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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16일(토)에서 23일(토)까지 7박 8일 동안 기독청년아카데미와 기독교 사회 문제 연구원, 개척자가 주관한 "2008 한일 생명 평화 역사 기행"을 다녀왔다. 한일간의 역사, 평화의 문제.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생명의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를 고민하는 55명의 청년들이 모였다.

 

고난의 현장(석탄 박물관, 영생원, 오다야마 묘지), 우토로, 민족학교, 고베 생협, '쓰고 버리는 시대를 생각하는 모임' 등을 방문하며 우리의 삶에 어떻게 역사와 평화, 생명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시간을 보냈다.

 

고쿠라, 나가사키, 소또매, 오사카, 고베 등 일본 각지를 다니며 보고 배운 기행의 여정을 함께 나눈다. 이 글은 역사, 평화, 생명이라는 주제로 세 차례에 나누어 연재하며 시대를 고민하며 새로운 삶을 꿈꾸는 청년들의 여행 발자취를 따라가 볼 것이다. <기자 주>

 

오사카시로 들어왔다. 일행들을 놓쳐 길을 헤매며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 골목 저 골목을 오가며 시장통으로 들어섰고 왁자지껄한 소리에 낯익은 말이 들려온다. 한국말이다. 시장통에 있는 물건들도 너무 낯익다. 진라면, 태양초 고추장 등등. 한국에서 슈퍼마켓에 가면 쉽사리 볼 수 있는 물건들이 이것저것 있다.

 

이국에서 이처럼 낯익은 소리와 광경을 들을 수 있는 이곳은 바로 이쿠노구다. 일본에서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우리는 지금 조선 4초급 학교로 가고 있다. 흔히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민·족·학·교. 이곳이 바로 우리의 목적지다.

 

해방 이후, 210만 명으로 추정되는 동포들은 너도나도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갔다. 귀국자는 이듬해 봄까지 140~150만 명에 달했고, 일본에 남은 동포들도 대부분이 귀국할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1946년 여름 무렵에는 귀국자 수가 크게 줄어들면서 귀국한 자가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오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국이 해방되었지만 당시 한반도 정세가 어지러웠고, 생활의 전망이 전혀 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일동포 90%의 고향인 남한 지역에서는 물자 부족에 의한 심각한 인플레이션, 콜레라 유행, 대립하는 정치 세력 간의 테러 등으로 사회가 극도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제주도에서 벌어진 4·3 사건은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오는 기구한 상황을 만들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행한 조국에서의 침탈과 차별은 고스란히 일본의 동포 사회에서도 복사판처럼 재현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직접적 차별과 멸시가 그들에게 전가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렸던 해방이고 그토록 그리웠던 귀향이었지만, 현실은 그들을 냉대했고 그들은 일본에 남겨져야만 했다.

 

이 속에서 재일동포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과제는 '민족 교육'이었다. 이카이노에서는 1945년 10월 기독교 교회에서 '국어 강습회'가 시작되어 민족교육 운동의 첫걸음을 내디뎠고, 이듬해 4월 '이쿠노 우리 중등학원'이 설립되며 한걸음 한걸음씩 교과서 편찬, 학교 교사 육성 등 민족교육 체계가 정비되어 갔다. 그리고 그 결과 1948년 4월 전국 534개 학교에서 학생 57,204명이 민족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민족 교육의 과정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일본정부는 재일 조선인의 학교 건립을 제한했고 이를 거부하자 민족학교에 대한 폐쇄령을 발령했다. 재일동포들은 이에 대항하여 조련 조직을 중심으로 대중 운동을 벌였다. 이 투쟁을 '한신 투쟁'이라고 한다.

 

이 결과 1948년 5월 5일, 재일동포 대표와 일본정부의 문교부 장관 사이에 각서가 교환되었고 여기서 일본의 법령에 따를 것을 조건으로 일본 정부가 민족학교를 사립학교로 인정하겠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도 잠시, 한반도에서의 분단국가 출현 등 냉전 상황은 일본 정부로 하여금 더 강경한 탄압책을 펼치게 하였고 1949년 11월 5일, 전국에 일제히 무장 경찰을 동원하여 민족학교를 강제로 폐쇄해 버렸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재일 동포는 다시 민족학교를 세우고 지키는 운동을 시작했다. 1955년에 결성된 '재일본 조선인 총연합회'(在日本朝鮮人總連合會, 약칭 조총련)은 민족교육을 조직의 중요 과제로 보고 폐쇄된 민족학교를 재건해 나갔다.

 

우리가 방문한 조선 제4 초급학교는 1946년 6월에 '조련 이쿠노 제 10 우리학원'으로 창립(47년 6월에 '조련 사립 미유키모리 소학교'로 개정)되었다, 49년 10월에 강제 폐쇄되었고, 54년 재건되었다. 이 학교는 오사카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학교 중의 하나라 한다.

 

길을 따라 이리 저리 걷다 나름대로 웅장한 학교 건물 하나를 발견하였다. 순간 속으론 '와 역시 우리 동포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산다는 이 지역에선, 학교도 이렇게 웅장하구나' 라는 탄성이 나왔다. 그러나 이 탄성은 괜한 것이었다. 우리가 발견한 그 건물은 조선 제 4초급학교 건물이 아닌 일본 공립 학교 건물이라고 한다.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니 조그만 학교가 보였다. 드디어, 어렵게 우리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민족학교가 일본 공립학교에 비해 웅장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조선 학교는 아직 일본정부로부터 정식 학교로 인정을 받지 못해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일본 정부는 지원을 하지 않는 것을 넘어, 적대시하였다. 대학 입시 자격과 운동 경기 자격을 얻지 못하는 등 그들이 겪어야 했던 숱한 세월의 고난은 고스란히 그 건물 속에 담겨 있다. 그러기에 화려하진 않지만, 당당하게 서 있는 그 모습에 절로 눈물을 훔치게 된다.

 

학교 안에 들어갔다. 일행에 조금 뒤쳐진지라 멋진 공연을 놓쳤다. 오늘은 방학이라 아이들과 교류하지 못할 거라 미리 전해 들었는데 곧 있을 무용 대회에 출전하는 아릿다운 소녀 한명이 나와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국에서 방문한 우리들에게 그 소녀는 멋진 공연을 펼쳐줬고, 난 아쉽게도 아주 짤막하게 그 공연을 볼 수 밖에 없었다. 사뿐사뿐 걷는 걸음, 환환 미소... 그 소녀의 표정은 사뭇 우리 재일 동포들이 겪는 현실과는 너무 다르게 비춰졌다.

 

우리들을 대하는 선생님의 모습들도, 우리에게 우리의 무용을 보여주는 그 소녀의 표정도 그들이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과는 사뭇 다르게 비춰진다. 왜일까?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그 기구한 운명을 거슬러 그들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걸까?

 

뿌리를 찾는다는 것

 

우리를 맞는 또 하나의 팀이 있었다. '민족 문화패 마당'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소리와 악기를 연주하는 문화팀을 만났다. 북과 장구와 꽹과리가 어우러져 흥이 나는 가락을 만들어 낸다. 민족 학교의 우울한 현실에 마음 졸이며 가슴 아파하던 마음들이 저 가락에 녹아나고 덩달아 둥실둥실 춤추게 된다.

 

그리고 문화패의 단장님께서, 소리 한수를 들려 주신다. 서편제에서 소리에 '한'을 담기 위해 눈을 멀게 해야 했던 그 장면처럼, 즐거이 부르고 있는 저 소리 속에, 참으로 많은 사연이 들려온다. 이국에서 온갖 차별과 멸시 속에, 민족의 음악을 찾는다는 것, 이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우리들의 방문에 한 재일동포 여자분께서 그가 살아온 삶의 '증언'을 해 주었다. 자신은 태어나서 일본 학교에 다녔고 일본인으로 살았단다. 그러나 자신이 한국인임을 알았을 때, "내 인생이 끝난 줄만 알았어요"라고 한다. 그는 자신이 한국임을 숨기고 싶었다고 한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일본에서 한국인이 되는 것이 인생이 끝난 것과 똑같은 말로 되게 했을까?

 

일본인과 일본사회는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에 대해 이중 잣대를 댄다. 한류열풍이다 하며 한국인에 대한 엄청난 선망과 관심이 있지만 또 한편에선 그들 사회 속의 재일조선인들에겐 그런 관대함과 관심이 없다. 그들은 차별 받는다. 그들은 아파하고 그들은 절망하고...

 

증언을 해 주시던 선생님의 말. 그러나 결국 벼랑 끝에서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단다. 피할 수 없는 사실. 피할 수 없는 현실. 그가 내린 결단은 자신의 뿌리를 찾는 것이다. 이 뿌리란 남한 혹은 북한이라는 국가적 단상이 아니다. 그 뿌리는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우리의 역사는 어떠한지, 우리는 왜 이곳에서 차별받아야만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자신이 지금 서 있는 그 지반을 알아야만 어떻게 살아갈지 한 걸음 내딛을 수 있겠더란다.

 

함께 이야기 나누고 함께 교제하며 들으며 그들이 살아왔던 시간의 깊이가 물씬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이 던져준 삶의 근원적인 성찰이 동일하게 나에게도 메아리처럼 돌아온다.

 

'내 뿌리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가?'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앞만 보고 걸어간다. 앞만 보고 걸어가기에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그 길이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 지도 모른 채, 스스로의 착각 속에서 자신들의 걸음을 걸을 뿐이다.

 

우리들이 함께 이야기 나눈 그 분들은 차별과 멸시 속에, 역사에서의 그들 존재의 자리를 끝없이 탐험해 갔다. 그리고 그들은 절망스러운 그 걸음을 희망의 걸음으로 바꾸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한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들에게서 삶의 자세를 배운다. 그리고 또 한편에선 우리의 이웃에 너무 무관심했던 우리의 삶을 회개한다. 그들은 모두 우리에게 스승이다. 고통의 자리에서 그 고통의 공명이 우리 삶을 울려 그들과 우리가 친구가 되고 동무가 되는 소통의 울림이 널리 널리 퍼져나가길 기도한다.

 

 

평화는 포기함에서 나온다

 

1945년 7월 24일 늦게 트루먼 대통령은 합동참모본부의 명령을 승인했다. "제20공군은 1945년 8월 3일 이후 관측폭격이 가능한 맑은 날씨가 되는 대로 첫 번째 특수폭탄을 투하한다. 그 목표물은 히로시마, 고쿠라, 니가타, 나가사키 가운데 한곳을 선택한다."

 

원폭 투하지로 선택된 곳은 이러했고, 실제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다. 히로시마는 당시 서일본의 중심지로 총감부, 철도국, 체신국, 재무국, 전매국, 군수괄니국 등이 설치되어 있었고, 군 관련 인원만 약 9만 명에 이르렀다. 또한 나가사키도 일본 제일의 군함제조를 자랑하는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를 끼고 있어 일찍부터 군수도시로 성장하였으며 조선소에만 7000여명의 조선인이 강제 징용되어 있었다. 

 

1945년 8월 7일 오전 8시 12분. 4.5톤의 폭탄을 실은 '에놀라 게이 호'는 폭격 개시점에 도달했다. 그리고 8시 15분, 폭격수의 '폭탄투하'라는 말과 함께 역사상 첫 원자폭탄이 사용된다. 그리고 8월 9일 티니언 섬에서는 제2의 폭탄을 실은 B-29 폭격기 '복스카 호'가 03시 49분 이륙했다. 이들의 목표지점은 고쿠라 였지만 자욱히 낀 구름은 공격지점을 확인할 수 없게 했고, 3번이나 비행했음에도 목표지점을 확인할 수 없었던 그들은 제 2목표 지점인 나가사키로 방향을 옮긴다.

 

그러나 나가사키 역시 항공에는 구름이 잠깐 끼어 있었고, 이 구름이 잠깐 걷힌 그 지점에는 '미츠비시 무기 공장'이 보였다. 그들은 원래 목표 지점이었던 미츠비시 조선소에서 목표 지점을 옮기고 또 다시 두 번째 폭탄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폭탄이 떨어진 곳은 나가사키에 있던 일본 최대의 성당, 우라까미 성당이다.

 

폭탄 투하의 결과는 가히 상상을 초래한다. 히로시마는 14만 명이 폭탄에 의해 희생되었다. 나가사키에서는 약 7만 명이 희생되었다. 또한 히로시마의 건물 9만 채 가운데 도합 6만 2천 채가 파괴되었다. 사상자는 당시의 폭격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방사선의 후유증은 오래 갔다. 버섯구름이 피어오른 이후 수십 년 동안 방사선병에 의해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나가사키이다. 원폭을 몸으로 체험한 이곳에서는 그것을 기념하고 전쟁의 실상을 고발하는 여러 장소가 있다. 특히 그때의 참상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 원폭투하지에 공원을 세웠다. 우리 일행은 평화 공원을 거쳐 '원폭 자료관'으로 가서 그 당시 원폭이 가져온 무시무시한 결과를 보았다.

 

현재까지 핵실험은 총 2051회가 실시되었단다. 그 중 미국이 실시한 횟수는 1030회이다. 정확히 세계의 모든 핵실험 중, 반이 넘는 횟수를 미국이 실시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세계의 강자로 북한, 이란, 인도 등 약소국들의 핵실험과 핵 보유를 반대한다. 핵실험과 핵 보유를 반대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다. 핵은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자신들은 여전히 지니고 있으면서 타인에게는 여타의 이유를 들며 핵을 포기하라는 것은 가식적이다.

 

'팍스 아메리카나.' 미국의 힘으로 공고된 균형과 평화. 힘으로 유지된 것은 평화가 아니다. 그 힘은 다른 힘을 불러 오게 마련이고 반드시 힘과 힘은 충돌한다. 평화는 절대적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평화는 포기함으로 나온다. 평화는 자신의 힘을 내어줌으로 나온다. 포기의 역설. 내려놓음의 역설이 바로 진정한 평화의 힘이다.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나가사키에 원폭을 기념하는 또 한 곳이 있다. '오까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이 바로 그곳이다. 이곳에는 '공식적으로' 기억하지 않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의 역사를 폭로한 자료들이 모아져 있다. 평생을 전쟁 피해자들에 대해 사과도 보상도 하지 않는 일본의 무책임을 고발해 온 오까 마사하루씨의 뜻에 따라 설립한 것이다. '평화 자료관'에는 강제연행, 난징대학살, 조선인 피폭자, 전후 보상 문제 등이 자세히 거론되어 있다.

 

당시 나가사키에도 7,000여명의 조선인이 강제 연행되어 미쯔비시 조선소 등 곳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폭은 그곳의 조선인들 역시 피해가지 않고 모두를 공평하게(?) 죽음으로 몰아갔다. 여느 때의 일본 정부와 같이 그들은 원폭으로 죽어간 조선인들에 대해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고, 피해 보상 역시 하지 않았다.

 

일본은 원폭의 피해자인가? 일본이 원폭의 피해자라면, 그 속에서 강제연행되어 죽어간 조선인들은? 아니다. 적어도 일본은 그 속에서 죽어갔던 조선인들에 대하여 가해자이다. 나가사키 곳곳에 묻어 있는 평화에 대한 열망에는 이런 역사 인식이 배제되어 있다. 원폭으로 죽어간 무수한 영혼들의 고통을 폄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의 문제다. 그리고 그 역사의 기억 앞에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이다.

 

원폭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그런 참상을 당하지 않기 위해 힘을 길러야 한다. 일본 역시 원폭을 가져야 하고, 정식 군대를 가져야 하며, 그 피해의 복수를 언젠가는 또 다시 해야 한다. 이것이 일본 정부의 논리다.

 

그러나 '평화 자료관' 속에 담겨진 뜻은 자신을 가해자로 삼고 있다. 전쟁의 피해자가 아닌 전쟁의 가해자이기에 그들로 인해 죽어야만 했던 더 고통받는 자의 신음 소리에 반응했고 응답했다. 다른 국가 혹은 시 자료관, 기념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허름한 공간에 차려진 그들의 자태이지만 그들이 품고 있는 이상과 역사 앞에 서 있는 진실된 태도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너무나도 엄숙하게 만든다.

 

동일한 질문이 나에게도 온다. 나는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나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과 폭력을 잊을 수가 없다. 20대 초반부터 시작한 한국의 근현대사를 공부하며 일제가 우리에게 남긴 감당키 힘든 역사의 질곡을 볼 때마다 가라앉혀지지 않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일본을 미워했고, 일본을 증오했고, 일본을  질타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는 피해자인가?

 

우리는 베트남 민중들에게,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가해자이다. 피해와 가해는 수시로 변하는 동전의 양면일 따름이다. 우리는 피해와 가해 모두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중적 존재이다. 그렇다면 피해자이냐 가해자이냐 라는 질문은 어쩌면 아무런 의미없는 것일 수 있다. 다만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고 그 기억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여전히 커다란 문제로 내게 다가온다.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일본 정부의 만행(독도 문제, 교과서 문제, 역사 문제 등)에 대해 나는 끝까지 싸우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피해자로서가 아니다.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의 울분으로 싸우고 싶지 않다. 우리의 뿌리를 알아가고, 평화를 위해 싸우고 싶다. 오까 마사하루 선생님처럼, 우리가 만났던 일본의 양심있는 운동가, 학자들처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용기 있는 자가 되고 싶다.

 

평화는 역사 앞에 서 있는 자의 겸손함이다. 그 지반에서, 나의 그리고 우리의 삶도 평화를 꿈꾸었으면 좋겠다. 

 


#한일 기행#평화#원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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