도 나오는 먼지들, 세탁기를 방금 돌렸는데 또 나오는 기저귀 빨래가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이런 일을 하려고 휴직했는데 집안일을 하는 게 싫어지는 게 우습지만, 가끔은 주부 우울증 비슷한 증상이 찾아온다. 하루 종일 집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날이 쌓이면 더욱 외로워진다.

친하게 지내는 누나가 몇 달 동안 투병 생활을 한 뒤, "아픈 것보다 외로운 게 훨씬 힘들더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누군가와 소통하지 못하고 고립할 때 느끼는 고독이 더 큰 병을 낳는다. 밥하고 빨래하는 일이 힘든 게 아니라, 그 일을 하면서 다른 이들과 단절될 때 어려움을 겪는다.

임신과 출산을 거치면서 여성이 사회로부터 급격하게 소외되고, 부모에게 아이 양육을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이해할만 했다. 갓난아기를 키우는 가정은 다른 세상과 오히려 더 잘 소통하고 나누어야 하는데, 정 반대로 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구나 싶었다.

주부 우울증 벗어나기

둘째 솔을 출산한 날부터 동생들이 찾아왔다. 주변에서는 피곤하지 않느냐고 했는데, 우리는 방문하는 친구들 덕에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 출산한 날에 찾아온 동생들 둘째 솔을 출산한 날부터 동생들이 찾아왔다. 주변에서는 피곤하지 않느냐고 했는데, 우리는 방문하는 친구들 덕에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 주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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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되어 '육아'를 돕는 게 아니라 '참여'하겠다고 마음먹자, 산모가 겪는 소외가 남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육아 휴직 기간을 지치거나 외롭지 않게, 신명나고 기쁘게 보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내린 생각은 '만나러 갈 수 없다면 사람들을 초대하자'는 것.

우리 부부는 다행스럽게도 가까운 곳에 초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100명에 이르는 형과 아우들이 마실 다닐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 특별한 일이 없어도 오가며 부담 없이 들렀다. 때로는 반찬이나 간식거리를 만들어 아이들 손에 들려 보내는 누나도 있었고, 임신을 계획하고 있는 신혼부부 후배들이 찾아와 이것저것 묻고 가기도 했다. 이들에게 보육 이야기 뿐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흥겹게 들을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우리 부부처럼 아이를 부모나 보육기관에 의존하지 않고 마을 공동체에서 함께 키우려고 노력하고, 항생제에 의존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기에 한 번 만나면 할 이야기가 많다. 누구네 집 아이 아토피 이야기, 우리 집 큰딸의 퇴행 현상, 마을에 돌고 있는 감기 대처법 등등.

지금도 사람들은 삼칠일은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신생아 건강 관련 책을 보아도 그렇고, 의사들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다. 내가 생각해도 갓난아기를 보호하는 건 중요한 일인 듯싶다. 그렇지만 우리는 산모와 아이가 건강하다는 조건만 맞는다면 얼마든지 이웃들이 찾아오는 걸 반겼다. 방문하는 사람들도 청결하려고 노력했고 아기와 산모에게 부담을 주는 행동은 피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고립되지 않고 갓난아기를 키우고 있다.

30년 넘게 차린 밥상만 대하다가 이제 겨우 몇 달 누군가를 위해 밥상을 차렸다. 나만을 위해 시간과 돈, 힘을 쏟다가 이제 겨우 너에게 눈을 돌리고 있다. 그동안 혀로 그쳤는데, 이제 몸으로 움직인다. 딸아이 똥 기저귀를 빨고, 가끔은 아내 속옷을 빨고, 큰딸 가방 챙겨 공동육아 시설인 아름다운마을학교에 보낸다. 이렇게 초보 주부가 되고 보니, 내가 얼마나 살림에서 비주체적인 삶을 살았는지 스스로 돌아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회개한 발걸음이 더욱 성숙한 살림꾼으로 죽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잘 해보려고 하는데 너무 기죽이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지? 여보!


태그:#육아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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