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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이른 시각,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시내(공주)의 제일로 큰 초등학교인 신월초등학교 조동수 교장의 전화였다. 나를 만나러 오겠다는 짧은 전언이었다. 조 교장은 이렇게 이른 아침 출근길에 가끔 나를 만나러 오곤 한다. 우리 아파트 앞이나 금학동 동사무소 옆 빈터에 차를 세워놓고 나를 불러내어 무언가를 주고 간다. 말하자면 선물이다.…번번이 미안한 일이라서 받지 않고 싶은데 다짜고짜로 전화를 건 다음 찾아오겠다하니 피할 재간이 없다. -책속에서

 

나태주 시인의 산문집 <공주, 멀리서도 보이는 풍경>(푸른 길 펴냄)의 '추어탕 한 그릇'이라는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여름 장맛비에 방천 난(무너진, 손상된) 논둑을 향해 바삐 뛰는 아버지를 뒤따라 뛰어가면 장맛비로 뒤집힌 논에는 온통 미꾸라지 천지였다. 해마다 여름이면 이런 미꾸라지로 가마솥 가득 추어탕을 끓여주시곤 했다. 이 가을, 그 논에서 추수로 바쁠 부모님. '추어탕'의 추억에 이끌려 색깔 다른 옥수수알맹이 빼먹듯 먼저 뽑아 읽은 글이다.

 

조동수 교장이 저자에게 이렇게 가져다주는 것들은 집에서 손수 기른 채소나 한과, 술, 차 등인데 이날은 추어탕이다.

 

"이거 추어탕입니다. 금산 중부대학교에 강의 초청을 받아서 갔다가 잘하는 추어탕집이 있다 해서 두 그릇 사 가지고 온 것입니다. 사모님도 간호하느라 수고하셨으니 함께 드세요."

 

마음이 찡해 온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안 되는 나를 위해서 사온 음식이다. 비닐봉지에 담긴 물건을 받기가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책속에서

 

나태주 시인의 이 산문집을 내게 권한 지인의 말을 빌면 이 책은 시인의 자전에세이다. 저자는 지난해 여름과 가을을 병실에서 보냈다. 입원중에 가족들이 장례문제를 의논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런 저자가 기적적으로 병을 이겨내고 퇴원하자마자, 지난날을 돌아보며 페달을 밟아 다시 찾은 공주, 그리고 자신의 그간의 삶을 정리하며 쓴 글이 이 산문집 <공주, 멀리서도 보이는 풍경>의 글들이다.

 

이른 새벽, 추어탕을 보는 순간 조동수 교장은 큰 병을 이겨내고 얼마 전에 퇴원한 지인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른 아침 출근길에 급하게 만나 건네주는 추어탕 한 그릇.

 

그래서 이 글은 병을 이겨낸 지인에게 추어탕 한 그릇 대접하고 싶은 마음을 헤아리면서,  "언제 밥이나 한 끼 먹자"고 쉽게 약속을 정하지만 쉽게 마음내지 못하기 일쑤인 우리들의 일상을 돌아보면서 읽으면 감동이 훨씬 커진다. 

 

저자에게 까만 봉지를 건넨 조동수 교장은 황급히 사라진다. 이른 아침, 날마다 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책상위에 놓인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학교 앞 도로로 나올 것이다. 횡단보도에 서서 호루라기를 불기도 하고 팔을 휘젓기도 하면서 교통정리를 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고집 같은 것이다. 자시 확신이고 다부진 실천력이다. 조 교장은 전임 학교애서도 등하굣길 스쿨버스를 꼬박꼬박 타고 다니며 아이들 현장 지도를 했다. 현재의 학교로 와서는 학교 앞 도로 건널목에 자동차 통행량이 많아 아이들이 위험하다는 걸 알고 교통지도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를테면 교통경찰이 아니라 교통교장이 된 것이다.

 

공주 시내버스 운전자나 택시 기사치고 조 교장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름은 자세히 모른다 해도 조교장이 학교 앞 건널목 한가운데 나와서 교통지도를 하고 있는 걸 보면 대번에 "저 교장선생님 오늘도 나와 계시네!"한다는 것이다."-책속에서

 

저자를 통해 알게 된, 공주 어느 초등학교 조동수 교장 선생님의 교육자로서의 소신과 책임, 두 분의 수다스럽지 않고 투박한 애정과 인간미를 담뿍 느낄 수 있는 글이었다. 이야기는 좀 더 길게 계속된다.

 

성격이 데면데면하여 사람을 잘 사귀지 못한다는 저자는 조 교장과의 지난날들을 떠올린다. 둘이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조 교장의 시원시원하고 꾸밈없는 성격 덕분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저자는 컴퓨터를 켠다.

 

늘 자신을 향해 먼저 깊은 마음을 배려하는 친구에게,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며 이른 아침 추어탕 한 그릇을 대접한 지인에게 오늘은 고맙다는 메일을 꼭 쓰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동수 교장님이 이미 애정 어린 장문의 메일을 보낸 터다.

 

"추어탕. 별것은 아니지만 맛있게 잡수셨으면 참 좋겠네요. 사실은 저는 안 먹고 드린 겁니다. 교장 선생님이 우선이거든요. 교장 선생님께 갖다드리는 과정이 행복하네요. 사랑은 그냥 한없이 주기만 하는 것이랍니다.…따뜻하게 입고 건강 살피십시오. 운동은 꼭 사모님과 함께 하세요. 남자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아내의 건강을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편하게 남자가 삽니다. …추어탕을 드리는 것보다 아침에 선생님을 뵙는 게 더 기쁘네요.…"

-2007.11.29 조동수 드림

 

그리하여 메일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은 끝맺음 된다. 새벽공기 차가운 초겨울 이른 아침, 두 사람의 따뜻한 만남이, 말할 때마다 피어나는 입김까지 함께 떠오를 만큼 생생한 감동으로 읽은 글이다. 아마도 오늘 아침에도 조동수 교장 선생님은 교통정리를 하시겠지.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이 글과 비슷하다. 감동이 비슷하다는 것이 알맞은 표현이겠다. 그냥 그리 특별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들을 가슴 뭉클하게 의미지어 들려주는 시인. 그리하여 눈앞의 이야기인양 생생하게 전해 받는 감동이랄까? 이런 표현이 마땅할까?

 

<공주, 멀리서도 보이는 풍경>은 모두 3부. 이 글은 3부 '속내 깊은 사람들'편에 있다. 공주 출신 박목월 시인을 빼고는 모두 조동수 교장처럼 저자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 조동수 교장의 이야기처럼 뭉클하고 훈훈한 사람들 이야기다.

 

3부 못잖은 감동으로 읽었던 것은 4부 '다시 가 보고 싶은 그 집'이다. 글들의 주인공들은 교사이자 시인으로 살아 온 저자가 지난 날 자주 찾았던 그 집들이다. 손님과 식당이라는 관계만이 아닌 저자가 다시 언제든 찾아가고 싶은 추억과 마음이 스며있는 그곳들, 그곳의 사람들은 우리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내 이웃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삶의 가을은 찾아온다. 책읽기 좋은 계절이다.

 

때 이른 된서리를 이겨내게 해준 나태주 시인의 공주와 공주 사람들을 통해, 멀리에 있지만 그리워하는 까닭에 늘 아슴아슴 눈에 선한, 그리하여 더욱 애틋한 고향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한 시인의 가을은 어떤 모습일까? 이 책을 통해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들 내 삶의 가을을, 지금 성큼 우리에게 와 있는 가을을 적극적으로 만나봄도 좋으리라. 진정!

덧붙이는 글 | <공주, 멀리서도 보이는 풍경>(저자:나태주 / 출판사:푸른길 / 펴낸날:2008.9.20 / 1만5000원)


공주, 멀리서도 보이는 풍경

나태주 지음, 푸른길(2008)


태그:#공주, #공주 사람들, #나태주, #가을,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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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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