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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였습니다. 완연한 가을로 접어든 주말 오후, 집(인천 서구 공촌동)에서 동인천까지 자전거를 타고 간 적이 있습니다. 인천시와 롯데건설이 자연생태보전지역인 인천 계양산에 골프장을 건설하려는 터무니없는 개발계획을 막아내기 위해 함께 하는, 인천녹색연합 활동가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기로 약속해서 대한서림까지 가야했습니다. 당시 애관극장에서 본 영화는 이미연과 이태란이 주연한 <어깨너머의 연인>이었습니다.

자전거로 동인천까지 가는 길은 2시간 넘게 걸렸던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정겨운 모교(대헌중학교)와 달동네로 유명했지만 재개발이 한창인 송림동 일대를 둘러보고, 산업도로 때문에 사라져가는 배다리, 동인천 북광장 조성사업으로 영세상인들이 쫓겨날 처지에 놓인 70년 전통의 중앙시장과 옛사랑의 추억이 있는 화평동 냉면거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처럼.

배다리 책거리에 남아있는 책방
 배다리 책거리에 남아있는 책방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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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속으로 사라지는 배다리 책방을 아시나요?

헌책방과 서점으로 즐비했던 옛거리의 모습을 잃어버린 배다리를 지날 때는, 중학교(키도 몸집도 작은 아이가 시내로 등하교 하느라 참 고생 많이 했었다.) 진학 선물로 어머니께서 사주신 국어사전과 영어사전, 옥편이 떠올랐습니다. 당시(1990년대)만 해도 인천에서 괜찮은 교과서나 참고서, 그 외 새.헌책(만화, 잡지)을 저렴하게 사려면 배다리를 찾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네나 학교 주변에 마땅한 서점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름 인천의 역사와 전통이 살아숨쉬는 배다리는 인천 사람들과 학생들에게 대대로 이어져오는 가보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배다리를 모르면 인천 사람이 아니다!
 배다리를 모르면 인천 사람이 아니다!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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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시내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려면(학교, 시장 갈 때 이용) 정류장까지 논길과 산고개를 넘어야 하는 외진 촌동네에서 살아, 어머니나 저나 배다리까지 한 번 나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버스를 타도(운좋게 앉을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 서서 가야 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넘어와 가정동, 가좌동을 지나 인천교(지금은 그 흔적도 없지만...)를 건너 도화동과 인천대, 송림동을 지나서야 도착하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한 시간 정도 걸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배다리 책방에서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국민학교 때 공부도 곧잘 했지만 중학교에 진학치 못했던 어머니는, 중학교에 진학하는 제게 선물로 국어사전과 영어사전, 옥편(자전)을 사주셨습니다.

18년 넘게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의 선물
 18년 넘게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의 선물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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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문에 고향인 이북을 떠나 피난 내려온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외할머니 혼자 자식들을 돌보며 생계를 꾸려야해서, 장녀인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었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배다리와 가까운 송림동 달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

빛바랜 사전과 옥편에서 나팔꽃과 국어, 한자 쪽지시험지를 찾다!!

요즘에는 휴대하기 좋고 작고 예쁜 전자사전이 대세지만,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만해도 쉬는시간마다 잠이 모자란 학생들에게 틈틈이 베개 역할도 톡톡히 해 준 사전과 옥편은 꽤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책상 속에 넣어두지 못하고(저희 때는 사물함이 없었습니다.) 무겁지만 가방에 넣고 다니는 사전을 도둑맞지 않으려고, 사전 귀퉁이 마다 형광펜으로 볼펜으로 자기 이름을 새겨 넣어야 했습니다. 도난 방지용으로 말입니다. 교과서나 참고서, 사전을 훔쳐 헌책방에 파는 치들 때문에 각별히 조심해야 했습니다.

어머니의 선물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사전마다 이름을 적어 넣어야 했다.
 어머니의 선물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사전마다 이름을 적어 넣어야 했다.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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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사전에 붙여둔 견출지가 닳고 달았다.
 영어사전에 붙여둔 견출지가 닳고 달았다.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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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무슨 과목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교과서를 잃어버려 옆반 친구에게 반친구들의 교과서를 빌려달라고 부탁했는데, 빌려온 교과서가 제 교과서였던 적도 있습니다.

암튼 18년 넘게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의 선물과 다른 사전과 영어단어장을, 어제(9일) 한글날을 맞아 책장에서 꺼내 찬찬히 들춰봤습니다.

그 속에서 15년 동안 영어사전 속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 나팔꽃과 자전에 숨어있넌 "국어"와 한문시간이면 매일같이 보던 쪽지시험지까지 발견했습니다. 동생에게까지 대물림 된 어머니의 선물, 학창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사전 속에서 말입니다.

영어사전 속에서 나팔꽃잎을 발견했다. 고등학교 때 넣어둔 것 같다.
 영어사전 속에서 나팔꽃잎을 발견했다. 고등학교 때 넣어둔 것 같다.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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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시간에 매번 보던 쪽지 시험지도 옥편에서 나왔다.
 한문시간에 매번 보던 쪽지 시험지도 옥편에서 나왔다.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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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하기 좋은 자전에서는 이런 것도 나왔다.
 휴대하기 좋은 자전에서는 이런 것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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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대물림 되지 못하는 오래된 사전들
 더 이상 대물림 되지 못하는 오래된 사전들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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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사전, #한글날, #옥편, #배다리,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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