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거치면서 탁구는 국민스포츠로 자리잡았다. 마을마다 탁구장이 생겼다. 한 때는 당구장만큼 흔했다. 유남규, 현정화, 김택수…. 우리 가슴을 뛰게 했던 스타들이 은퇴하면서, 탁구장도 하나둘 씩 사라져갔다. 탁구는 이제 하는 운동이 아니라 올림픽 때나 TV로 보는 게임 정도가 되었을 2000년 무렵, 우리 마을에 탁구장이 생겼다. 그것도 숲속에.
배드민턴장이나 테니스장이 실외에 있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탁구장이 숲속에 있다니. 2.5그램짜리 공이 제대로 넘어가는 게 신기할 정도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탁구장 언저리로 병풍처럼 나무들이 둘러쳐 있고 뒤쪽에 작은 언덕까지 있어서 웬만한 바람을 막아준다. 진부하게 말하자면, 천혜의 입지 조건이다.
나무와 언덕이 바람 막는 천혜의 조건
인수동에서 영락기도원을 거쳐 북한산으로 올라가는 입구 숲속에는 작은 숲속 탁구장이 있다. 테이블마다 기합소리와 웃음소리가 요란하다. 50대로 보이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신나게 탁구 라켓을 휘두른다. 매번 지나치기만 했는데, 하루는 용기를 내 다가가 보았다. 시합하다가 땀을 닦으며 쉬고 있는 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잘 치시네요."
이렇게 말을 튼 아저씨는 나를 여러 번 놀라게 했다. 우선 그분은 아저씨라기보다 할아버지셨다. 연세를 물으니 일흔넷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탱탱한 얼굴 피부에 군살 없는 허리, 근육이 적당히 붙은 장딴지까지 완벽한 몸매를 자랑했다. 운동하는 사람들 대부분 60대를 넘겼지만 하나 같이 10년 이상은 젊어보였다.
수유탁구회에는 100여 명 회원이 활동하는데, 70대부터 40대까지 골고루 섞여있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주축 구성원 50명은 60~70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다. 그 나이에 넘어오는 공을 받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스매싱하는 자세가 예사롭지 않다. 상대편에서도 재빠르게 공을 쫒아가고, 공을 받지 못할 때는 아쉬움 섞인 탄성을 내지른다.
60~70대, 노인정 대신 탁구장으로작은 숲속 탁구장이 들어선 곳은 원래 근처에 약수터가 있어 북한산 등산객들이 쉬어가고, 공터가 제법 넓어 이따금 예비군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주민들도 아이를 데리고 산책하는 뒷동산 같은 곳이었다.
문제는 이곳이 대기업 땅이라는 점. 기업은 이곳에 대형 청소년수련원을 지으려다가 주민 반대에 부딪혀 포기했다. 이후에도 이런저런 개발을 시도하기를 여러번 반복하면서 숲속 곳곳에 생채기만 남겼다. 개발한다는 이유로 망가지는 숲을 보다 못한 몇몇 주민이 체육공원을 만들자는 뜻을 모았고, 그렇게 탁구장이 탄생했다.
처음엔 탁구 테이블 4개를 놓았다. 움직일 수 있는 노인네는 누구나 오라고 홍보했다. 창단에 참여한 양율 전 회장은 "복지관이나 노인정 같은 곳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으면 몸이 더 아프다고 친구들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나 둘 찾아왔고, 회원이 늘어나 테이블도 이제는 7개로 늘었다.
회비는 일 년에 4만 원으로 깜찍한 수준이다. 실내탁구장에서 4시간 정도 치는 값이면 이곳에서는 1년을 즐길 수 있다. 그렇지만 수유 탁구회는 누구에게는 이 회비조차도 부담스러울 수 있다며, 회비를 줄일 생각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제대로 운영이나 할 수 있을까 싶다. 100명이 내는 회비로 2년에 한 번씩 낡은 테이블을 교체하고 주변 숲을 정돈하고 필요한 물품 구입하면 딱 떨어진다. 특별히 많은 돈을 후원하는 사람도 없다. 그래도 남상석 회장은 "그거면 됐지 무얼 더 바라느냐"며 "충분하다"고 잘라 말했다.
이제는 '막탁구' 탈출…감독님 영입
사람들은 "막탁구"를 한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기본기를 배울 기회가 별로 없었기에 당연하다. 그럴수록 좋은 선생님을 만나기를 원했지만, 늘 바람에 그쳤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몇 달 전 스승이 찾아왔다. 중학교에서 탁구선수를 육성했고 탁구협회 이사까지 지낸 이규택 감독이 참여한 것이다. 번동에 사는 이 감독은 북한산 등산길에 우연히 숲속 탁구장을 발견했다.
"처음엔 뭐, 저런 곳이 다 있나 싶었지요. 조금만 바람 불어도 공이 날아갈텐데. 조금 지켜보니 제법 괜찮더라고요. 제가 직접 뛰어보고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지요. 실내에서 먼지 마시며 운동하는 것보다 숲에서 좋은 공기 속에 탁구하는 게 훨씬 좋더라고요."
이 감독은 사람들에게 탁구 기본기를 짬짬이 가르쳐주었다. 사람들도 "이 감독님" 하며 잘 따랐다. 몇 달 사이에 서로 실력이 좋아지는 걸 느끼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감독님 우리 마을로 이사 오시지요." 배우는 재미에 빠진 사람들이 애교를 섞어 농을 던진다.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이 감독 얼굴에도 웃음이 번진다.
수유탁구회는 해마다 10월 31일 총회를 연다. 회원 모두가 모여 탁구 실력을 뽐내고, 맛난 음식도 만들어 먹는다. 탁구장 주변 작은 숲속을 지키고 가꾸는 문제로도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한쪽에서는 새로 익힌 탁구 기술을 설명하느라 분주할 것이다.
남 회장은 "마을 사람들, 산에 오르는 객들도 들러서 먹고 가라고 전해주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그래도 돼요" 하고 물으니 "탁구장이 어디 우리 것인가요. 마을 사람들, 이 숲을 좋아하는 사람들 것이지요" 하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