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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 사는 메일 친구가 이렇게 적어왔다. “참 등산을 좋아하나 봐요?” 그도 그럴 것이 호주의 멋진 풍경들을 사진에 담아 보내왔기에 답례로 내가 등산한 산들을 사진에 담아 보냈더니 그런 반응이 온 것이다. 그래서 한번 생각해 봤다. 내가 등산을 좋아하는지.

등산을 좋아한다는 말은 조금 어패가 있다. 등산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건강하려고 애쓰는 게다. 이웃의 목사님부부는 수영을 자꾸 추천한다. 우리라고 수영이 건강에 좋다는 걸 모르랴. 수영을 지속적으로 하려면 돈이 만만치 않게 들어가는 걸 안다. 그래서 수영 이야기가 나오면 그냥 웃고 만다.

우리 부부는 시골살이를 한 이래 주변 걷기로 건강을 챙긴다. 하지만 이웃들이 열심히 논밭에서 땀 흘리는 곁을 인사나 넙죽하고 걷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그래서 채택한 운동이 가까운 산 등반이다. 그러다 가끔은 높은 산, 좀은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산도 탄다.

 속리산 문화재관람료 매표소, 아내가 표를 사고 있다.
 속리산 문화재관람료 매표소, 아내가 표를 사고 있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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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이 우거진 길이 참 운치 있다.
 숲이 우거진 길이 참 운치 있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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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한 밤을 꼬박 지새운 후

우리부부는 지난 7일 좀 멀리 있는 데로 가자고 마음을 모으고 속리산행을 결정했다. 우리 집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다. 거기다 속리산은 우리 부부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곳이다. 30여년전, 그러니까 대학 4학년 때다. 두 번째 만나 데이트코스로 삼은 데가 바로 속리산이었다.

대전에서 속리산행 버스가 있다는 것을 안 우리는 무작정 속리산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무모하기도 하지. 그냥 평상복, 그것도 데이트를 위해 좀은 갖춰 입은 상태로 속리산엘 간 것이다. 나는 구두와 양복에 아내는 하이힐에 양장,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가관이다. 요새도 가끔 그런 스타일로 산에 오르는 이들을 보면 한번 뒤돌아보게 된다.

그런 무지막지한 스타일로 무작정 산에 올랐다. 3월이어서 아직 산에는 군대군데 눈이 덮여있고, 패인 웅덩이마다에는 얼음이 얼어 있었다. 미끄러운 길에서 곡예를 하듯 그렇게 산을 올랐다. 지금 같으면 ‘돈 줄게 하라’고 해도 그 짓은 안 했을 것 같은데, 그때는 둘 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듯. 사랑에 눈멀었는데 무슨 짓인들 못할까.

평지 길이 끝나는 세심정 휴게소까지 가서 무언가 마신 것 같은데 생각이 안 난다. 일어나는데 이미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둘이는 손을 꼭 잡고 온 길을 되짚어 왔는데 하산했을 때는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즉시 터미널로 향했지만 차는 이미 끊겼고.

누구는 작전이었다고 하는데 난 전혀 작전이 아니었다고 지금까지 항변한다. 실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란 게 있는 법. 그때 어쩔 수 없이 같이 한 밤을 꼬박 지새운 후 우리는 더욱 가까워졌는지도 모른다. 이런 추억의 속리산을 오랜만에 밟아보기로 한 것이다. 그때의 추억이 살포시 다시 살아나기를 내심 고대하며.

 바위 위로 담쟁이 넝쿨이 기어가고...  곱게 물든 모습이 아름답다.
 바위 위로 담쟁이 넝쿨이 기어가고... 곱게 물든 모습이 아름답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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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위 한편에 도장을 새겨놓았는지 하도 희한하여 한컷 잡았다.
 바위 한편에 도장을 새겨놓았는지 하도 희한하여 한컷 잡았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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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업대에 앉아 건너편을 보니

사람들은 속리산 하면 문장대를 떠올린다. 속리산의 주봉은 문장대(1054m)가 아니라 천왕봉(1057m)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장대에만 오른다. 하지만 속리산에는 문장대나 천왕봉만 있는 게 아니다. 신선대가 있고 경업대가 있으며 거기에 더하여 입석대와 비로봉이 있다.

우리는 이번에는 신선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문화재관람료 매표소 안내원이 문장대 쪽으로 해서 신선대를 돌아 내려오다 보면 경치가 그야말로 끝내주는 데가 있다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굳이 문장대로 가야만 그 경치를 보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신선대 쪽으로 직행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쪽은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장대 쪽으로 오르면 신선대까지 가지 못한 채 돌아올 게 분명하기에. 그런데 올라가는 도중에 하산하는 이들마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거다. “이쪽은 험해요. 문장대 쪽으로 올라 이쪽으로 하산하셔야 하는데.” 나이깨나 드신 아저씨가 친절하게 우릴 염려한다.

“그래요? 하지만 우린 신선대까지가 목표에요.” 이 대답에, “아, 그래요? 그래도 좀 험합니다.” 하고 내려가신다. 산에 오면 누구나 다 친구다. 연속되는 층계들로 인하여 길이 좀 험하긴 했다. 그럴 땐 옛 추억을 떠올리며 아내의 손을 잡아 끌어주기도 하며 올랐다.

세 시간쯤 올랐을까. 기어이 경업대에 올랐다. 경업대의 너럭바위에 앉아 입석대와 비로봉 쪽을 바라보니 딴 세상이다. 누가 만들면 저리 고울 수 있을까. 적당히 벌어진 바위 틈새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나무들이며, 누가 깎았는지 조각 같이 특이한 형상의 바위들, 큰 비석 하나를 길게 세워놓은 듯한 입석대, 그들 사이로 비집고 핀 노랗고 빨간 단풍잎들. 그렇게 산과 가을은 옛 이야기를 재잘대고 있다.

 경업대 맞은편으로 입석대와 비로봉 쪽이 장관이다.
 경업대 맞은편으로 입석대와 비로봉 쪽이 장관이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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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업대에서 올려다 본 신선대
 경업대에서 올려다 본 신선대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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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도토리가 다 어디로 갔데?

“여보, 당신 혼자 신선대까지 올라갔다 와요.”
“왜 당신은?”
“난 힘들어서 도저히 더 못 올라가겠어요.”

이리하여 우리부부는 기어이 헤어졌다(?). 예전 같으면 가당키나 한 상황인가. 하이힐을 신고 발꿈치가 다 까져도 묵묵히 손을 잡고 걸었던 ‘그녀’가. 상큼하게 사랑으로 다가왔던 ‘아니요’가 없던 ‘그녀’가 지금은 ‘아니요’를 당당히 말하는 ‘아줌마’가 되어 내 앞에 있는 거다.

나 또한 ‘그녀’를 그대로 경업대에 남겨 둔 채 신선대까지 뛰어 올라갔다. 사랑하는 님을 어찌 이리 내버려두고 나만 홀로 올라갈 수 있는가. 아내도 나도 변해있다. 추억은 그저 추억일 뿐인가. 조금은 가슴 한편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올라간 신선대 역시 오를 수 없는 봉우리여서 실망이 더 컸다. 아내까지 버려두고(?) 오른 봉우리가 길목에 서 있는 보기만 하고 내려와야 하는 봉우리라니. 그러나 내려오는 길에 도마뱀을 발견한 것으로 위안을 받을 수밖에…. 도마뱀인지, 도마뱀붙이인지, 도롱뇽인지, 혹 아는 분은 댓글로 알려주시면 고맙겠다.

숨 가쁘게 다시 경업대로 내려와 아내와 같이 하산을 하는데 이번에는 도토리가 문제다. 올라갈 때 자꾸 도토리를 줍자는 아내의 성화를 내려오면서 줍자고 미뤄놓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려올 때는 그렇게 지천이던 도토리가 거의 없는 게 아닌가. 아내가 투덜거린다.

“그러게 아까 줍자니까. 내려올 때 줍자고 하더니 것 봐요. 없잖아요.”
“허, 거 참! 그 많던 도토리가 다 어디로 가셨데?”
“내려오면서 앞서 간 사람들이 다 주워갔죠.”

그랬다. ‘까짓 도토리를 누가 그리 주울까’ 했던 내 생각이 빗나갔다. 도토리묵이 좋은 음식이라니까 다들 탐을 내는 모양이다. 내려오는 길에 만난 등산객은 방앗간에 가져다주면 도토리묵을 해먹을 수 있도록 해준다는 가르침까지 준다. 어쩌겠는가. 없는 도토리 만들어 주울 수도 없고. 아쉬운 대로 다음을 기약하며 하산했다.

 속리산의 굽이굽이 능선들이 멀리 보인다.
 속리산의 굽이굽이 능선들이 멀리 보인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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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리산의 곱게 물든 단풍이 단아하다.
 속리산의 곱게 물든 단풍이 단아하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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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추억일 뿐?

연애와 결혼은 다르다고 했는가. 그때가 추억 속에서 연애를 말한다면, 지금은 현실 속에서 결혼을 말하는 것이다. 그 누구의 말대로 이미 결혼이라는 무덤을 판, 그것도 그 무덤을 판 지 30여년이 되어가는 우리부부는 추억은 추억으로만 만족해야 한단 말인가.

살림이니 경제니 하는 것에 관심 없던 시절과 실제로 그런 것들과 부닥치는 지금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하이힐로도 마냥 즐겁기만 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장비 다 갖추고도 도토리 찾으며 티격태격해야 하다니.

세월이 우리부부의 낭만을 죽인 걸까. 아니면 우리가 삶에 적절히 변질되어 버려서 그런 걸까. 달콤함만 있던 그때보다는 이번 우리의 산행은 조금은 곰삭은 냄새가 더 강한 산행이 아니었는지. 그때의 속리산과 지금의 속리산은 분명 변함이 없다. 그런데 어찌 이리 사람은 다른 걸까.

 도마뱀인지, 도마뱀붙이인지, 도롱뇽인지, 혹 아는 분은 댓글로 알려주시면 고맙겠다.
 도마뱀인지, 도마뱀붙이인지, 도롱뇽인지, 혹 아는 분은 댓글로 알려주시면 고맙겠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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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선대에서 바위 틈으로 보이는 입석대 쪽을 찍었다.
 신선대에서 바위 틈으로 보이는 입석대 쪽을 찍었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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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갓피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속리산#신선대#경업대#문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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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행복이라 믿는 하루가 또 찾아왔습니다.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엮으며 짓는 삶을 그분과 함께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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